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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Jul 20. 2021

영화 <분노 (2016)> 리뷰

사랑하는 이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최근  일본 드라마(MIU404, 보더)를 보고 있어서인지 일본 영화 '분노'가 눈에 띄었다. 넓고 푸른 바다가 배경인 점도 한 몫  했지만, 그 위를 지배하는 한자 노(怒)가 더욱 내 눈길을 끌었다. 정말 영화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없이 보기 시작했던 탓인지,  초반 몇 분 간은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조금은 어려웠다. 동시간대에 펼쳐지는 세 장소의 각기 다른 사연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놉시스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아무래도 영화의 캐치 프레이즈인 '내가 사랑하는 당신… 살인자인가요?'를  인용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느 여름날 도쿄에선 부부가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용의자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리고 일 년 후  관객은 일본의 세 장소에 홀연히 나타난 세 명의 젊은 청년을 보게 된다. 이 세 명 중 한 명이 범인이라는 것은 틀림없는데, 세  명은 지역사회에 서서히 녹아들며 나름대로의 일상을 일궈나가고,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서서히 정립해나간다. 불안하고도 아슬아슬한  평화이지만 보는동안 우리는 그 평화가 깨지지 않길 바랄 수밖에 없다. 치바 항구의 요헤이(와타나베 켄)는 이미 가출했던 딸  아이코(미야자키 아오이)로 마음앓이를 호되게 했다. 그런데 아이코가 선택한 남자 타시로(마츠야마 켄이치)가 살인자라면 아버지인  요헤이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 것이며, 자신이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으리라 체념한 아이코의 절망은 어떠할  것인가.도쿄에서 꽤 벌이 좋은 일을 하며, 클럽에서 삶을 즐기는 것 처럼 보이는 샐러리맨 유마(츠마부키 사토시)의 어머니는  호스피스 병동에 있으며 게이라는 성 정체성으로 부유하는 일상을 사는 것으로 유추된다. 이때 그가 속절없이 사랑에 빠진  나오토(아야노 고)가 살인자라면 얼마나 괴로울 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오키나와에 사는 고등학생인 이즈미(히로세  스즈)와 타츠야(사쿠모토 타카라)는 어떤가. 갑작스레 찾아온 고통 속에서 둘을 위로한 배낭여행자 타나카(모리야마 미라이)가  살인자라면.




영화의 장르는 드라마/스릴러로 분류되어 있으나(구글에 검색했을 때엔 '미스테리'도 뜬다만),  나는 이 영화가 '드라마'쪽에 더 많은 무게를 싣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영화의 제목이 어째서 분노인지를 생각하다보면 더더욱  말이다. 이 영화는 마치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처럼 사랑과 의심의 관계에 대해 유려하게 보여준다.의심은 언제나 사랑 후에 온다.  사랑하기에 상대방을 믿고, 믿기에 배신당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품게 되고, 이 욕망에 발목이 잡혀 상대방을 의심하게 된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한 번 싹튼 의심은 결국 어떠한 의미로든 분노로 귀결되는데, 의심이 현실로 드러날 경우 분노의 방향성은  타인에게로 향하기 마련이나, 의심이 거짓이었음이 밝혀질 경우 분노의 방향성은 자신에게로 돌아오며, 이때 분노는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게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하므로 강렬하디 강렬한 분노는 역으로, 상대방을 향한 자신의 믿음, 혹은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감정이기도 하며, 나는 그것이 이 영화의 제목인 이유라고 본다.








기본적으로  영화를 이끄는 가장 큰 의심은 사랑하게 된 상대방이 살인자일 것이냐, 살인자이지 않을 것이냐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의심은  관객에게 주어진 것이지 근본적으로 영화의 스토리를 이끄는 영화 내부의 의심은 아니다. 영화 내부의 인물들을 이끄는 의심의 씨앗은  아주 작고도 흔한 것이다. 요헤이의 의심은 아이코를 향한다. 사랑하는 딸이 남들과는 다르기에 딸의 선택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  만일 아이코가 타시로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치바 항구의 이야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유마와 나오토 사이의 의심은 나오토가  유마에게 모든것을 털어놓지 않는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으나 상대방이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는다는 건 불안을 야기한다. 그가 내게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왜 전부를 내게 내놓지 않는  것인지 갈급해진다. 나오토가 자신의 출신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둘의 이야기 역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오키나와의 이야기는 어떤가. 이즈미와 타츠야에겐 도쿄의 살인사건이란 일어나지 않은 것과 진배없다. 이곳에서 발생한 비밀은 이즈미의  것이며,  말해봤자 달라지는 것이 없을 터이니 말하지 말라는 이즈미의 불신이 타츠야의 무력감을 심화시킨다. 여기서 그가 기댈  곳은 자신이 그 사건을 굳이 밝히지 않아도 괜찮은(즉 이즈미와의 약속을 배신하지 않아도 괜찮은) 상대, 같은 사건의 목격자인 타나카뿐이었다. 만일 이즈미가 어머니-혹은 세상, 타츠야에게 소리내어 구조요청을 했더라면 오키나와의 이야기 역시 영화 내의 결론과는 사뭇 달랐으리라.




위에서  나는 오키나와에선 '의심'이 발생했다고 적는 대신 '불신'이 있었다고 적었다. 오키나와에서 발생하는 분노는 의심이라는 단계 없이  '배신'을 즉각적으로 경험하여 터져나오는 분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분노는 이즈미라는 캐릭터에게 커다란 전환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부터 이즈미는 수동적으로 그려지는 편이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키나와로 이사와 전학을 오게  되었으며, 무인도로 오가는 길엔 항상 타츠야와 함께하는 등 공간적 이동 장면에서 이즈미의 능동성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타츠야와 함께 다닐 땐 제법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는 듯 보이지만, 아이가 지나치게 성숙하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방어 기제와  유사하다는 말이 과연 맞는 것인지 본인이 큰 사건을 겪은 후엔 완전히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듯 보였다. 곧잘 따르던 타나카와  함께 있는 씬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이즈미의 어머니, 혹은 보호자와의 상담조차 영화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랬기에 영화 끝에서,  이즈미가 직접 배를 몰고 이동하여 타츠야의 선택이 발생한 원인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고통과 절망을 완전히 수몰시키고자 했던 것만으로는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치유의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선 자신에게 상처와 통증이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하지 않겠나. 빛과 그림자의 경계에 서 있도록  디렉팅되는 경우가 잦은 듯 보였던 그가, 마지막 장면에서 강렬한 햇빛 아래 흰 옷을 입고 있다는 것으로 감독은 전하고자 하는 뜻을  분명히 어필했다고 생각한다.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전달되지 않아.



러닝타임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짧게 느껴진 영화였다. 영화 안에선 주요 인물들이지만, 사회 내에선 마이너한 오키나와의 사람들, 성 소수자,  그리고 유흥업소에서 일했던 인물들을 다루는 만큼, 일본 사회 내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있는 듯하다. 다만 내가 일본인이거나  일본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이 아닌 만큼 이런 부분의 메시지를 읽는 것은 확실히 부족한 부분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얻을 수 있는 수확이 있었으니 바로 잘 모르겠다고 느껴질 때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단 사실이다.  이해하려는 생각만이라도 한다면, 그 노력을 조금이라도 기울인다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어쩌면 사람과 사회 간의  관계에서까지도 더 좋은 결과를 마련하는 데에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하니  사랑에서 뻗어나온 분노는 최대한 건강한 감정으로 산화할 수 있도록 경청이라는 노력을 주기적으로 기울여보자. 상대방이 분노하기도  전, 낙담하지 않도록 꾸준히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그리고 나면 그 관계가  우리를 키워 나갈 것이며 비뚤어진 길로 갈 수 없도록 우리를 바로 세울 것이다. 결국 사랑하는 이에게 돌아온 영화 속  인물들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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