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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Sep 15. 2021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 리뷰

※ 스포일러 주의


하늘길이 막혀 국가 간 여행이 막혔다. 주변 환경을 완벽하게 바꾸어 일상을 잊는 건 어렵다. 그렇다면 화려한 액션으로 가득 찬 영화를 봐야 하는 게 아닐까.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 하에서, 올해 개봉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25번째 장편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는 나쁘지 않은 오락 영화였다. 좋았으면 좋다고 하면 될 텐데 수식어가 괜히 길어진 까닭은, 이 영화에 대해 만듦새가 훌륭하다고 평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서사의 개연성이든, 연출면에서든. 하지만 흥미롭게 느껴지는 부분 역시 적지 않고, 이번 리뷰에선 내가 주목한 점에 대해 간단히 적어볼 생각이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포토


웬우: 망가진 영웅


아마 신화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웅 서사 구조의 원형을 분석한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이란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캠벨의 서사구조를 전형적으로 따랐다고 보긴 어려운데(보글러 모델을 따랐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을 꺼내온 것은 '빌런'으로 소개된 웬우(양조위)의 일대기가 캠벨의 서사 구조와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기원을 알 수 없는 데다가, 웬우는 텐 링즈라는 초자연적 아이템을 획득하여 영생을 누리는 자로, 평범한 인간이라기보단 신격화된 인물에 가깝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위대한 정복자로 자신만의 세계를 꾸린 후 잉리(진법랍)라는 신비스러운 여인과 결혼에 성공한다. 이 과정은 지극히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한 장면이다. 과업의 달성과 신비스러운 여인과의 혼인 말이다. 물론 이런 의문이 생길 순 있다. 그가 이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인가?



그러나 이러한 의문을 깊게 파고들기 어려운 까닭은, 스크린 묘사된 웬우라는 인물의 천 년 지배는 너무도 짧은 대사로만 지나갔기에 그의 모든 결정이 악하기만 했는지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밖에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정복자가 곧 영웅으로 떠받들여졌다는 것을, 정복의 과정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한들 치세가 안정적이었다면 역사서는 그를 위대한 전사로 서술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기에 파편화된 단서만으로 이 웬우라는 인물을 뼛속까지 사악한 악인으로 점찍는 것은 점차 어려워진다. 더군다나 결과론적으로 세상을 망가뜨리려 한 행동의 본질적 요소는 아내의 부활이자 가정의 회복이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주인공인 샹치(시무 리우)가 결국 아버지의 공과 과를 모두 물려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웬우를 완전한 악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했겠지만.



그럼에도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웬우를 주인공인 샹치가 넘어서야만 하는 시련으로 규정한다. 이는 그저 웬우가 완전한 빌런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다만, 구시대에서 필요로 했던 타입의 영웅이었지 현대의 우리에게 어울리는 영웅이 아니기 때문이다. 웬우의 추락은 어찌 보면 운명적인 측면이 있다. 그는 천 년간 다양한 이름을 사용하며 분열된 정체성으로 시대를 부유하였음에도 늘 자신의 본명만큼은 잊지 않았고, 늘 자기 자신으로 회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잉리가 나타난다. 그는 웬우를 웬우로 호명하며, 흩어진 그의 다면적인 모습을 본연의 자아로 고정시켰다. 홀로 자신을 잊지 않는 것과, 타인이 자신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주며 세상에 고정시키는 것은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웬우라는 이름이 천 년의 고독 속에선 결코 획득할 수 없었던 정체성은 그러나 몇 년의 시간 후 사라진다. 결과는? 자아의 망각이다. 그는 잉리가 존재하기 전 자신이 규정했던 웬우로도, 잉리가 존재했던 시절의 웬우로도 완벽히 돌아갈 수 없다.



영웅과 비영웅의 차이는 삶을 통해 목도하는 운명적인 순간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웬우는 자신의 세계가 일그러졌을 때, 즉 잉리를 잃고 평화를 상실한 시련의 순간에  단독자로서 복수를 하겠다는 구시대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택했다. 새롭게 부여받은 아버지라는 정체성을 키워내지 못한 것, 그것이 그가 추락한 주요 원인이다. 영웅이 된다는 건 자신의 손에 누구도 넘보기 힘든 힘과 권위가 달려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마땅한 도덕의식을 흔들리지 않고 지닐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런 힘이 없더라도 가슴이 메일만큼 처참한 순간, 주변을 돌보며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지와 같은 요소조차 영웅의 조건일 수 있음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거대한 신분과 거대한 힘이 지배하는 세계는 벌써 백 년도 전에 무너졌다. 소박하지만 지겹고 질곡 많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음이자, 영웅이 답해야 하는 질문은 어쩌면 이런 것들일 것이다. '살아가야만 하는 그 순간을 어떻게 살아 나갈 것인가.'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포토


탈로: 완전하지 않은 별세계


웬우는 천 년을 산 인물이기에, 그는 그 자신이 스스로의 조상이자 고향인 하나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잉리의 고향 탈로는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개인,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각각의 타인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공동체가 거주하는 특별한 장소이다. 하지만 웬우가 숲과 동굴을 통해 탈로에 수평적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는 점을 미루어 알 수 있듯, 웬우와 탈로는 둘 사이에 위계가 존재하는 수직적인 세계가 아닌 평등한 세계관이다. 정복자라는 속성을 띈 웬우와 평화로운 별세계처럼 보이는 탈로는 색상을 비롯한 여러 테마에 있어서 지독히도 달라 보이나, 사실 비슷한 점 역시 무수히 많다. 탈로는 어둠의 드웰러를 봉인한 장소이자, 웬우라는 외부자를 철저히 배격하는(그의 변화 가능성을 믿지 않는) 폐쇄적이고 정체된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진실로 평화롭기만 한 무릉도원이었다면 탈로에선 남녀가 평등하게 무술 훈련을 받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며, 잉리가 성인이 된 자신의 자녀를 위해 갑주를 예비할 이유도 없었으리라. 언뜻 선인의 세계처럼 보일지언정, 탈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을 품고 있는 아슬아슬한 세계다.



나는 위에서 웬우를 악인이라기보단 ‘비영웅’정도로 묘사했는데, 영화 내에서 파멸적인 악惡을 꼽아야 한다면 어둠의  드웰러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크리처 무리는 다른 생명의 영혼을 흡수하며 텐 링즈를 통해 아이템의 소유주를 홀릴 만큼의 지능과 마력을 지녔다. 언어 능력조차 없어 소통이 불가한 그들은 순수한 공포 그 자체이다. 흥미로운 건, 영화 내에서 가장 신화적인 장소에서 노골적으로 힘을 원하고, 사악한 크리처가 등장하였음에도 영화 내 인물들은 어둠의 드웰러를 맞서 싸워야 하는 상대로는 인식할지라도 증오나 원망 따위의 감정을 비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샹치와 샤링(장멍일), 케이티(아콰피나)는 외부인이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탈로 주민들 역시 그들의 시간과 장소를 모두 묶은 역사가 존재함에도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일종의 ‘현상유지’다. 탈로가 간신히 모면한 평화 위에 세워진 세계일지언정 불안한 진동을 감내한다.



이때 도달하는 것이 바로 웬우라는 외부인, 혹은 외부 세계다. 그는 자신의 절반을 찾기 위해 봉인된 문을 깨부숴야 하는 인물이다. 설령 그것이 날 눈멀게 한 거짓이라 하여도.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탈로와 웬우의 충돌은 탈로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영화가 탈로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역시나 그들이 무작정 옳거나 신령한 용과 함께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탈로가 공동의 시간과 지혜로 다듬어진 협력의 가치를 인정하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탈로는 어둠의 드웰러들과 전쟁을 함으로써 조상 대대로 이어온 '봉인된 문의 수호'라는 목적성을 상실하였고, 이는 세계의 정체성이 크게 흔들릴 위기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탈로라는 세계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웬우처럼 단독자가 아니며, 거주민 개개인은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샹치가 잉난(양자경)을 통해 쥐고 있던 손을 피게 되었듯, 탈로 세계의 인물들은 샹치 세계의 인물을 통해 문을 봉인과 위협에 시달릴 이유가 없어졌다. 그렇다, 끔찍한 사건이라 해도 오로지 나쁜 결과만 몰고 오진 않는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포토


실패한 아버지조차 계승하는 영웅


유럽의 신화나 미국의 히어로 영화를 보다 보면 친부 살해 모티프나 주인공의 가족 관계가 단절된 설정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미국에서 제작된 히어로 영화임에도 빌런으로 묘사된 아버지 웬우와 차기 세대의 영웅인 샹치가 화해할 뻔한 장면이 있다. 샹치는 (영화 내에서 그가 다짐하기도 했지만) 기존의 다른 영웅들처럼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의 힘만을 취한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외친다.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지 않으며, 영화 말미엔 직접적으로 그를 추모하기까지 한다(그러나 완전한 용서인지는 알기 어렵다). 나에겐 영화의 이 지점이 가장 눈에 띄었던 것 같다. 21세기에 영웅이 될 수 없었던 아버지를 계승하는 젊은 영웅의 미래는 기대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마 이 영화는 트릴로지의 첫 번째인 만큼, 샹치가 어떻게 텐 링즈를 물려받게 되었는지를 풀어나가는 일종의 프롤로그 부분에 해당할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즉, 샹치를 흔들어 놓을 진정한 모험이 시작된 순간은 아닐 것이라고.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모험을 통해 샹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케이티와 펍에서 술을 마시고, 웡과 노래방에 간다. 더 이상 호텔 직원은 아닐 수 있겠으나, 그저 그뿐이다. 특히 그가 지녔던 증오나 두려움은 일부 해소된 듯 보이나, 타의에 의해 제거된 것으로 완전한 극복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더더욱. 물론 샹치는 아버지의 텐 링즈를 물려받았고 어머니의 고향에서 용의 힘을 배웠다. 그러나 영웅이라는 정체성은 단순히 ‘힘’을 획득하여 악하게 쓰지 않거나,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대항하는 순간에 얻어지는 이름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발적인 책임 혹은 신념을 자각하는 각성의 순간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 펼쳐질 샹치 트릴로지에서 주인공은 션이 아닌 샹치라는 본래의 이름으로 회귀한 만큼 자신이 정녕 누구인지를 의식적으로 깨닫는 모습이 필요할 텐데, 이러한 서사를 기존 서구 영화 속 히어로와는 다른 결로 풀어나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는 열다섯에 달려 나오며 숨기고 잊었던 자신의 과거를 앞으로 결코 숨길 수 없을 것이며, 숨겨서도 안될 것이다. 한 인물의 공과를 우리는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 샹치는 잉리는 물론, 웬우까지 포함하여  다채로운 모습을 모두 포용하되 더 나은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해나가야 한다. 다면적인 선과 악 사이에서,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분법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을 넓은 스펙트럼의 세상에서.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포토


어쩌면 이 영화에 대해 지금 왈가왈부하는 건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아직 트릴로지가 종료된 시점은 아니니까. 그리고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로 시작한 영화의 트릴로지가 혼자 올곧게 서고자 하여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넓은 세계에서 샹치는 여러 캐릭터들과 뒤엉키게 될 운명인지라, 이 캐릭터의 일관성이 과연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인간적이었으나 정의로운 이는 아니었던 아버지의 공과를 물려받은 이가, 어떻게 자신을 영웅으로 정의하고 성장할 지에 대해선 정말이지 기대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2021 여름이 저물었다는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양 무더위가 계속되는 요즈음이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시선을 바꾸어본다. 올 가을엔 여름의 발자국이 그 어느 때보다 짙게 남아있으리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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