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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Jun 30. 2022

영화 <세인트 주디(2018)> 리뷰

우리는 이미 시작된 미래 안에 있어요. (존 버거)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값싼 허위의식이 아닐까. 세상이 더 나아져야 한다는 당위명제에 공감하지만 열의에 가득찬 행동 하나 없이 내 생각과 유사한 영화 하나를 감상한 후 이러한 부류의 사회고발 미디어가 보다 많아져야 한다고 막연하게 소망하는 것은. 어쩌면 <세인트 주디>를 감상하고 주변인에게 권하는 것은 무책임한 선의 혹은 오만에 불과할 지 모르며 시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오는 죄책감을 감소시키는 가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100%는 아닐지라도 어느 부분은 분명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내게 묻는다. 미동조차 없었으니 위선이라 칭할수조차 없는 나의 시시한 생각과 문장은 대체 무얼까. 이 기록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영화를 감상한 후 내 나름의 후기를 적을 때마다 거창한 뜻을 품었던 적은 없으며, 이 작은 리뷰가 내게 어떤 의미겠느냐고 매번 자문했느냐면 정말이지 그랬던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거듭 묻게 된다. 숀 해니시 감독의 영화 <세인트 주디>를, 영화가 최초로 개봉한 2018년이 아니라 미국이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박탈한 이후의 2022년에 감상하는 것은 나에게 독특한 경험으로 재포장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이 영화는 여성의 재생산권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아니지만, 주디 우드(미셸 모나한)이 말한 "전 세계 여자 중 3분의 2는 자기 생각을 가졌단 이유만으로 탄압받는다"는 대사가 기실 여성을 둘러싼 거의 모든 정치적 상황에 있어, 근본적으로 유사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이미지 출처: MUBI



영화 밖의 이야기는 멈추고, <세인트 주디>로 돌아오자. 이 영화는 캘리포니아에서 이민법을 전문적으로 다루게 된 주디 우드가 미국에 망명하고자 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아세파 아슈와리(림 루바니)를 변호하는 과정과 그 법정 공방의 결과를 그린다. 아세파는 자신의 고향에서 소녀들을 교육하였고, 이는 탈레반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아세파는 투옥당하고, 끔찍하게 고문받는다. 믿었던 가족에게 고발당했다는 것을 알게된 그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기까지 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민법은 본질적으로 국가가 외지인에게 시민권을 나누어주는 것에 대한 법인만큼 너무도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얽혀있어 단순히 이상과 정의에 호소하는 것만으론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판사 벤튼(알프리 우다드)이 아세파를 한 명의 개인대 개인으로서 기꺼이 존경한다 말하겠노라 하였음에도 미국의 판사로서 망명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한 장면은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이데아와 현실 정책의 좁혀지지 않는 괴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렇다, 우리는 세상을 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배우며 평등해야 한다고 배운다. 하지만 게랄트 휘터의 말마따나 누군가에게는 "국적을 가진 사람만이 존엄(『존엄하게 산다는 것』 中)"하다. 미국의 시작이 이민자들의 나라였고, 아메리칸 드림을 일종의 캐치프레이즈처럼 내세웠다 한들 그것은 과거일 뿐이다. 21세기 미국은 정부측 변호사인 벤자민(커먼)은 이민귀화국이 이민세관단속국으로 개칭되었음을 주지시킨다. 미국의 시민권을 갈망하는 이들은 세관물품과 동일한 취급을 받게 된 셈이다. 인간이 더이상 인간의 존엄을 요구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은 -그것이 아무리 부당하다 한들- 주체가 국가일 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에둘러 표현될 수도 있다. 이민, 망명을 신청한 모든 이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 수 없으니 무한한 관용을 베풀어 기존 사회 구성원을 안전하게 보호하지 못한다면 국가의 존속 의미를 주창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러나 나는 "이민정책이 그 나라의 헌법적 가치를 존중하지 않거나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지향과 실제로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그 결과는 사회적으로 ‘소수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 김병록 교수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법에서 최소한의 정의조차 찾을 수 없다면, 그 법은 진정 유의미한 것인가? 이상을 조금도 좇지 않는 사회가 과연 건강할 수 있겠는가?



이미지 출처: Sight Magazine


사실, <세인트 주디(2018)>를 보고 나면 이 영화가 예술적 의미에서, 영화사적으로 대단한 족적을 남기리라고 생각하게 되지는 않는다. 또한  굉장히 강력한 메시지를 지닌 영화이므로 프랑수아 트뤼포가 그리 반기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내게 경종을 울린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알지 못했던 세계의 일면을 보여주고, 나를 돌아보게 만드므로.



영화를 본 후의 감상을 쌓아 올리는 것이 유의미한 일인지 아닌지 이 시점의 나는 잘 모르겠다. 또한 이 영화 앞에서 고작 이 정도 고민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 (영화 <세인트 주디>를 모두 감상한 후 와드 알 카팁 감독의 <사마에게(2019)>를 감상하여 더더욱 그러하다.) 다만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다. 외압에도 굴하지 않는 인간의 끈질긴 선의는 결국 희망을 현실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무의미해보이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본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연락하는 것, 그 어떤 누구도 결국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부터. 관용과 신의로 연대는 더 돈독해진다. 너의 일에 발벗고 나설 수 있는 나의 존재, 나의 일에 소매를 걷어부치겠다는 너의 존재가 많아질수록 개인의 삶과 사회는 풍성해진다. 타인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너와 나의 권리가 동등하게 소중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올 수 있기를.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라 해도, 인생 길은 타인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믿는다. 작은 다정과 환영이 궁극적인 화합을 위한 첫 걸음일 것이라고.



그래, 한 명을 위한 일/투쟁은 결국 모두를 위한 일/투쟁이기에.




★★★★




참고문헌

김병록 "이민정책의 법제와 헌법적 과제" 미국헌법연구 31.2 pp.1-4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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