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기
단지 조용하게 그리고 묵묵하게 해 나가는 끈기, 오직 그거 하나였다. 그중 하나가 그림이었다.
묵묵하게 해오던 것들 중 가장 재미있었고 그나마 욕심을 냈다.
초등학교 시절 나의 장래 희망 칸은 늘 화가였다. 이렇다 할 학원을 다니지도 않았고 유화, 수채화의 구분도 모르고 밥로스 아저씨가 위대해 보였을 때, 가장 순수했을 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현실을 알아갈 즈음 화가였던 내 꿈은 선생님과 여러 사람들 손을 거치며 '디자이너'로 재단되었다. 이것도 물론 나쁘진 않다. 꽤 좋은 직업이지만. 그저 묵묵하기만 한 나에게는 곧잘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였다. 순수 미술이 절대 가볍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경쟁사회의 구조가 물씬 느껴진다랄까?
내 의견을 담아도, 담지 않아서도 안 되는 제품들을 디자인하면서 괴리감은 커져만 갔다. 꽤나 보람된 직업이긴 했지만 그만큼 고된 직업.
무엇보다, 나는 트렌드니 뭐니를 따라갈 만큼 재빠르진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자꾸만 그저 그림 그릴 때가 즐거웠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꾸준히 그려올걸'이라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의 유일한 무기가 끈기인데 맥없이 놔 버렸으니까.
손이 꽤 굳었지만 시작해 볼까라는 마음만 몇 년째 품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냥 그려 버리면 되지 라는 생각을 하고 펜을 잡아도 막상 내 앞에 놓인 빈 종이가 너무 캄캄해 보여 그렇게 빈 종이로 둔적도 많았다.
즐겁고자 다시 시작하는 것인데 연필을 들 용기 조차 가질 수 없도록 캄캄하고 무섭다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렇게 또 나이를 한 살 먹어 가던 차였다.
그렇게 손 놓고 있던 햇수를 생각하니, 원기둥부터 다시 배웠어도 이미 많은 단계를 거쳐 제법 그리고도 남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마도 나는 '도피를 위한 도피'를 하고 있었나 보다.
선이 지저분해도, 비율이 엉망이어도 즐겁게 그리는 게 목표인데..
아마도 한 살 더 먹었다고 없던 혜안이 조금이나마 생긴 것인지..
그래서 막연히 시작하고자 즐겁게 종이도 고르고 연필도 사고 펜도 사고 손을 풀고자 제법 끄적이기도 시작했다.
언젠간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손으로 표현하기도 쉬워지겠지.
비록 어제보다 한걸음 더는 아니더라도 뒤로만 가지 않으면 되지. 또 뒤로 가보면 어때 지나쳐온 다른 길로 가볼 수 있는 것인데.
중요한 건 내가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것이다.
다시 연필을 잡으니 이것저것 그려보고 싶은 게 꽤 많다. 그리고 직접 가서 보고 싶은 마음도 들고
지쳐 쓰러져 있기만 한 직장인에게 동력을 주는 취미란 꽤 중요하구나라고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마저도 야근의 연속이라는 사치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좋은 회사 덕에 이렇게 끄적이거나 그릴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반면 딴짓을 하고 있다는 반증인가... 소심하고 잡생각까지 많아 오로지 진득하기만 할 뿐 멀티가 되지 않는 나는 두 마리의 토끼를 과연 다 잡을 수 있을까 라는 부분엔 꽤나 회의적이다.
하지만 짬나는 시간은 그 시간 나름대로 손을 쉬지 않고 움직여 볼 것이다. 선들이 모아 형체가 되는 것처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런 행동도 훗날 무언가를 만들어 내겠지.
일단은 즐기자.
마냥 연필 하나로 즐거웠던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