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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May 23. 2021

영화 <그을린 사랑(2010)> 리뷰

화염에 휩쓸리지 말아요, 함께한다는 건 언제나 멋진 일이거든요

영화  <그을린 사랑>의 오프닝 시퀀스는 카메라의 시선과 소년의 눈빛을 통해 그의 운명이 심상치 않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순간 내가 어쩐지 <패왕별희(1993)>가 떠올랐는데, 그래서 소년의 눈빛을 더욱 깊게 기억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감독 드니 블뇌브는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감독은 화면을 굉장히 담담하게 잡아냄으로써 영화의 어조를 신탁처럼  제시한다. 선택지가 많지 않은 사회에서 소년이 어떤 삶을 일궈나갈 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관객에게 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일 수  있었을텐데, 감독은 멜로드라마틱한 선택지를 거부한다. 그렇게 이 영화는 비통한 삶의 역경을 담아내고 있음에도 침묵에 가까운 형상을  띈다.



이  영화,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건조하게 한 사람의 인생을 따르고 있어 오히려 모든 걸 담아냈기에, 이야기 할 거리가  지독하리만큼 많다. 그러나 오로지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한 영화라고 말하자니 영화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것 같아 고민스럽기도 하다.  결국 상징을 해석하기 위해 나도 상징을 끌어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을린 사랑>은 원제(Incendies)가 말해주듯 '화염'이 지나간 자리에 솟아난 샘물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나왈  마르완(루브나 아자발)은 화염 한 가운데에서 삶을 일궜다. 그의 삶 근처에 있던 불씨는 단순한 '불'이 아닌지라 홀로 저항하기  어렵기만 하다. 사랑하는 연인은 '명예 살인'으로 가족의 손에 죽고, 그 자신은 가문의 수치가 되며,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맡겨진다. 간신히 얻은 두 번째 삶의 기회 앞에서 자신의 아이를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수소문하여 고아원을 찾지만, 전쟁이라는  거대하고도 탐욕스러운 화염은 아이가 맡겨졌던 고아원 건물을 소멸시키고야 말았다. 다시금 되짚어보자. 나왈은 친정에서 수치로  낙인찍혔고, 남편이 되어야 했던 이는 죽었으며, 아들의 생사가 요원해졌기에 그는 평화를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그러하니 나왈의  삶은 그야말로 살고자 하는 격렬한 투쟁 그 자체이며, 도망쳐도 괜찮았을 매 순간 도망치지 않았던 자의 용감한 기록이다. 



그의  삶이 위대한 이유는 스스로 눈 먼 자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리라. <그을린 사랑>은 오이디푸스 신화의 현대적 변용이라 할  수도 있을 텐데, 기존처럼 주인공을 '오이디푸스'라는 아들에서 생산능력을 갖춘 '이오카스테'인 나왈로 옮겨왔다는 점은 분명  주목할만하다. 이 영화에서 여성은 약속으로 세대를 이어가며 그것으로 시대와 사회에 저항한다. 나왈의 할머니는 나왈의 죽음을  지연시키고, 니하드 드 메의 발뒤꿈치에 잊을 수 없는 표식을 새기며, 나왈에게 세상을 벗어날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한 해방을  약속한다. 이는 여성과 여성 사이에서 이루어진 개인적이고 소극적인 저항이었으나, 이는 나왈에게서 더 큰 파장으로 성장한다. 나왈은  아들을 찾아내겠다는 약속을 하였고 감옥 내의 비명 앞에서 노래하는 죄수가 된다. 총구를 겨눈 상대에게 똑같이 총구를 겨누는  것으로 화염은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미래를 약속하며 한시적이더라도 평화를 찾아주는 것, 당장 손에 무기가 없더라도 노래를  통해 치열하게 저항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진 생명을 외면하지 않고 키워내는 것. 그것이 화염을 끝낼 유일한  방법이다.



할 수 없는 일을 문제삼는 쪽이 어리석지. 자네는 알아내야만 해.
안 그러면 영혼이 평온하지 못해.



진실은  침묵하기 마련이라는 이야기가 영화 내에서 종종 등장한다. 마치 오이디푸스 신화의 테이레시아스가 눈 먼 자인 것처럼, 그를 찾아  묻지 않는 한 진실은 저절로 밝혀지지 않는 것처럼. <그을린 사랑>에선 진실을 외면해도 좋을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잔느 마르완(멜리사 데소르모풀랭)과 시몽  마르완(막심 고데트)이 어머니의 유언을 받아들였던 그 순간에서도, 잔느가 어머니를 감시했던 감시관을 만났을 때에도, 그리고 또  다른 무수한 순간들에도. 그러나 쌍둥이 남매는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이는 장 르벨(레미 지라드)가 말했듯 어머니의 유언은  '신성한 것', 즉 남매에겐 운명의 끄트머리를 짐작할 수 있는 신들의 예언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나왈의  삶은 죽음으로 종결되었다. 그의 삶에 있었던 모든 사건들은 이미 지나간 화염이다. 잔느와 시몽이 찾아간 두 사람의 시작점에 남은  어머니의 잿더미는 이미 모습이 변한 지 오래다. 특히 이는 시몽이 샴세딘과 접촉하기 전의 배경에서 두드러진다. 그의 뒷 배경에선  아이들이 생명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밝게 떠든다. 남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이 정보의 우위에 있는 순간들이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되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문하게 된다. 이렇게 변화한 세상에서 인간은 고통스러운 진실을 꼭 마주해야만 할까? 그저 삶이 흘러가게 두어선 안 되는 걸까?





나왈은  침묵을 깨야 한다고 판단했다. 비록 세상을 등진 자신이라 하더라도, '약속'이 실현되어야만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했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나왈은 여전히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그가 모든 화염을 끝내진  못했더랬다. 하지만 나왈의 궤적을 쫓다 보면 분노를 끊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속속들이 밝혀진다. 총을 든 종교 앞에서 타인의  아이를 불 속에서 구해내는 건 어려웠지만, 노래하는 여인으로서 낳은 쌍둥이만큼은 물 앞에서 생을 보장받았다. 영화에서 시몽은  나왈이 어머니로선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이는 절반쯤만 사실일 거라 짐작할 수 있다. 고문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지만  나왈은 아이들을 무사히 키워냈다. 영화가 비추지 않은 나왈의 삶은 레바논을 벗어났다 하더라도 여전히 투쟁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15년간 갇혀있던 감옥을 벗어나 마주한 서방 세계는 그의 고향과 달랐을 것이며, 마음 붙일 곳은 고문을 통해 얻게 된 아이들밖에  없었을 테니까. 



시몽이  보기에 나왈은 '좋은 어머니'가 아니었을지 모르나 영화는 나왈이 훌륭한 어머니였음을 암시한다. 나왈의 쌍둥이, 잔느와 시몽은  화염 한가운데에서 살지 않는다. 둘은 물의 중심에서 산다. 분노를 복수로 되갚지 않을 수 있는 물 말이다. 수영장은 나왈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종결시키는 장소이자 잔느와 시몽이 화해하는 곳이기도 했다. 레바논의 현지인들은 잔느와 시몽을 남부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완전한 이방인이라 표현하는데, 이는 두 사람의 속성이 레바논에 여전히 남아있는 불과 전혀 다른 속성의 인간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물의 속성은 흐르는 것이다. 노자의 말마따나 최고의 선은 "흐르는" 물이지, "고여 있는"물이 아니다. 물이 올바르게 흐르고  고여 썩지 않기 위해선 자신의 길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이며 내 뒤에 존재하였던 화염이  남긴 잿빛 세상을 마땅히 애도해야 하는 이유다.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시력을 잃고도
쾨니히스베르크의 7개 다리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해답을 내놓은 대목이었죠.
그는 궁정에서 디드로에게 맞서 이렇게 선언했죠.
'선생…… eiπ+1=0입니다. 고로 신은 존재합니다.'



잔느가  어머니의 대학에 갔을 때 수학 교수와 나눈 대화가 왜 삽입되었는지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일러가 시력을 잃은 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학 공식'이라 불리는 오일러 항등식을 외친 순간을 연구했노라 말하는 노교수의 이야기를 잔느가 듣는  장면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온 몸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부재한 순간 잔느와 시몽은 눈이 먼 것과 다름 없는  상태로 진실에 근접해 나간다. 진실을 외면해도 좋은 순간을 넘으며 자신의 운명에 대항하며 퍼즐을 맞춘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서  쌍둥이와 쌍둥이의 아버지는 나왈의 편지(혹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침)를 만난다. 그곳에서 남은 자들이 마주하게 되는 게 '신의 존재'에 필적할만큼 중요한 메시지라면,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 영화는 왜 만들어 졌을까? 라는 물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단순히 개인의 일생이 얼마만큼 엉킬 수 있는 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결코 아닐 것이라고. 그렇다면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조차 아니다. 분노를 종결시키기 위해  복수를 사용하는 건 장기적으로 부적절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 이것은 아마 절반쯤 정답일 것이다. 고대에는 신들의 예언이었고  현대에는 개인과 사회의 이념이라고도 불리는 사회/문화적 현상들은 곧 개인에게 떨치기 어려운 운명이 된다. 이 앞에서 우리는  투쟁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인간 존재가 배태될 때부터 수반되는 비극적 속성이다. 영화는 이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먼 길을 여행해 돌아왔다. 바로 함께 있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해답일것이라고. 과거의 존재이든, 현재의 존재이든,  미래에 만날 존재이든, 당신을 상기하는 것. 당신에게만큼은 세상의 분노가 닿지 않기를 소망하고 행동하여, 더이상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 이 과정에서 아픈 진실을 끝없이 마주할지라도 이 진실을 마주하지 않으면 세상이 바뀌기 어렵다는 것까지  알아달라는 소망이, 이 한 편의 영화에 담겨있다. 



그러니, 나왈의 뒤에 남은 자들과 관객은 편지에서 가장 주요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함께한다는 건 멋진 일이며, 우리의 시작점엔 결국 위대한 사랑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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