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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Jul 26. 2021

영화 <델마(2017)> 리뷰

이토록 매혹적인 재앙 이후의 세계

《델마》는 노르웨이, 덴마크 등의 북유럽 국가가 참여하여 제작한 초자연적-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다. 포스터엔 ‘그녀가 원하면 모든 것이 바뀐다’고 적혀 있으며 다음 영화 소개글에선 ‘자신도 모르는 운명과 마주한 한 소녀의 불안과 공포’라는 문구를 찾을 수 있으니 이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관객이라면 《델마》가 제법 흥미진진한 환상영화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어 보인다. 유감스럽지만 《델마》가 펼쳐내는 세계의 속도는 흔한 상업 영화처럼 빠르지 않다. 어디 그뿐인가? 영화의 리듬감은 마치 준비운동을 하고 천천히 몸을 달궈 나갈 때 우리의 심박수처럼 천천히 상승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가 영화의 매력을 떨어뜨리진 않는다.


 

초자연적 능력을 보유한 소녀는 창작자들이 오랫동안 사랑해 온 모티프다. 그러나 《델마》는 기존 많은 창작물처럼 주인공인 델마(엘리 하르보에)를 쉽게 대상화시키지 않으며, 종교적 알레고리를 통해 도식적으로 풀이되기를 거부한다. 이밖에도, 흔하게 차용하는 이미지를 독특하게 변주한 점에 눈길을 준다면 두 시간 남짓한 상영시간을 흥미롭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영화 도입부에서 나타난, ‘고립된 세계 속 사냥하는 부녀’의 이미지는 브라이언 퓰러의 드라마 《한니발》 시리즈, 조 라이트의 영화 《한나(2011) 》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소녀는 평범하다기엔 위협적인 십대로 그려진다. 결은 다르지만 아들린 디외도네의 『여름의 겨울』에서도 사냥꾼인 아버지를 둔 마녀적 성향의 딸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숲 등으로 표상되는 고립된 세계에서 –그것이 비정상적인 상황일지라도-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델마는 고향으로 돌아가 고립될 때, 안정되기보다는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  



출처: 다음 영화 포토



어쨌든 이 영화를 읽어낼 때, 여성과 종교라는 키워드를 배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다. 일단 간단하게 시놉시스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생물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델마는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게 되며, 주변을 겉돌다가도 아냐(카야 윌킨스)와 묘한 기류를 이어나간다. 동시에 그는 몇 차례의 발작을 겪으며 자신이 초자연적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또한 자신의 능력과 발작 사이에 모종의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 모든 이야기를 한다’고 자신했던 그는 침묵 속에 감춰진 가족사를 발견하기도 한다. 자신은 잊었던 어렸을 적의 발작과 동생의 죽음, 그리고 오래 전 돌아가신 줄 알았던 할머니의 존재를.



일단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아마 우리에겐 델마가 지닌 초자연적 능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의사는 겉으로 나타난 증세만으로 심인성 발작이라 하였으나, 오로지 그뿐이 아니라는 건 델마를 비롯한 모든 관객이 알고 있다. 델마의 아버지는 발작(징후)과 사건(결과)의 관계성을 통해 ‘네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것을 원했던 것이다’라고 몰아세우며 종교의 힘으로 억누르려 했고, 영화 포스터 역시 델마 아버지의 의견을 따라 ‘그녀가 원하면 모든 것이 바뀐다’고 말한 그 능력의 정체는 대체 뭘까. 유감스럽게도 감독인 요아킴 트리에는 뚜렷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가 지닌 매혹적인 불안을 극대화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일단 나는 델마의 능력이 델마의 소망을 현실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그의 능력이 제한적인 것으로 묘사된다(짐작건대, 델마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세상에 존재하게 할 순 없는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점이 델마의 능력을 완전히 ‘신’적이라 하기엔  부족한 근거가 된다. 어쩌면 능력은 무한한데, 능력을 쓰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점에서 오는 한계일 수도 있겠다만..).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존재를 비존재로 전환시키는 데에 자신의 강렬한 감정이 요구된다는 것 정도이다. 이렇듯 언어화 시키기에도, 수치화 시키기에도 어려운 델마의 능력은 델마 뿐 아니라 그의 가족에게 큰 불안으로 다가온다.


 

출처: 다음 영화 포토



여기서 짚어야 할 한 가지 요소는, 《델마》는 여성 주연 성장 영화이며, 델마가 연애감정을 느끼는 상대 역시 여성이기도 한데, 여성간의 관계성이 이상하리만큼 단절되어 있다는 점이다. 과거 회상에선 나타나지 않는 델마 어머니의 장애에 대해선 조금의 서술 없이 서사적으로 함구하며, 델마가 지닌 능력의 기원이 되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할머니와의 관계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델마는, 그러하기에, 고향에서 고립된 개체가 된다. 이 모습은 델마가 오슬로에서 맺은 아냐/아냐 어머니와의 관계와 크나큰 대조를 이루기에, 어쩌면 그 해답은 오슬로가 아닌 고향에 있으리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인물이 바로 아버지인 트론드(헨릭 라파엘센)다. 그는 불가해한 힘을 지닌 델마를 이해하지 않았고, 델마가 자신의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에 도움을 주기보단 능력을 무조건적으로 억압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이것이 지옥의 고통이니 두려워해야 한다'며 딸아이의 손을 촛불에 가져다 대어 화상을 입기 직전까지 몰아가며, 어린 아이에게 과할 정도의 진정제를 먹였고, 본인의 의지로 상황을 이끌어낸 것이 아님에도 델마에게 수없이 기도를 되뇌게 했다. 이러한 긴장은 영화 중후반부에서 나타난, 요양원에 강제적으로 입원된 친할머니의 존재에서 극대화된다; 델마의 아버지는 델마와 델마 할머니 사이에 존재할 수 있었던 모계적 연결 고리를 단절시킨 주범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듯 그가 영화 내에서 일관적으로 유지한 태도들, 총구를 겨누던 충동이나, 종교를 인용하며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행위 등은 중세~근대 유럽을 휩쓴 마녀 사냥을 연상케 한다.



가부장적 사회 내의 여성이 혐오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매혹적인 요소를 지닌 이중적인 존재라는 것은 페미니즘 이론 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발상인데, 로지 브라이도티는 이러한 이중성에 대해 여성은 “매혹과 혐오라는 특이한 혼합을 이끌어내는 특권을 괴물과 공유”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일 것이다. 이 불가해한 능력을 지닌 델마는, 그렇다면 괴물인 것인가?



사실 이에 대한 대답은 영화 내에 존재한다. 영화 내에서 델마는 설명할 수 있는 것만 믿는다는 한 남학생에게 묻는다. 스마트폰의 원리를 설명해 보라고. 델마는 델마로서 존재한다. 그에 대한 추가적인 판단은 기실, 필요하지 않다.



출처: 다음 영화 포토


이전에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소설인지 심리학 서적인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누군가에게 악마가 깃들어 악행을 범한다는 건 쉽게 믿어도, 누군가에게 선한 신이 깃들었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 만큼은 격렬하게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델마》는 다만 광막한 노르웨이의 풍경 속, 익사하지 않고 새를 뱉어냄으로써 자유를 얻은 그가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말없이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속삭인다. 역사 속에서 누명을 쓰고 죽음을 맞이한 몇 만 명 마녀의 능력이 어쩌면, 예수의 기적과 같았을 지 모른다고.




* 참고문헌

김상근 (2008). 신플라톤주의 신학이 16-17세기 유럽의 마녀사냥에 미친 영향. 신학논단, 51, 139-171

송도선, 김희현 (2019). 마녀의 시각적 표현 양상에 대한 인식 변화의 고찰.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25(1), 213-229

최민아 (2020). 이상한 나라에서 온 소녀: 영화 〈마녀〉와 〈한나(Hanna)〉속 소녀 캐릭터의 특성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70, 7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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