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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Jun 14. 2024

너희의 절망이 나는 좋아

  나는 초등학교에서 5학년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다른 과목과 달리 말하고 듣는 게 중요한 영어 수업에는 높은 확률로 게임 활동이 포함된다. 그렇다보니 평소 수업시간에는 피곤한 직장인마냥 시큰둥한 표정이던 아이들도, 게임을 하면 저도 모르게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곤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가르치는 선생님 입장에서도 지루한 얼굴을 보는 것보단 희로애락을 느끼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게 더 재밌다. 특히 깊은 '애'를 느끼며 절망하는 아이들을 보는 건 아주 재미가 쏠쏠하다. 이거 완전 싸이코패스 선생 아니냐고? 일단 들어보시라.


 오늘 했던 활동은 '레벨업 게임'으로, 인생의 희로애락을 아주 진하게 느낄 수 있는 훌륭한 게임이다. 먼저 학생들은 교실을 돌아다니며 구와 만나 둘씩 짝을 이룬다. 짝이 된 이들은 배운 영어표현을 활용해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리고는 냅다 가위바위보를 해야 한다. 여기서 이기면 다음 레벨로 올라가, 지면 이전 레벨로 떨어진다. 순전히 운으로 승가 결정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친구들과 만나 3단계까지 레벨업을 고, 3단계에서도 한번 더  가위바위보를 이기면 드디어 마지막 최종 보스와의 승부만이 남는다. 바로 선생님과의 대결, 운명의 가위바위보.


 선생님과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면 로또 티켓(*보상 시스템으로, 모아두었다가 단원이 끝날 때마다 추첨함. 뽑히면 소정의 간식을 받을 수 있음. 학생들이 환장함.)을 한 장 얻을 수 있다. 학생들은 여기까지의 설명을 듣고는 "와!"하며 환호한다. 하지만 보스에게 지게 되 이럴수가, 다시 1단계로 돌아간다. 역시 최종 보스는 좀 다르달까. 선생님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아이들은 행운과 불운이 뒤섞인 숲에서 연달아 행운만을 거머쥐어야 하는 험난한 정을 다시 거쳐야 한다. 가위바위보를 활용한 게임은 많지만 쌓아온 것이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져내리는 게임은 흔치 않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는 "아악!" 소리를 내며 기대와 두려움이 섞인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건 맛보기에 불과하다. 하. 인생의 쓴 맛을 볼 준비가 되었느냐들.


 본 게임이 시작되면 여기저기서 환호소리와 비명소리가 난무한다. 게임의 탈을 쓴 복습 활동이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을 알 리 없고 단지 이 작은 승부에 목숨을 걸기 바쁘다. "Rock, scissors, paper!(가위 바위 보!) 으아아아아악!" 가위바위보 한 번 졌을 뿐인데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난다. 비단 비명소리만 있으랴. 아쉬움과 실망감이 뒤섞인 표정은 둘째치고 그 처절한 몸짓을 지켜보자면 눈물이 아니날 수 없을 정도다. 아이들은 뭉크의 절규 저리가라 싶은 포즈로 좌절한다. 주로 양손으로 얼굴이나 머리를 감싸쥐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자세로, 손가락이 유연한 학생들은 머리를 쥐어뜯기도 한다. 연속된 패배로 인해 절망이 한층 더 깊은 경우에는 다리에 서서히 힘이 풀려 교실 바닥에 무릎을 꿇거나 털썩 주저앉기도 한다. 나는 단순히 가위바위보만 시켰을 뿐인데 비극을 주제로 한 대형 그림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보스와의 대결에서는 희비가 더욱 두드러진다.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티켓을 손에 넣 학생들은 무릎이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은 높이로 펄쩍 뛰며 환호성을 지른다. "꺄아아악!" 반면 보스에게 패배한 학생들은 저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무너지며 극강의 절망을 보인 후 다시 1단계 용사가 되어 터덜터덜 여정을 떠난다.


 이렇게 봐서는 수업시간은 커녕 살아있는 지옥이 따로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아이들이 이 모두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절규를 하고 교실 바닥에 드러누워도 입꼬리만은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알고보면 소리지르고 주저앉고 오버하며 더 즐거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복습인지 뭔지 모르겠고, 친구들이랑 게임하는 게 마냥 재밌것이다. 다른 고민걱정 없이 오로지 가위바위보와 승리만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기뻐하고 슬퍼한다. 밀린 숙제나 커서 뭐가 될지 따위의 생각 없이 그저 보스를 물리치고 티켓을 쟁취하는 역할에몰입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이 절망이 즐겁다. 절규 뒤에 숨어 반짝이는 순수함을 아낀다. 무언가에 진심으로 임할 때 나오는 그 표정을 사랑한다.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아악!" 소리와 함께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쥘 때의 비극적인 표정이나 바닥으로 주저앉는 모습들은 카메라로 찍어 슬로우 모션 영상으로 만들어두고 싶은 심정이다.  글로는 끔찍해보일지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정말 웃기고 귀여우니 말이다. 오늘 수업 들은 아이들아. 너희는 좀 힘들었을런지 모르겠다만, 선생님은 너희를 보느라 무척 즐거웠단다. 우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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