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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이 Oct 30. 2022

에필로그


2011     


   그녀가 떠난 지 500일이 지났지만 가끔씩 그녀가 내 곁에 있다고 착각을 한다. 계절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또 다시 해가 지나가고 2011년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이곳 솔밭 해변에 온다. 긴 의자 끝자리를 아주 조금 차지하고 앉아 있으면 예전처럼 어느 샌가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와 어깨에 기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기도 하지만 여기를 그녀가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가 꼭 여기에 와 있을 것 만 같은 생각이 들고 그러면 그녀도 내가 온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녀가 못 견딜 만큼 그립고 보고 싶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녀를 기다리는 일 뿐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 매일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가 나를 잊어버리고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린다. 그래서 많이 슬프게 지내지는 않는다. 하루씩 시간이 그녀 곁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다. 봄 하늘빛을 닮은 근무복 셔츠가 무척 잘 어울리던 그녀는 단 한 번 만에 내 마음속에 들어와서 더 이상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제 자리를 하루하루 넓혀갔다. 그러나 아무리 대화를 시도해 보려고 해도 그녀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으며 내 말은 듣는 척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녀다웠다. 할머니는 돌아가신 엄마가 이모라고 불렀던 분으로 엄마를 일찍 여의 어머니를 마치 친 딸처럼 돌봐주신 분이셨고 나는 다 클 때까지 할머니가 친 외할머니라고 생각하고 자랐을 정도로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는 분이셨다. 할머니께서는 얼마 전 파출소에 아가씨 순경이 발령을 받아 왔는데 집에 올 때 마다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어서 미안할 정도라며 요즘에 볼 수 없는 귀한 처자라고, 내 색시가 된다면 정말로 좋을 것이라고 농담까지 하셨다. 그렇게 그녀는 점점 더 내 마음속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경찰서로 발령을 받아 오던 날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한 번 더 그녀 눈에 띄려고 노력했지만 언제나 무엇인가에 골몰하고 다른 사람들엔 별 생각이 없던 그녀의 관심을 사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만큼 그녀도 나를 좋아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팀장님께 속마음을 털어 놓고 야식을 핑계로 야근을 하고 있었던 그녀를 찾아갔던 밤 그녀에게 여자로서의 신경을 상하게 해서라도 나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기 때문에 내 이상형이 아니라고 속에도 없는 말을 그녀가 알아듣도록 일부러 크게 말을 해 버렸던 것이다. 계속 사소한 심부름을 시켜서 수사과 사무실로 그녀를 불렀고 감식반장님의 특유의 유머로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게 하도록 노력해 보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근무시간 동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너무나 공손하고 반듯해서 내가 들어갈 틈을 찾아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를 아버지 책방에서 보았던 날, 내 마음속에서는 커다란 종소리가 울렸고 확신이 생겼다. 그녀가 나의 미래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나는 반 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그녀에게 바보 같은 말을 해 버렸는데 오히려 그 사건이 그녀의 신경을 더 자극할 수 있던 계기로 다가왔다. 그녀가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가슴에 책 한권을 떠 안겨주며 나를 비난하던 말소리는 그날 밤 끝없는 메아리처럼 들려와 잠을 한 숨도 못자도록 만들었지만 이제부터는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하게 될 것이란 생각에 오히려 내 마음은 그토록 설레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창백한 낯빛에 옷차림도 수수하고 화장 끼가 없는 얼굴로 여고생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빈혈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눈앞에서 쓰러지는 그녀를 등에 업고 병원으로 달리던 날, 남자로서의 보호본능이 점점 더 커지면서 그녀를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 커져갔고  내가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만큼 그녀가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녀가 나에게로 달려왔던 그날 밤, 나도 더 이상은 내 마음과 반대로 흘러가는 신경전을 그만 두고 그녀한테로 갈 작정이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먼저 달려와 나를 먼저 안았다. 내가 가까이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그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더 이상의 슬픔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손수건으로 코피를 닦아주던 날 밤, 난 생 처음으로 이러다가 가슴이 터져서 죽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찬 심장박동이 늑골을 때리는 통증에 따가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그날 밤 느껴보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냉정하면서도 따뜻하고 순수한 사람이었지만 사랑 앞에서는 온 몸을 다해 열정을 바칠 줄 아는 뜨거운 여자였다. 

     

   그녀가 소견서를 보여주던 순간부터 나는 마치 나쁜 꿈을 꾸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살았다. 거짓말 같았던 5개월은 초조하게 지나갔지만 막상 응급실에서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8일 만에 완전히 모든 것이 끝이 났다. 하지만 내게는 꼭 그녀를 다시 만나야 할 이유가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었기에 그녀에게 안녕이라고 작별인사를 하기는 싫었다.      


   많은 날들을 그리움으로 슬퍼할지 알고 있지만 그녀가 내 속에 살아있으니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루씩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녀는 점점 내 안에서 커져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 함께 있는 것이며 못 보는 것이 그다지 슬픈 일도 아니다. 훗날, 그녀가 완전히 나를 잊어버리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나를 대하게 되더라도 처음처럼 다시 시작하면 되므로 그런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아직은 그녀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그 곳 어딘가 가장 따뜻한 햇살아래서 그녀가 좋아하면서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던 책장을 간지럽게 넘기면서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죽음 또한 삶의 일부이니 너무 슬퍼하지만은 말라던 그녀가 베개를 품에 안겨 주며 이것이 다 헤질 때까지만 내 생각을 해달라고 말하던 그 때에도 여전히 내 마음속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 베개를 품에 안고 있으면 꼭 그녀가 내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으므로.  

    

   이제 나는 한 때 그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고 그녀와의 삶을 잠시라도 공유했던 사람이 나였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하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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