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홍상수, 2022)
발화를 통해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방식은 <탑>(홍상수, 2022)의 근간을 이룬다. 병수를 가정적이며 겁이 많고 여우 같은 사람으로 묘사하거나, 성격상 배운 건 잊지 않는다고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정수가 단적인 예다. 그러면서도 정수는 본인에 대해 잘 모르는 병수가 자신을 정의하는 말(내성적이어도 할 건 하는 사람)에는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인물의 성격이 말해지는 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타인에 대한 섣부른 평가를 지양하라.’와 같은 선험적인 명제 따위가 아니라, 특정 인물이 공적 영역을 넘어 사적 영역에서 다른 인물의 새로운 성격을 경험할 때 보이는 반응이다. 영화에서 건물 내부를 내어주는 사람은 해옥이고, 그 안에 입주하는 사람은 병수이다. 그러므로 특정 인물이란 해옥, 다른 인물은 병수라 말할 수 있는데, 이로부터 발생하는 권력관계는 병수의 성격 변화 과정과 나란히 놓고 보았을 때, 뒤틀린 시간의 출현을 논리정연하게 만들어 주는 장치가 된다.
쥴과 정수의 대화를 통해 해옥의 성향을 미루어 짐작해 보자면, 그는 잘나가는 사람 내지는 말 잘 듣는 사람을 좋아한다. 타인에게 건네는 착하다는 말은 착하게 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을 어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어렵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는 게 쥴이 평가하는 해옥이다. 실제로 해옥은 재능도 없고 월세도 못 내는, 심지어 집에 있으면서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4층 임차인을 묘사할 때, 매번 “착하긴 한데….”로 말문을 연다. 착하지만 해옥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임차인의 자리는 결국 병수로 대체된다. 영화 초반 해옥이 평가하는 병수는 ‘잘나가고, 말 잘 듣는’ 조건을 모두 충족한 인물이다. 다시 말하자면 병수는 잘나가는 영화감독이었기 때문에 해옥으로부터 4층 입주를 권유받게 되고, 해옥의 건물을 다시 방문해 2층에서 함께 식사하겠다는 약속을 지킴으로써 3층에 들어와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본다면 어떨까. 병수 또한 4층 임차인과 마찬가지로 해옥이 바라는 이상적인 인물에서 벗어나는 순간 지체 없이 건물을 떠나야만 한다고.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 사이의 틈새는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틈새란 병수가 외부에 있느냐, 내부에 머무르냐를 기준으로 후자에 해당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건물 내부를 점유할 수 있는 기준이 명확하며, 해옥의 기준을 벗어날 경우에는 해당 공간을 떠나는 방식으로 영화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병수는 4층 임차인의 불량한 행동을 답습하며 정수가 평가한 자기 모습을 재현해 낸다. 그가 선희와 3층에 거주할 때, 물 새는 천정이 언제쯤 수리되냐고 묻자, 해옥은 “내가 밖에서 문 두드려도 대답을 안 해. 집 안에 있으면서.”라며 4층 임차인을 묘사한다. 이는 곧이어 4층에 거주하게 될 병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해옥은 빗물이 새고 화장실 배수구가 막혀 냄새가 난다며 불평하는 병수에게서 어린아이 같은 면모를, 번호 키 비밀번호를 바꾼 후 알려주지 않는 그에게서 꼼꼼히 문단속하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정수가 했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다. 더군다나 회고전도 가지 않고 영화를 만들지도 않는 상태, 즉 잘 나가지 않는 상태에서 병수는 3층에서는 선희와, 4층에서는 지영과 시간을 보낸다. 이처럼 정수의 말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면서 해옥의 기준을 벗어난 그가 갈 수 있는 곳이 건물 밖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영화가 변화하는 병수를 반기지 않으며 이에 확신을 더한다. 영화 초반 병수는 시청각을 동원해 환영받는다. 영화는 건물 내부로 들어오는 사람을 마중 나온 인물이 1층 문 앞에 서 있는 장면과 기타 소리를 삽입하여, 한 시퀀스에서 다음 시퀀스로 넘어가는 순간을 표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들이 존재한다. 시각적인 측면에서는 지영이 4층 현관문을 열고 곧장 들어올 때와 건물 외벽을 보여주는 장면을 꼽을 수 있고, 청각적인 측면에서는 영화적 시간이 마지막으로 전환될 때 삽입되지 않는 기타 소리를 예로 들 수 있다. 후자에 주목해 보자면, 해옥이 병수에게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요구한 사항은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 그 어디에서도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거나,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랬을 때, 우리는 말 안 듣는 인물에게 내부란 공간은 경유하는 곳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체험한다. 그러면서 “어쩌면 밖에서의 감독님 모습이 더 진짜일 수 있는 거지.”라는 해옥의 말마따나 애초부터 그는 병수에게 바깥에서의 모습만을 요구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난다. 따라서 환대받지 못한 채 처음의 시간으로 복귀해 1층 문 앞에 서 있는 병수는 말 잘 듣고 잘나가는 감독의 지위를 유지한 채 건물 내부에서 거주할 기회를 한 번 더 획득한 인물이자, 동시에 해당 기준을 벗어나는 순간 내쫓길 위험에 처한다는 경고를 받은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타인에 대한 체험과 경험은 모자이크된 이차프레임 속 누군가에서 구체성을 획득한 개인, 그리고 건물 내부에서 외부로 확장된다.
지금 우리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상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쉽게 맺고 끊을 수 있고, 단체방에서 조용히 나가기를 선택할 수 있으며, 화상으로 진행되는 모임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관계를 형성할 때 따라오는 스트레스를 감수하면서 친목을 유지하는 한편, 그렇지 않은 선택지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같은 결괏값이라면 속 편한 관계를 지향한다. 이러한 방식은 본인 역시 누군가로부터 배제될 수 있다는 불안함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다른 범주의 비극을 낳기도 한다.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을(못할) 때, 언제든 바깥으로 내몰릴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만약 돌출된 틈새를 인식하는 순간 모종의 무서움이나 쓸쓸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존재와 쓸모를 입증해야 하는 우리 삶과 닮아있다는 데서 기인하는 감정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