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뤼디아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고 밝아. 하지만 당신의 눈 속에는 밝음이 없어. 오직 슬픔뿐이야.
당신의 눈은 세상에 행복은 없고 아름다움과 사랑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고, 그걸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슬픈 눈을 가졌어. 내 생각에 그건 당신에게 고향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아.
당신은 숲에서 나와 내게로 온 사람이야. 언젠가 당신은 다시 길을 떠나 이끼 위에서 잠자면서 방랑을 계속하겠지. 하지만 그러면 '내' 고향은 어디인 거지? 당신이 떠나가더라도 내게는 아버지가 있고, 동생도 있고, 가만히 앉아서 당신을 생각할 수 있는 방과 창문도 있겠지. 하지만 더 이상 내게 고향은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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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모든 예술과 모든 정신의 뿌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일 거라고 골드문트는 생각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덧없이 사라질 것이 무서워 떤다.
꽃이 시들고 잎이 떨어지는 것을 슬프게 지켜보면서 우리도 그처럼 허무하게 시들어버릴 것을 느낀다.
우리가 예술가가 되어 형상을 만들거나 철학자로서 세상의 원리를 찾고 생각을 말로 정리한다는 것은 거대한 죽음의 춤판에서 뭔가를 구해내기 위함이고, 우리보다 오래 살아남을 어떤 것을 설정하려는 행위다.
헤세의 성장기 체험이 담긴 영혼의 자서전,
소년의 성장소설이자 관념적인 성애소설
친구가 배수아님의 번역작품을 찾다가 걸려든, 내가 헤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 책이다.
주인공 골드문트는 방랑자의 기질을 가졌지만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한 채 수도원에 들어왔다.
자신과 정반대의 영혼을 가진 나르치스를 만나 깨어난 후 수도원을 뛰쳐나와 방랑을 시작하는데...
책 속의 설정과 스토리 부분들만 보더라도 골드문트의 생은 나와 무척 닮았다. (성별은 바뀌었지만..)
자유를 갈망하고 모험을 즐기면서 내가 나일 수 있는 경험을 계속하며 삶을 인식하는 자.
호기심은 나를 이끄는 원동력이고 방랑길에서 마주치는 그 무엇도 나를 머무르게 할 수 없다.
골드문트의 여정 스팟을 회사로 치환하면 내 얘기가 된다.
사내에서 이성을 만났고 헤어졌으며, 이직을 하고 또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는 나날들.
떠돌면서 세상 구경을 하고 여러 인간 군상과 마주치고 그 속에 섞여 들다가 다시 빠져나왔다.
여러 사건을 겪은 나는 이전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되어 방랑을 계속 이어가곤 했다.
이번 방랑의 끝도 머지않았다. 다시 짐을 꾸리고 발길을 옮겨야 할 때다.
골드문트는 다치고 병든 몸으로 수도원에 돌아갔지만 나는 내 의지로 건강하게 돌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가 그랬듯 방랑의 끝에 예술을 꽃피울 수 있다면 좋겠다.
한 사람이자 여러 사람의 생이 담긴 형상, 인자한 미소 한 자락을 얹은 예술로서 말이다.
한순간이나마 그걸 보는 이들은 먹구름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