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퍼포먼스 아티스트를 꼽으라 하면, 아마도 아나 멘디에타일 것이다. (굳이 ‘아마도’라는 표현을 넣은 것은, 좋아하는 아티스트들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 건 굉장히 어렵고도 섬세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 순위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며, 때에 따라 무작위로 바뀐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는 유튜브 등을 통해 몇 번 본 적이 있었으나, 너무도 짧은 클립으로 보았기 때문인지 약간의 신기함과 감동 정도로만 남았던 듯 하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동안 시각문화학을 공부하기 바로 직전, 호기심을 지니고 있던 내가 떠올랐다. 예술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 우리가 ‘주체적인 시각’이라 믿고 있던 그것이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는지에 대해 탐구하고 싶었던 내 열망 말이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전시는 언뜻 이해할 수 없는 듯하다. 퍼포먼스 예술은 대개 현장성이 중시되는만큼 전시가 쉽지 않은데, "증언과 기록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현장감을 더해줄 '리퍼포먼스(re-performance)' (김영인, 2019)" 작업까지 더하며 뉴욕의 MOMA에서 전시를 열었음에도 미국 내 방송은 ‘이젠 이런 것을 예술이라 한다’는 비아냥을 내보냈다. 하지만 그의 전시를 보기 위해 갤러리 앞에서 밤을 샌 사람들이 있었던 만큼, 비아냥만이 대중의 반응 전부는 아니었다. 마리나가 온 힘과 삶 전반을 던져 물은 질문을 누군가는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대관절 예술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의 한계에 도전할 수 있는지 – 스스로를 거대한 산으로 만들며, 가까이에 있는 이가 그를 하나의 조각상으로 대하게끔 예술가인 스스로를 이끌면서까지. 삶이 곧 예술이요, 자신마저 곧 예술품으로 승화한 마리나의 신체는 아주 젊은 시절부터 "폭력에 노출된 수동적 객체이자 동시에 폭력을 강요하는 능동적 주체로 존재(박미성, 2014)"했던 듯하다.
MOMA 전시 중 녹화된 비디오를 통해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리듬 연작이나, 몸에 상처를 냈던 '토마스의 입술(1974)' 작품 등을 볼 땐 예술가가 신체를 매개로 처절하게 전달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영인(2019)는 마리나의 퍼포먼스 아트에 대해 "몸과 의식, 무의식을 둘러싼 탐구의 종착점"이라고 표현한 바 있으며, 박미성(2014)은 특히 마리나가 자신의 신체를 폭력적으로 노출했던 젊은 시기의 작업에 대해 "현상학적인 몸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The Artist is Present (2010)
관계라는 소재를 탐구했던 마리나와 옛 파트너 울라이의 작품 역시 젊은 예술가들을 통해 몇 점 재현되었는데, 마리나가 직접 행한 행위예술인 The Artist is Present (2010) 에선 특별한 만남이 존재했다. 바로 연인 울라이가 22년만에 찾아온 것. 본디 마리나는 자신의 건너편에 앉은 이를 응시하기만 했어야 했으나, 기꺼이 손을 뻗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작품이 그의 초창기, 중반, 후반기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는 듯 느껴졌다. 매일 일곱 시간씩 갤러리에 찾아오는 이를 바라본다는 점에선 작품 초창기 특유의 '신체를 극한으로 내모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울라이가 찾아와 마리나가 세웠던 작품의 대원칙을 흔들어놓음으로써 '관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고, 90년대 이후 마리나의 작품에 찾아온 연극적인 모습까지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게 되었다.
다큐멘터리는 울라이와의 관계에서 마리나가 어떤 실험을 했는지, 혹은 어떠한 삶을 살아나갔었는지를 일정 부분 조명한다. 캠핑카가 없던 시절, 오로지 한 대의 미니밴에서 뜨개질을 통해 옷을 만드는 단순한 삶을 살며, 어떤 주유소에 샤워실이 있는지를 모두 알게되었다는 예술가 커플의 마지막은 만리장성을 양 끝에서 걸어오는 The Lovers (1988)로 마무리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의 삶이 거대한 도전이었음을 이해하고 나면 경외감이 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같은 삶을 사는 데엔 단순한 용기 이상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술을 통해 진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과 인간 존재에 대한 신념, 등이 지속적으로 삶을 이끌어왔던 듯하다.
다큐멘터리에서도 이따금 나오는 말이나, 마리나의 작품은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인간이 시간을 온몸으로 표현한다는 묘사가 정확히 들어맞는다. 다른 갤러리에선 한 작품을 보는 데 30초를 쓸까 말까 하지만, 마리나 앞에선 하루를 쓴다. 아니다, ‘쓴다’는 표현조차 적절치 못하다. 우리는 우리 삶의 하루를 온전히 바친다. 마리나에게 바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우리 자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잃고 대체 가능한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될 우리 자신에게. 마리나를 특별히 우상화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역시 약간의 휴가를 내어 마리나가 젊은 예술가들에게 요구했던 것과 같은 수련을 하며, 자신만의 카리스마틱한 공간을 자아내는 수련을 진행할 수도 있을 테니까. 우리에겐 모두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가능성이 있기에 마리나의 전시에도 공명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그런 게 아니었고, 마리나는 마리나 단독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단독자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시선의 마주침이란 그 마주침만으로도 이토록 무거운 일이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잊고 지냈는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잊고 지내던 우리의 모든 가능성을 다시금 끄집어 내는 과정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 하였다. 그 말은 생각이 멈췄을 때, 우리는 다시 동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마리나의 예술은 우리가 생각 없이 달려가던 삶을 잠시 중지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보여준다.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걸 가졌던 삶을 살아본 자이기에 가능한 것일까? 알 수 없다. 나에게도 그런 기회는 없었고, 지금 내겐 그럴 용기조차 없으니. 하지만 우리에겐 마리나가 있고, 그의 두 눈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나에게 다가온 것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없었다. (…)당신은 내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경험하지 않는다. 당신 스스로가 그 경험의 방아쇠이다. (…) 관객이 나의 작업이다. 나 자신을 지우면 관객은 나의 작품이 된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인용 출처 김영인(2019)
* 참고문헌
김영인 (2019). [ITALY] 예술가는 그곳에 없었다 -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The Cleaner. 미술세계, 77, 96-101
박미성 (2014).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의 경계의 신체. 현대미술사연구, 35, 3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