출산을 20일여 앞두고
새벽에 잠에서 깬다. 뱃속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 배꼽 아래쪽에서 꿀렁하고 무언가가 움직인다. 곧이어 오른쪽 옆구리를 툭치고 지나간다. 침대에서 비스듬히 몸을 일으켜 화장실에 다녀온다. 똑바로 누운 상태로는 이제 일어날 수 없다.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한 시간을 뒤척이다가 일어나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간간히 뱃속에서는 꼬물거림이 느껴진다. 명치를 걷어차기도 한다는데, 아직 그녀는 그런 적이 없다. 시어머님은 아이가 순해서 그런가 보다고 좋아하시지만, 난 속지 않는다. 그녀는 내숭을 떨고 있는 게 분명하다. 어쩐지 그렇게 느껴진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녀의 움직임이 어쩐지 다 계산된 것 같기 때문이다. 막 움직이다가도 아빠가 손을 가져다 대면 갑자기 멈춰 선다. 그러다가 한 번씩, 그러니까 아빠가 아주 흥미를 잃어버리기 직전쯤에 한 번씩 자신의 움직임을 그의 손바닥 끝에 전달한다. 그러면 그는 녹아난다. 얼굴에 화색이 완연하고 신기함에 몸서리를 친다. 그녀는 이미 밀당의 고수다. 아빠를 사로잡는 법을 알고 있다. 그녀의 아빠는 그런 그녀의 밀당에 저항하지 못하고, 당연하게도 이미 사랑에 푹 빠져버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배에 대고 사랑을 속삭인다. 태어나면 잘 해주겠노라고 약속도 하고 얼굴도 한번 본 적 없으면서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배를 연신 쓰다듬고 입을 맞추고 얼굴을 비빈다. 딸바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어느 정도 수준으로 드러날 것인가가 관건이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기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며 자기 몫을 단단히 챙기고 있다. 남편과 나의 삶은 전과 다름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한 번씩 그녀의 어떠함에 따라 올스톱되기도 한다. 그녀는 우리에게 적절한 긴장감을 안겨주며 자기 자리를 확실히 해 나가고 있다. 자기 존재를 우리에게 드러낸 이후로부터 나는 먹는 것과 입는 것과 일하는 것 모두에서 변화를 겪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그랬고 아마 누가 말렸어도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이 변화를 한 번도 희생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 좋아하던 커피도 잘 마시지 않게 되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전혀 불만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뱃속에서 움직임이 느껴지기 시작한 20주 이후부터 그녀가 나에게서 받는 것보다 나에게 주는 것이 더 많다.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거나 기분이 나쁘다가도 뱃속에서 콕콕 치기도 하고 통통 발을 구르듯 움직이기도 하며 때로 물고기가 지나가듯이 꿀렁하고 움직일 때, 어쩌면 나를 위로하는 것도 같고 힘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여기 있다고 다독이는 것 같기도 한 그 움직임에 나는 금방 기분이 좋아지고 만다. 음악을 들을 때 움직임이 느껴지면 혹시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가만히 박자를 세어보기도 하고, 노래를 부를 때 움직임이 느껴지면 아빠와 엄마를 닮아 노래를 좋아하는구나 싶어 기특하기도 하다. 세계적 추세와는 좀 다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요즘들어 우리나라의 나이 셈법이 더 정확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토록 분명하게 다른 사람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온 뱃속에서의 1년 가까이의 시간을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하지 않고,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대접해주는 것이 아무래도 더 맞는 것 같다.
새벽에 깨는 것은 배가 고파서가 아닐까 싶어 롤케이크 한 조각과 딸기를 꺼내어 먹고 있다. 내 평생 딸기를 이렇게 많은 먹은 봄은 없었다. 남편은 겨울의 끝자락에 딸기가 마트에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부지런히 딸기를 사다 날랐다. 자기는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어디를 갔다 올 때마다 시키지 않아도 딸기를 사 왔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너 먹으라고 사 온 거 아니라며 오해하지 말라고 했다. 예쁜 딸기 먹고 예쁜 딸 낳으라고 사 온 것이란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올해 먹은 딸기가 아마 내 평생 먹은 딸기의 총량과 엇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 딸기를 꺼내어 야금야금 먹는 이 새벽. 이제 딸기도 끝물이고 나의 임신기간도 끝물이다. 오늘로 D-19일. 이제 그녀는 지금 당장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다. 앞으로 겪게 될 일이 지금까지의 일보다 훨씬 많고 다양하고 때로는 벅차겠지만, 걱정과 불안보다는 기대와 소망으로 그녀를 맞이하려 한다. 낳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이었다는, 출산한 지 이제 막 50일이 지난 친구의 고백을 아마도 나도 하게 되겠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으로서는 낳는 것 자체도 너무나 거대한 일로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와 소망과 기쁨을 놓치지 말기로 하자. 지금 이 순간에도 뱃속에서 계속 꼬물락거리며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에게 멋진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 어떻게 하는 것이 멋진 엄마가 되는 길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각오만큼은 꽤 괜찮았다는 것을 나중에라도 나에게 혹은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 이 글을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