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이야기
2003년
뜻밖의 시작
엄마는 매달 받는 신장 정기검진 결과를 확인하러 온 날 어떤 조건 어도 없이 주치의로부터의 지금 당장 무조건 입원을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은 지 세 시간 만에 8인실의 병실에서 격리 병동으로 이동조치 되었다. 이유는 입원 절차 때 뽑았던 혈액 수치의 결과가 병원 측으로부터 그럴만한 조치가 마땅하다는 판단에서 내려진 결정이었고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엄마는 격리 병동으로 침상을 옮기셔야 했다. 신장 내과의에서 혈액 내과의로 순간에 바뀌어버린 담당 의사의 의학용어가 섞인 설명을 듣고 입원동의서의 보호자 확인란에 내 이름 석 자를 적어 넣었다.
입원을 한 날은 불행히도 금요일 오후여서 정확한 결과는 월요일에나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알고 지내 온 지식과 그리고 단 몇 시간 동안의 검색으로 지금 엄마를 입원하게 만든 원인이 소설 속에서나 보았던 백혈병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속에 48시간 동안을 안절부절못하면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조차도 잊어버릴 정도로 보내버렸던 것 같다. 결국, 의사의 진단결과를 들어야 하는 시간이 잡혔고 그 사실을 알아야 할 마땅한 사람들, 아버지, 오빠, 형부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은 다 같이 함께 지나가기에는 약간 비좁아 보이는 혈액 내과라고 알리는 표시가 된 복도를 지나서 낯선 문 앞에 서 있었다. 지금 우리가 만나 보아야 할 의사의 특기임을 알려주고 언제나 따라다니는 수식어 정도로 보이는 ‘혈액종양내과 000 교수’라는 팻말을 뚜렷하게 확인하고서야 문이 반쯤 열려 있는 성인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기에는 벅찬 진료실로 들어갔다. 혈액종양내과, 혈액종양내과……. 이 단어는 내 머릿속에 각인처럼 박혀버렸고 의사의 설명을 듣기도 전에 이미 내 몸 전체는 땅속으로 꺼져버린 느낌마저 들었다.
나란히 앉은 우리와 마주 앉은 혈액종양내과 전문의, 그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무척 미안해하는 표정의 신장내과 엄마의 주치의도 함께 와 있었다.
“보세요. 초록색으로 써진 글씨는 정상수치를 말하는 것이고 붉은색으로 나타나는 글씨는 현재 환자의 상태를 말해주는 비교치입니다. 전부 다 빨간색이에요. 정상적인 수치가 단 한 개도 없습니다. 환자분은 백혈병입니다.”
백혈병입니다. 백혈병입니다. 백혈병입니다……. 내 머릿속에서는 단 이 세 단어만이 들릴 뿐 더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명백히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판사로부터 ‘피고인 살인죄’라고 선고받은 것처럼 판사의 나무망치로 땅! 땅! 땅! 머리를 세게 얻어맞고 있는 것과 같았다. 의사는 의학적 지식과 객관적으로 드러난 결과에 따라 엄마에게 사형과도 맞먹는 ‘시한부 3개월’을 선고하고 그 뒤에 있게 될 모든 책임을 어떤 식으로 질 것인지를 우리에게 물어보고 있었고 어쨌든 포기할 것이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쉽게 이야기를 해 보자면 그런 식이었다. 나는 꼭 지금 부산을 내려가야 하는 데 걸어갈 것인지, 버스를 타고 갈 것인지, 비행기를 타고 갈 것인지를 생각해 볼 시간을 그날 오후까지 준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살인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그 죗값을 치러야만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것이고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의 몸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아버지는 엄마가 누워있던 이동 침대가 환자 수송용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양쪽으로 서서히 닫혀버리는 문과 동시에 함께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리셨다. 나는 사실 그 순간에도 내가 꿈속에서 있는 것인지 슬픈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정신상태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 닫혀버리는 승강기의 문 앞에 주저앉아 버린 아버지를 일으킬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럴만한 것이었다.
오빠는 구급차 운전기사의 조수석에 앉았고, 나와 아버지는 엄마가 누워있는 환자 수송 칸을 함께 타고 목적지로 정해진 곳까지 이동했다. 그 와중에도 의료진은 엄마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했고 팔뚝에 꽂혀 있는 바늘을 고정한 흰 반창코와 주렁주렁 엉켜있는 수액 줄은 단 며칠 사이 만에 엄마를 그야말로 중증환자로 만들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에 이번 달 신장내과 정기검진을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신장내과의 처방대로 트윈스타 한 알을 먹음으로써 몸의 모든 기능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혈액검사의 모든 결과가 기계 장치에 불과한 모니터 화면에 단지 붉은색의 비정상 수치로 나타나게 되면서부터 엄마 몸의 권위자는 혈액종양내과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엄마는 중증환자가 되었다는 이런 아이러니한 생각들이 드는 것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면서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야만 한다는 사실만이 나를 어두운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을 뿐이었다.
도착
점심시간 이전에 출발한 우리는 해가 한창 달궈진 오후 두 시경이 되어서야 목적지로 정한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구급차의 환자 수송 칸 출입문이 올라가자 마음껏 열을 받은 태양은 눈도 뜨지 못하도록 우리를 맞이해 주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이상하게도 어렴풋이나마 지난 며칠 동안의 암울했던 공포의 시간 속에서 앞으로 우리가 지나가야 할 미래에 비춰주는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구나 생각을 하였지만, 응급실 자동문 출입구 근처에서 우리를 데려다주었던 구급차가 이제 자신의 역할은 거기까지라는 듯이 오는 내내 밝혀온 경광등을 꺼버리고 우리가 함께 들어왔던 병원출입문을 성급히 뒤돌아 나가는 뒷모습 속에서 이제는 무엇에게 의지를 해야 할 것인지를 낯선 장소에서나 맛볼 수 있는 무지함에서 오는 또 다른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엄마가 누워있는 이동식 철제 침대의 난간에는 붙어있던 ‘격리환자’의 붉은색 푯말은 앞으로 이 병원에서 환자로서의 엄마의 직위를 알려주고 온갖 질병의 온상인 무질서한 응급실에서조차도 엄연한 나만의 구역이 있다는 것을 마치 과시라도 하는 듯 하얀색 커튼으로 임시 칸막이가 되어 있는 구석진 자리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엄마가 이 병원으로 옮겨와서 가장 먼저 부여받은 등급, 그건 마치 귀족사회에서의 상위 계급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우리가 겨우 자리를 차지하고 있자마자 숙련된 솜씨의 간호사가 엄마에게로 다가와 몇 가지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고서 허리춤에 꽂혀 있던 주사기를 꺼내 들고 그녀만의 직업에서 오는 습관처럼 보이는 행동 - 엄지와 중지를 이용하여 바늘 끝을 한번 튕기더니 피스톤을 끝까지 잡아당겨 검붉은 피를 한가득 뽑아내 갔다. 거기에 있는 우리는 모두 전에 있던 병원에서 나온 아침 급식을 시늉으로만 먹는 척을 하셨던 엄마를 제외하고는 온종일 무엇도 입에 댄 적이 없었지만, 엄마가 어서들 밥을 먹고 오라는 엄마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눈을 돌리고 침대 시트식의 커튼 너머로 보이는 맞은편 침대에 누워있는 할아버지 한 분을 발견했다. 자녀쯤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옷에 누런 똥을 싼 할아버지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닦아 내고 있었지만, 그 주위를 왔다 갔다는 하는 의사들과 간호사들, 그 밖의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아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와 관련된 사람들일 것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누구도 나처럼 그 광경을 보고 신기해하거나 놀라워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건 마치 갓난아기의 기저귀를 봐주는 아기 엄마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었으며 누구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것과 같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오직 나의 시선과 후각과 청각만이 유난스럽게 호들갑을 떨 뿐이었다. 나도 점점 저런 상황에 익숙해져서 여기에 있는 사람들처럼 변해갈 수 있을까. 하물며 나에게는 응급실은 처음이었으므로 모든 상황이 낯설고 어설프게만 보일 뿐이었다.
또 그렇게 얼마 동안이나 지나갔는지도 모를 복잡한 상황들이 매초 바뀌어 가면서 그렇게 언제까지 속절없이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시간이 흘러간 것이었을까. 초여름 날씨임에도 발끝까지를 온전히 무릎 담요를 덮은 한 아이가 휠체어를 타고 뒤에서 밀어주는 간호사와 함께 우리가 차지하고 있던 그 공간, 응급 실내에서의 가장 수준 높은 자리로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들어 오고 있었다. 그것은 나는 내 자리쯤은 이제 눈을 감고서라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이 공간의 지리에는 능통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은 익숙함에서 오는 안정감이 묻어나는 행동이었고 또한 나는 환자로서, 그 병원의 명패가 반복적으로 써진 환자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이 병원에서의 직위가 누구의 안내 없이도 스스로 내 자리쯤은 찾아갈 수 있다는 식의 최소한, 이 정도쯤은 된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이가 엄마가 누워 계신 바로 옆 침대를 조심조심 올라가는 동안 헐렁헐렁한 환자복 바지 끝으로 보이는 깡마른 새하얀 종아리를 보고서야 그 아이의 계급쯤으로 보이는 직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병원을 입원하고 퇴원한 횟수와 이 병원을 들락거린 지가 최소한 몇 년 차가 되었는지를.
그런데 아이가 침대에 눕고 채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일어나 앉아서는 심각하게 푹 꺼진 눈꺼풀 탓에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동그란 두 눈에서 소리도 없이 말 그대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갑자기 다급해진 생각에 내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는가를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간호사를 불러 달라고 했다. 간호사는 능숙하게 환자복 상의의 단추를 두 개 푸르고 그 아이의 쇄골절흔 약간 좌측 아래에 달린 미색이 도는 조그만 플라스틱 네모난 상자에다 엄마에게서 빼간 피의 두 배 되는 양의 약물을 주입했다. 아이는 불과 2분이 채 안 되는 시간 사이에 마치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했다는 것을 표정과 행동으로 말해주고 있었고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로 급하게 그렇게 모르핀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우리를 친근한 표정으로 잠깐 살피는가 싶더니 자기는 오늘 저녁에는 이 병원의 꼭대기, 마치 요새와도 같은 곳, 무균 병동으로 올라갈 거라고 말했다. 엄마를 말하는 것인지 아줌마도 곧 병상이 비게 되면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정말로 해가 느릿느릿 빌딩 사이를 하강하며 누런 불길을 토해내고 있을 때 그 아이는 타고 들어왔던 휠체어를 타고 응급실을 나갔다. 곧 만나게 될 거라고 하면서.
우리 – 엄마, 아버지, 오빠와 나는 낮과 밤의 구별처럼 시간의 경계가 명백할 수 없는 생과 사의 순간이 뒤엉킨 응급실에서 꼬박 하루를 보냈고 혈액검사 결과를 들고 온 회진 의사로부터 오전 중으로 무균 병동 침상이 한 개 비게 되어 곧 그곳으로 올라가게 될 것을 통보받았다. 그렇게 응급실에서 만 하루 동안만을 대기하고 무균 병동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운이 좋은 편이라는 것을 그때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균병동
환자수송용 승강기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왕래하는 로비 중앙에 위치하지 않았고 조금은 복잡한 미로 같은 통로를 지나쳐야만 찾을 수 있는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가 누워 있는 침대를 미는 사무원 둘, 인수인계가 목적인 연락책쯤으로 보이는 간호사 한 명, 그리고 아버지와 오빠와 내가 한꺼번에 같은 공간속으로 들어갔고 사무원 중 한 사람이 버튼의 12라는 숫자를 눌러 주황색 불이 들어오자 기계적인 힘에 이끌려 내 몸이 부유하는 기분이 들면서 우리는 그 엄마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침상이 있는 무균병동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내부는 별다른 장식이나 홍보전단 한 장 붙어 있지 않았었고 회색빛의 금속 재질의 벽은 큐브 모양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건대, 그곳은 분명히 죽은 자의 시신도 이동하는 승강기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살고자 했던 자는 태우고 올라갔을 것이고 죽은 자는 실어 내려주는 그런 원초적인 임무가 수행되는 공간, 나는 응급실을 나오자마자 이 환자 수송용 승강기야 말로 생과 사가 공존하는 이 병원만의 독보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승강기의 문이 열리고 사무원이 능숙한 솜씨로 침대를 밖으로 밀어냈다. 우리들도 당연히 따라 내렸고 함께 올라 온 간호사는 검은색 차트를 오른쪽 옆구리에 끼운 채로 자동문의 버튼을 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B동이라고 써져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우리가 내린 승강기 바로 옆에 등처럼 꾸며진 그래서 미세한 불빛이 켜져 있는 ‘중환자실’이라고 명확하게 써진 아래 B동의 것과 유사하게 생긴 자동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었다. 몇 초가 지나갔을까 지난 며칠간의 시간을 한데 뭉쳐서 단 하루를 지낸 것처럼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나는 우리가 그 곳에서 얼마나 한참을 대기하고 있었는지는 감지할 수 없었다. 다만 무척 짧은 시간이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고 우리는 간호사의 안내대로 B동 안쪽으로 따라 들어갔다. ㄱ자 모양의 갈림길에서 엄마는 우리와 반대쪽으로 들어갔고 아버지와 오빠와 나는 간호사를 따라 남아 있는 나머지 길을 따라갔다.
[B동 무균병실에서의 수칙]
1. 환자와 보호자는 1:1 원칙
2. 일체의 타인의 출입 및 면회 금지
3. 간단한 필기구 외 책 등 지류 반입 금지
4. 외부 외출 후 병실 출입 시 소독 필수 실시
5. 병실 내 마스크 및 두건 착용 필수
6. 기타 수시로 안내하는 수칙 준수
※ 위 수칙은 환자의 빠른 쾌유를 위한 조치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나는 보자마자 수긍할 수 있는 조치라고 생각했다. 백혈병 환자를 위한 가장 필요한 환경 조건은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에서의 또 다른 심각한 병을 가져올 수 있는 감염을 막기 위한 청결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1:1 보호자는 나였다. 어느 누구 나를 지목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족 중의 누가 보아도 이 병간호는 내가 맡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나는 대학교를 마친 상태였고 그때 당시 경찰관이 되려고 공부를 하고 있던 때였다. 물론 필기시험에는 합격한 상태였지만 이런 상황에서 엄마와 나의 그 어떤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아버지와 오빠는 이 병원을 떠나셔야 했다. 그곳에 남아 계셔도 사실 별달리 도움을 줄 수 있는 여건이 되었던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곳 아닌 이외의 모든 세계는 너무나 태연히도 정상적으로 흘러만 가고 있었기에 곧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현이야, 어쩌면 이곳이 너와 엄마가 함께 보낼 수 있는 마지막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돈 때문에 엄마가 치료를 못 받을 일은 없도록 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잘 지내고 있어. 이렇게 너한테 떠 맡겨 놓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다. 금방 올게.”
오빠는 유난히 담담하게 말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나의 불안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그 당시 나 또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강한 생각이 들었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이 상황의 실마리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렇게 아버지와 오빠를 떠나보냈다. 단 며칠 만에 엄마는 한치 앞을 예견할 수 없는 중증환자가 되었고 나는 그 환자를 보살펴 주어야 하는 보호자가 되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그 누구의 의지도 바람도 희망도 소용없게 만드는 컴컴한 터널속의 공포와도 같았다.
B병동의 수간호사는 매우 사무적인 말투와 교양 있는 태도로 말했는데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나도 곧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약간의 위로를 건네어 주기는 했지만 나는 신입 보호자 누구에게나 했을 법한 그 말에 진정성을 느끼지 못하고 매우 불안한 마음 상태로 몇 시간을 보내야만 했었다. 엄마는 6번 침상을 차지하고 계셨다. 이 병동의 수칙대로 머리에 두건을 쓰고 마스크를 한 채로 병실에 들어서자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뜻밖의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언니! 어서 와요. 내가 안 그래도 아줌마가 오늘 내일 쯤 여기로 오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언니가 병간호를 맡아 한다는 소리를 듣고 무척 반가웠어요. 언니! 나는 여기 이 자리 5번이야.”
‘아, 그래! 응급실에서 모르핀 주사를 연거푸 두 대나 맞고 나서야 웃음을 되찾았던 그 아이가 여기 있구나.’
소아암 병동으로 갔을 줄 알고 있었는데 그 애는 나와 단 두 살 차이가 났던 스물세 살 아가씨였던 것이다.
APL, M3
한 번 병을 앓아 보거나 가까운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을 경험해본 사람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가벼운 지식을 자연스럽게 알 게 되는 법이다. 6번 침상에 자리를 잡은 엄마는 다음 날 정확한 진단명을 받기 위한 골수검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전 병원에서는 백혈병인가를 의심하여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골수검사였다면 이번의 골수검사는 정확한 진단명을 내리고 그에 맞는 정확한 처방을 내려 치료를 시작하기 위한 골수검사였다. 검사는 그 단어에서 풍기는 전문적인 느낌대로 검사자체도 상당히 숙련된 의사만이 할 수 있는 검사라고 했다. 환자의 통증을 줄여주기 위해서 강한 마취주사를 놓고 마치 청새치 입모양처럼 생긴 거대한 주사바늘로 골반 뼈를 통과시켜 골수를 채취하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석유탐사와도 같이 광구를 탐색할 때 어느 정도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 해 두어야 하는 것과 같이 이 검사 또한 비슷했기 때문에 환자에게 크나큰 통증을 줄 뿐만 아니라 검사가 끝난 후에도 부동의 자세로 4시간을 지나야만 하는 큰 검사였다. 엄마는 그런 검사를 며칠사이에 두 차례나 받아야만 했었고 그건 마치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앞으로의 치료 과정의 전초전쯤으로 생각하고 나니 엄마가 잘 견뎌줄 수 있을까 또한 나는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엄마의 정확한 진단명은 Acute Promyelocytic Leukemia, 그 중에서도 급성전골수구백혈병(M3)이라고 나뉜 병명이었다. 이제까지 알고 있던 백혈병은 한 가지라고만 막연하게 생각했던 내게 더 많은 검색과 정보를 알아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게 생겼고 어쩌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라고도 여겼다. 우선, M3는 백혈병 타입 중 가장 치료효과 및 완치율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우리들끼리는 ‘백혈병의 꽃’이라고도 불러주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달리 출혈위험이 높아 순식간에 사망할 수 있다는 설명도 읽어 보았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이 조혈모세포 이식수술과정에서 잘못되는 수가 많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다행히 거기까지 고려하지 않고도 완치를 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 에 모든 희망을 걸고 싶은 마음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실에는 총 12번까지의 침상이 있었는데 엄마만이 유일하게 M3로 진단을 받은 환자였고 정말로 그 사실 만으로도 아주 잠깐 모든 보호자와 환자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실로 대단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콧방귀 낄만한 말이지만 그야말로 중증 중의 최고, 그곳의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던 낮은 등급의 계급을 부여받은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날부터 나이가 어린 아가씨 환자들은 엄마를 ‘M3아줌마’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지나고 나서야 생각해 보니 그 심정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도 아닌 것이 그곳의 환자들은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일 년까지도 12층으로 올라와서 단 며칠이라도 요양 차 퇴원을 허락받은 사실이 없던 사람도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루씩 시간이 지나가고 있음을 달력이 넘어가면서 계절이 바뀌고 있는 것을 볼 수는 있지만 그동안에 지구가 쉼 없이 공전하는 것을 직접 몸으로 느낄 수 없는 그런 시간의 흐름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오히려 그곳에서의 시간과 날짜 계산은 각자의 항암치료가 이번이 몇 회 차인가에 따라서 구분하는 것이 서로에게 더 알아듣기가 쉬웠고 또한 그런 식의 대화를 통해 백혈병 환자로서의 상대방의 경력을 짐작해 보기도 했으므로.
본격적인 치료에 앞서 필수 준비행위처럼 여겨지는 시술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것은 하루에도 수시로 혈액을 뽑아내고 약물을 주입해야 하는 일종의 인공의 문을 달아주는 역할을 해 주는 정말로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증환자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히크만 카텍터’수술로써 쇄골하정맥을 통하여 일종의 인공관을 삽입하여 환자의 혈관을 직접적으로 찌르지 않더라도 그 관을 통해 혈액을 뽑고 항생제, 항암제를 비롯한 각종 모든 약물을 투입할 수도 있는 그런 장치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료들과의 우연한 대화 중 있었던 일이었는데, 정년을 코앞에 두고 계신 선배님께서 갑자기 다리에 상처를 입어서 대학병원을 찾았다가 그날로 바로 입원을 해야 한다는 병원 측의 경고에 따라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관계로 마침 병문안을 다녀오는 길이라면서 가슴언저리에 이상한 고무관으로 연결된 작은 플라스틱 박스를 통해 링거액을 맞고 있었다고 말했는데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그 분처럼 장기 투석을 해야 하는 환자는 히크만을 가슴에 부착해야 된다고 말을 해 버렸다. 그러자 그 선배님은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그런 시술과 전문용어에 익숙한 것으로 보아 간호사 경력이 있는 줄로 생각했었다는 것이었다. 일부러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지만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타인의 심각한 병명에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으로 길들여져 있었다.
토마스 만 - <마의 산>을 보면 요양원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곳 언저리 쇄골절흔을 특이하게도 ‘소금단지’라고 그들만의 은어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그럴 법도 한 것이 중심정맥 카텍터를 삽입할 정도의 환자는 날이 갈수록 몸속의 수분이 빠져나가게 되어서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 대부분은 쇄골절흔이 유난히도 움푹 패여 있어서 한 끼의 음식을 할 때 간을 할 정도의 양 만큼의 소금을 저장해 둘 정도의 크기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소금이라는 어감과 모양의 결정체에서 풍겨지는 슬픈 분위기에서 오는 또 다른 사정이 있었을 것이리라.
어쨌든 엄마는 B동의 꽃이 되었다.
신발과 삭발
내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어떤 힘 – 말하자면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해서이다.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평범하고 당연해 보이지만 결코 쉽게 결론내릴 수 없는 인간에게 있어서 어쩌면 영원불변한 테마가 바로 이것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언제 어느 자리에서나 있는 듯 없는 듯이 그 존재를 쉽게 드러내지 않고 살아오던 그녀는 자신의 매력에 대해서는 전혀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 자신 스스로는 언제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그 어떤 상식과 습관에 대해 가운데 중심이 잡힌 뚜렷한 가치관으로 살아오고 있었지만 정작 피상적으로는 쉽게 주목할 만한 점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지극히 평범한 한 어린 여자가 다시금 삶에 대해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 그녀는 최소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그 어떤 불안한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침대에 누워 지내야 하는 날들이 늘어날수록 ‘삶이란 단순한 것이구나.’ 오히려 이런 쪽으로 점점 결론을 짓는 듯 보이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위암 말기환자였던 것이다. 피상적으로든, 피하적으로든 최소한 그녀는 삶을 허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원래 처음 가보는 길은 갈 때보다 돌아올 때는 더 쉽고 가까운 거리로 느껴지게 하는 법이다. 나는 이미 여러 번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해 보았으니 이번에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지리라.
그녀는 오히려 아무런 부작용도 동반되지 않았던 검온하는 처치를 가장 두려워했었다. 수은이 든 작은 유리로 된 체온계를 혓바닥 밑에 넣어 놓고 간호사의 지시대로 2분을 기다리기란 정말로 참아낼 수 없는 갈등의 연속된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찌르고 잘라내고 봉합하는 식의 그 어떤 외과적인 치료를 동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 온갖 잡념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고 기회를 포착한 생각들은 그 유리를 이빨로 깨뜨려서 수은을 목구멍으로 삼켜버려 중독에 빠지는 편이 더 나은 것인지를 끊임없이 갈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간호사가 그것을 입속에서 빼 내갈 때 비로소 안전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쉽게 죽을 수 있는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아쉬움이 교차하기도 했던 것이었다. 정말로 솔직하게 말한다면, 모르핀 때문에 거의 통증을 느끼지 못했던 암 덩어리의 존재에서 오는 공포심보다 몇 배는 더 무서운 순간이었고 그래서 나는 엉덩이뼈 아래에서 조혈조직을 떼어내 갈 때의 고통보다도 몇 배는 큰 공포심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엄마! 슬퍼하지 말아요.’ 이제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편안히 눈을 감았다. 그 사이로 마지막 남은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귓바퀴를 타고 흘러내렸다.
엄마는 이제야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울음소리로 나를 부등켜 안고 울기 시작했다. 딱딱한 주치의의 한마디만이 내가 5개월을 살았던 하얀 공간을 흔들며 메아리치는 절정의 순간 속에서.
‘2009년. 4월. 13일. 17:59. 사망하셨습니다.’
결국, 엄마와 영원히 이별하는 날이 찾아왔다.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운 나의 팔다리를 가지런히 정돈하면서 몸에 붙어 있던 기계들을 떼 내는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나의 얼굴은 비로소 빛나고 순수하며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상태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결말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엄마의 울음소리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이마저도 수긍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나는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완전히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의 죽음을 보면서 조금도 슬픈 척은 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무균병동으로 오게 된 이후로 끊임없이 누군가가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새벽 5시, 간호사가 환자들의 아침 피를 뽑아가는 인기척에 나의 장례식까지는 지켜보지 못한 채 꿈이 중단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늘은 엄마의 삭발이 예정되어 있던 날이다. 병실문 밖, 바로 코앞에 회진 의사와 비슷한 옷차림의 출장을 나온 이발사가 엄마의 머리카락을 깎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약간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는 이발기가 스타일의 사정도 물어볼 것도 없이 무심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떨어지는 머리카락 조각과 함께 말없이 떨어지던 엄마의 눈물 방울방울들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전혀 소리를 내거나 흐느끼며 울지 않았기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면 보지 않았어도 되었을 엄마의 눈물을 보고서야 정말로 엄마가 백혈병에 걸린 것을 실감했다.
엄마가 삭발하던 날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내가 병원에 들어올 때 신고 들어온 신발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나처럼 반쯤 정신이 나간 보호자가 신발로 보이는 아무것에나 발을 끼고 그냥 그 낯선 느낌도 감지 못한 채 끌고 갔을 것이리라. 어떤 속상함도 느끼지 못하고 내 기분은 그냥 무덤덤했다. 다만, 신발을 어떻게든 구하기 전까지는 나는 맨발로 다녀야 하는 불편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삭발하던 그 날, 내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저지른 행동이 있다면 보호자가 사용하던 세면실에서 그날 밤 거의 허리까지 길던 내 머리카락을 귀밑머리로 잘라내 버린 일이었다. 단 몇 시간 사이에 신발을 잃어버렸고 몇 년을 길러온 머리카락을 잘라내 버렸다. 점점 나는 내 것에 대한 어떤 아쉬움도 미련도 애착도 없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 채 미세하게 가벼워진 머리카락의 무게와 두건을 쓸 때 거추장스럽지 않던 게 오히려 더 반갑게만 여겨질 뿐이었으니까.
아, 그리고 정신과 병동이 아니던 그곳에서 신발을 신지 않고서 돌아다닌 것은 나 자신보다 환자들과 동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이었으므로 나는 신발을 잃어버린 지 단 하루 만에 1층 매점의 잡화코너에서 싸구려 실내화를 장만해서 신고 다녀야만 했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머리카락의 서툰 모양과 볼품없는 슬리퍼를 신고 있던 나는 단 며칠 만에 완벽하게 그곳에 적응하면서 그야말로 병원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 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사의 영원한 테마 - 삶과 죽음의 문제는 육신과 영혼을 같은 공간에 묶어둘 수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말하는 것임을 아주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했다. 영혼이 죽은 살아 있는 육신은 숨을 쉬고 있어도 산 것이 아니었으며 영혼은 있지만, 육신이 죽어버린 삶 또한 온전히 살아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어떤 기다림
B병동은 매우 정확하게 짜진 일과의 계획에 따라 하루 24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병실의 정확한 소등시간은 22시였다. 잠이 오지 않더라도 나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으므로 무조건 등을 꺼야만 했다. 그래서 일정한 주기의 시간 간격의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돌보는 간호사들은 목걸이로 된 작은 손전등을 달고 다녔는데 나는 그 모습이 이 병동만의 유일한 특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환자들은 대부분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들같이도 잠자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없었고 엄마도 차츰 그 생활에 적응하고 계셨던 것인지 짧게는 30분, 조금 길었던 날은 1시간 동안만을 뒤척거리다가 이내 규칙적인 숨을 내쉬며 잠이 드셨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잠이 든 이후에는 오로지 나만의 위한 시간이 허락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던 날에는 언제나 소리가 전혀 나지 않도록 몸을 움직이며 병실을 빠져나가 비상구 쪽 계단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었다. 그곳은 그 병원에서 내가 찾아낸 나만의 유일한 공간이자 일기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엄마의 입원은 여름이 막 움트기 시작했던 5월의 끄트머리였지만 이제 바깥의 날씨는 한여름을 알리며 한밤중에도 무더위로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단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병실 내에는 4계절이 내내 똑같은 날씨라는 것이다. 같은 풍속의 공기의 흐름과 매일 매일 똑같은 온도와 변하지 않는 풍경들, 오로지 변하는 것이 있다면 몸만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비슷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유일한 전달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실에 한 번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길게는 1년이 넘도록 그 안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달력으로 날짜를 계산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제까지 몇 통의 항암제가 투여되었으며 영양제 링거액을 몇 리터를 흡수했는지 여부로 대충 가능해 볼 정도였고, 한 번씩 정확한 날짜를 확인받았던 것은 일주일마다 정기적으로 도착하는 통지서가 지침이 될 뿐이었다. 그 통지서에는 피상적으로는 소소하게 급식비부터 약물의 종류대로 그 몸값들이 호텔 숙박계의 숙박료처럼 0단위까지 정확하게 기입되어 있던 숫자들과 수납 날짜 마감일이 뚜렷하게 적힌 병원장의 도장이 찍혀 있었지만 그 안에는 그 이상을 뛰어넘는 많은 사연과 한숨과 애환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보통사람들은 쉽게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엄마도 입원한 뒤부터 답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편지들을 꼬박꼬박 받고 계셨고 편지들이 쌓여갈수록 들었던 나의 또 다른 생각은 오빠의 말대로 엄마가 정말로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게 되는 것은 아닐지 하는 불안과 고민들이 자라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여름의 끄트머리 8월의 끝이었다. 옥상으로 연결되는 좁은 쇠창살 문은 언제나 커다란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었으므로 나는 언제나 거기까지가 끝이었고 자물쇠 바로 아래 앉아서 있었다. 밖에서 보자면 나는 영락없이 감옥에 갇힌 죄수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소등이 되면 어김없이 이곳으로 오고 싶었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밤은 하루의 반인 나의 낮보다 더 견뎌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어둠이라는 시각이 내 눈을 덮어주었기 때문에 낮 동안에 볼 수 있었던 온갖 사건과 현상들이 내 깊숙이 들어앉은 상념들을 잠재울 수 있었지만 밤이 되면 한곳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가장 유리한 입장이 되어서 어김없이 강한 세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내 마음속은 낮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지러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차라리 몸을 계속 써야 하는 낮이 나에게는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낮보다는 한 밤중에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낮 동안 투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밤에 이르면 그 어느 것도 나 자신외에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게 되면서 자살을 하고 싶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철문의 자물쇠도 이전 어떤 이의 순간의 충동적인 선택을 보고 나서야 앞으로의 그런 무모한 행동들을 막아보고자 설치해 두었으리라.
내가 지금 뒤돌아 생각해 보니 그 때의 나의 행동 중에 가장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면 일기장을 따로 구입해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병실 내에 책과 같은 물건을 들고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따로 나와서 일기장 형식의 노트를 사서 간소하게라도 일기를 썼었더라면 지금은 가물가물하여 얼굴조차 희미해져 버린 그곳 사람들의 이름이라도 최소한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리라. 벌써 15년 전의 일이기도 하겠지만 당시 나에게도 미래를 꿈꾸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던 때였고 엄마의 발병으로 내 사적인 원인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그 미래와 절교를 선언하고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과생으로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을 보냈다. 아니 휴학도 했었기에 총 8년 간의 시간을 이과생에 가깝게 생활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우연한 기회에 학교에서 운영하는 고시원 입실시험에서 1등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시원 운영 실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사실 그곳에 들어가 용돈까지 받아가면서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던 상황이었다. 더 자세히 말해 보자면, 오빠의 권유로 경찰관이 되려고 생각하고 시작을 했지만 필기시험보다는 또 다른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던 와중에 고시원 입실 시험을 치르게 되었고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왔던 것이 내가 법이라는 과목을 접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나 스스로의 독학에서 나온 지식들 뿐이었음에도 형법과 영어에서 최고점을 받았던 것이다. 이를 살펴보던 법대 교수 중 한 분께서 이과생이던 나의 이력을 특이하게 알아보시고 면담을 하고자 연락을 해 왔던 것이었다. 다행이 그 교수님의 성함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요지는 자기가 지도하는 많은 학생들이 있지만 나처럼 이런 경우는 처음이고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 나의 적성에도 맞을 법한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 오셨던 것이다. 교수님은 고시원에 입실하여 변리사 시험을 준비해 보자고 하셨다. 기타 나머지 따라오는 문제들은 학교에서 해 주는 지원을 받으면 될 것이고 나만의 속도대로만 해 준다면 충분한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라며 진심으로 권유한다고 했었다.
그런 일이 내게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그랬다 정말로. 사실 그때 나는 정말로 공부를 하고 싶었던 완전한 열의로 가득 차 있을 때 그 어떤 마음의 준비도 못한 채로 병원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밤에도 엄마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한 후에 나는 병실을 조용히 빠져나와 그곳으로 올라갔다. 계단의 막바지 모퉁이를 돌다가 나도 모르게 ‘엄마야’하고 깜짝 놀랐을 때 반사적으로 나올 법한 말을 무의식적으로 뱉어버렸다. 거기에는 엄마 또래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 한분이 언제나 내가 앉던 자물쇠 아래에 앉아계셨고 나는 낯선 사람을 본 것에 대한 놀라움 보다는 온 곳이 금연구역이었던 곳에서 그 아주머니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에 더 놀랐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나는 왠지 그 분의 비밀을 훔쳐본 사람같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순간 자리를 피하는 것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죄송합니다.’말을 하고 등을 돌리던 참이었다.
“학생! 괜찮아요. 여기 자리 남아 있어.”
나는 나를 학생이라고 불러 세우는 아주머니에게로 몸을 돌리고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물고 있던 담배를 시멘트 벽면에 눌러 끄고 손으로 파리를 쫓아내 듯 연기를 흩어버리고 계셨다.
“미안하네. 담배를 펴서. 그런데 학생도 간병인으로 온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색하게 그 아주머니와 조금 거리를 남겨두고 계단 끝에 살짝 엉덩이만을 걸치고 앉았다.
“나는 아들이 아픈데 학생은 누가 아파서 여기에 온 거야?”
그 아주머니는 나를 고등학생쯤으로 보았던 것인지 아니면 일상생활이 전부 반말로 이루어지는 사람이었던지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로 처음 보는 내게 아주 익숙한 반말을 잘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아들이 아프다고 말했으므로 나를 아들의 또래쯤으로 여겨 그랬을 거라 짐작만 했을 뿐이다.
아주머니는 직접 병간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간병인을 사서 쓰고 있는데 갑자기 그분 집에 사정이 생겨서 며칠간을 어쩔 수 없이 들어와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 내가 먼저 어떤 상황인지를 물어보지 않았었지만 아주머니는 자기 아들의 신상에 대해서 그리고 병명과 가족 상황들 그리고 어디가 집인지 등등 지극히 개인적인 사실들을 참 잘도 알려주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것은 아주머니도 나처럼 무슨 말이라도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해서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은 열여덟 살, 조혈기관이 잘못되어서 생긴 백혈병이기는 하지만 정확한 진단명은 재생불량성빈혈, 학교에서 축구를 하다가 부상을 당해 응급실에 실려 왔다가 혈액검사를 통해 우연히 발견이 되었다고 했다. 하기야 백혈병이라는 것이 언제나 발병될 것을 염려하여 잠깐씩의 빈혈 증세나 출혈에도 혹시 내가 백혈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를 의심하며 병원에 찾아가서 피를 뽑아 혈액수치를 분석해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어디 흔하게 있겠는가를 감안해 본다면 엄마의 경우처럼 여기에 모여 치료받는 사람들은 전부다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던 도중에 아주 우연히 자신이 백혈병에 걸린 것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리라.
아주머니를 보고 놀란 이유 중의 하나가 환자를 간호하는 사람은 이전에 흡연을 했던 자라도 금연을 시작했어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병원 내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과 언뜻 외모에서 풍겨지는 특별한 인상, 보통의 아주머니에게서 느껴지는 전형적인 인상 외에 무언가 강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그 분의 손톱과 짙게 문신한 눈썹에서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A병동에 있다고 했다. 아, 그래. 나는 B병동이 있는 거라면 A병동이 있다는 것은 필연적인 전제 조건이라는 것을 미처 감지하지도 못한 채로 백혈병이란 남자들에게는 걸리지 않는다는 아주 짧은 생각으로 멍청하게 지내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기야 그런 생각도 굳이 나무랄 것이 못되는 것이 흔히 백혈병이라는 병명에서 오는 인상이란 것이 항상 영화 속에서는 청순한 여주인공만이 백혈병에 걸렸고 죽음조차도 매우 미화시켜서 심미적인 느낌이 들게 하도록 하는 선입견이 자리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말 하게 될 이야기를 염두하고 자신 있게 단언하지만, 백혈병은 막 세상에 태어난 아기부터 내일 자연사를 앞 둔 백수의 노인에게까지 연령과 성별에 전혀 하등의 차별을 두지 않는 병이라는 것이다.
그 아주머니는 오늘까지만 병원에 있고 아들을 돌봐주는 간병인이 들어오게 되면 병원을 떠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속에서 어서 오늘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그 어떤 기다림을 느낄 수가 있었고 어쩐지 A병동의 그 소년에게 백혈병에 걸린 사실 외에도 또 다른 면에 있어서 측은함을 느꼈다. 단정하기는 어려웠지만 왠지 정상적인 엄마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가 간병인이 오는 날을 기다리 듯 무균병동에서 지내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그 어떤 기다림을 마음속에 품고 지냈으리라. 24시간을 교대로 근무하는 간호사들도 마스크와 두건을 쓴 채로 하루를 꼬박 갇혀있는 것을 벗어나기를 기다렸을 것이며 환자들도 어서 빨리 이 시간들이 지나가기를 희망하며 그 어떤 결말이라도 감수할 수 있다는 대담함으로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병간호를 하고 있던 사람들도 병이 끝나주기를 기다렸을 테니까. 나 또한 그러했으므로.
하기야 살면서 그 어떤 기다림조차 없다면 살고 있더라도 그 어디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 그 흐름도 감지하지 못한 채로 엄마에게 주어졌던 3개월의 끝까지 와 있었다.
한 번 태어난 인간은 결국에는 죽게 된다. 이것은 절대 변하지 않으며 무엇도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어떻게 보자면 사는 동안 우리 모두는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기다림으로 해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영원한 삶이란 것은 없겠지만 어떤 불가항력적인 원인에 의해서 죽음의 통보를 미리 앞당겨 받은 사람은 내부의 노력과 외부의 개입으로 어쨌든 살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연장시킬 수 있는 노력은 해 볼 수 있다. 우리들은 처음에 받았던 시한부 3개월 동안을 죽음에 가까운 공포감으로 마음 졸이며 하루하루를 기다렸고 이제 그것은 기간만료로 효력이 소멸되면서 또 다른 연장된 삶을 부여받아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여기에서 언급한 또 다른 삶이란 비록 인공적인 어떤 장치들과 독극물에 가까운 약물 주입이 생명연장의 필요조건처럼 저당 잡혀 버린 삶일지라도.
우회전이 자연의 법칙
행성과 그 위성들은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회전한다. 적어도 내가 사는 북반구에서 보는 우주의 움직임이란 그렇다. 인간도 왼손보다는 오른쪽 손을 더 많이 쓰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이 사용하는 장치와 기계들도 거의 다 오른손잡이 인간이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어릴 때 읽었던 <해저 2만 리>에서는 세상의 모든 조개와 소라도 우회전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거의 예외는 없다고 쥘 베른이 꾸며 낸 네모 선장의 잠수함에 우연히 탑승하게 되어 항해를 하는 주인공 ‘나’에 따르면 그렇다. 그러나 돌연변이와도 같이 우연히 나선이 좌회전인 조개가 있다면 해양생물학자는 그 조개와 같은 무게의 황금덩어리의 값을 치르더라도 어떡해서든 손에 넣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섭리, 이것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 나는 병원생활이 길어지게 되면서 가끔은 보통사람들이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나를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말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지진이나 폭풍, 혹은 화산폭발과도 같은 자연재해에 한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과도 같은 신세로 그 어떤 저항한번 해보지 못한 채 수용소와도 같은 이곳으로 와서 1년의 절반 가까이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오전 10시, 숙련된 간호사가 요구르트병만 한 크기의 호일과도 같은 은박 테이프로 몸통 전체가 칭칭 감긴 갈색 유리병을 은쟁반과 같은 금속 트레이에 들고 들어온다. 저 간호사도 머리망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서 그녀만의 외모를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키, 몸매, 그리고 눈의 모양정도로 구별할 수가 있었지만, 물론 여기에 근무하는 모든 간호사들과 의사들은 단순한 특징들로 기억되고 있기는 했었지만, 나는 지금 엄마에게 3차의 항암제를 막 투여하려고 하는 저 간호사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내게 투시력 따위가 생겼다거나 나름 건강한 정상인으로서 갇혀 있는 생활을 오래 하고 있다 보니 성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여자를 이성으로 보게 되는 마음이 생기게 된 것도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항상 엉덩이가 유난히 동그랗고 오동통했던 이 간호사가 언제나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동정어린 진심과 그 속에 담긴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전 사복차림으로 퇴근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등허리 절반쯤 내려오는 긴 머리와 도톰한 입술과 동그랗고 봉곳한 콧날이 마치 그녀의 엉덩이와도 잘 어울리는 외모를 갖고 있었고 특히, 전체적으로 풍겨지는 조심스러운 몸짓에서 평소의 그녀의 행동이 가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으며 그래서 그런 것인지 그녀와 외모와 성품이 정말로 적절하게 잘 조화를 이루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녀가 이 무균병동의 간호사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런 그녀가 3차 항암제를 엄마의 중심정맥혈관에 투여할 준비를 하고 있다. 환자복의 단추를 두 개 풀러 의료용 장갑을 낀 손으로 소독약을 가득 머금은 거즈를 히크만 카텍터 부위를 소독했다.
“이미 두 번 맞아 보셨으니까 이번에도 잘 하실 수 있으시죠? 시간은 비슷하게 2시간에서 3시간정도면 끝날 거구요. 제가 그 중간에 다시 한 번 더 올 것이고 혹시 사이에 약이 너무 느리게 들어간다거나 빨리 들어간다거나 하면 보호자분은 간호사실로 빨리 말씀해 주세요. 자, 지금부터 약 들어갑니다.”
언제나 비슷한 안내와 유의사항이었지만 이 순간 내 마음은 항상 1차로 항암 링거를 맞던 엄마의 모습을 볼 때처럼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히크만 카텍터 수술을 마친 환자는 그 인공관이 정맥혈관에 잘 삽입이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수액을 먼저 주입해 본다. 엄마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정해진 순서대로 수술 결과를 확인하던 날이었다. 만일에 수술이 잘 되었다면 바로 1차 항암 치료를 시작해야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엄마에게 남아 있던 시간이란 것은 너무나 촉박하기 그지없었으므로. 수액을 주입하고 몇 분이 지나갔을까. 엄마의 목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고 나는 너무나 놀라서 간호사를 급히 불렀고 바로 응급처치를 했지만 나의 예상대로 인공관이 정맥혈에 정상적으로 삽입이 되어 있지 않아서 수액이 혈관을 타고 들어가지 못하고 피하조직에 고이면서 그곳이 물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것이었다. 어쨌든 엄마는 솜씨 없는 의사의 처치로 한 번의 고비를 더 넘기며 그 수술을 또 다시 받아야 했었다. 그래서 1차 항암치료는 예정일보다 하루가 늦춰지게 되었고 그 때도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었는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터지면 핵폭탄과도 맞먹는 해로움이 있는 이 갈색의 독극물은 가장먼저 암실 처리 된 유리병에서 흘러나와 아주 잠깐 인공관을 타고 흘러가다 곧 엄마의 정맥혈에 진입하게 되면 흐름의 속도를 자유자재로 높였다 줄였다하면서 손가락과 발가락 끝의 말초혈관으로까지 온 몸 전체의 구석구석을 그것도 아주 도도하게 흘러 다닐 것이리라. 그러면서 서서히 엄마의 몸속에 기생하고 있는 또 다른 유기체 – 암세포 - 말고도 그나마 정상적으로 크고 있는 것들까지 죽이게 될 것이다. 원래 항암제라는 것이 세포를 죽이자고 하는 것이니 그만큼 독성이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 무분별한 독재자는 좋고 나쁜 세포를 가려낼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분열하고 있는 모든 세포들을 죽여 없앨 것이다. 지나침은 언제나 부작용을 남기는 법, 그래서 이 부식작용의 가장 큰 외적인 특징으로 특정 부위 조직의 비대증, 병적인 종기 번식, 단백질로 공생하는 몸의 모든 털의 뿌리를 부식시키면서 머리카락부터의 말끔한 제거, 그리고 속눈썹까지도 붙어있지 못하게 하는 분리작용, 영화 속에서처럼 식사도중 구토를 하려고 화장실로 달려가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지만 - , 그 이유야 항암제를 맞고 있는 환자는 스스로 걷을 힘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구토가 나온다고 어떻게 화장실로 달려 갈 수 있단 말이던가, 그 대신 언제나 식판 옆에는 어느 때 올라올지 모르는 구토와 각혈을 대비하여 불투명 비닐봉투를 준비해 두고 있어야 했었다. - 엄마도 항암치료를 시작하면서부터 책에 나와 있던 대로 처치에 따른 후유증을 그대로 경험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결국 완전무결한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완전히 사멸해 버리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피상적인 변화보다 정작 환자를 괴롭히던 것은 결코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며 의학적인 수치로 뽑아 낼 수 없었던 내면으로부터 오는 불안과 공포심이 가장 큰 부작용이었으리라.
어쨌든 혈액 암환자의 항암치료의 궁극적인 목표는 완치를 목적으로 하는 치료가 아니라 혈액검사에서 검사치들이 호전된 상태를 말하는 관해를 이루기 위한 것에 있었다. 이것은 백혈병환자의 최후의 거점과도 같은 조혈모세포이식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의 환자의 몸 상태를 만들어주는 과정과도 같은 것이며 설령 10회 차까지 항암치료를 하여도 관해가 좋지 못하다면 말 그대로 그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세포분열을 계속하는 악성종양만을 죽이고 또 죽이고 또 다시 살아나 증식하여 커지는 종양을 죽이는 과정만을 반복한 것일 뿐 결국 이 환자는 모든 치료를 포기하게 됨으로써 종양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만 남을 뿐이었다. 우리들이 이렇게 초짜 환자나 그 분의 보호자에게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항암치료의 몇 회 차인지를 마치 어깨에 단 계급장처럼 관등의 수식으로 붙이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였고 그만큼 치료 회수가 높다는 것은 면역증강요법으로 도달하기 까지는 그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진다는 사실과 그것은 곧 점점 죽음에 가까운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우리들 모두는 그렇게 인식하였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보통사회에서 연장자에 대한 상식적인 예우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새벽 5시에 뽑아가는 혈액수치의 결과는 12명 환자들의 아침 식판이 모두 빠져나가는 오전 9시경에 출입문 옆 안쪽에 성적표처럼 붙었다. 하루 중 최고로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또한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최소한의 위화감을 주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채혈결과에 대해 어떤 환자의 보호자들은 병실 밖으로 나와서 그 수치에 대해 약간씩 속여 말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내가 간호하고 있는 환자는 이렇게 혈액 수치가 최저인데도 나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아주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달리 말해 그만큼 자신의 간병인으로서의 수준을 은연중에 끌어올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물론 가족이 아니거나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그 생활에 오랜 기간 동안 젖어 지내서 환자를 포함한 자기 자신의 인생을 두고서라도 별다른 희망과 기대를 걸지 않았던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다. 내가 간호하는 환자는 살 수 있는 희망은 없지만 이렇게 입원과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돈, 돈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만일에 환자가 기적적으로 치료를 마무리하고 퇴원을 하더라도 가야할 길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있던 병원비의 부담감이 사람들의 마음을 그렇게 오염시켜버렸으리라.
엄마는 모범생처럼 꾸준하게 잘 해내고 계셨다. 백혈구는 언제나 바닥을 치면서도 그럭저럭 면역을 유지했고 빈혈수치도 만성 빈혈환자였던 나와 비슷했으며 무엇보다 혈소판의 수치는 언제나 칭찬할 만 했다. 지금 당장 서울역에 혼자 나가 중식 한 그릇 시켜먹고도 남을 만 한 돈을 호주머니에 지닌 사람과도 같다고 해야 할까. 건강한 성인은 언제나 최저 기준을 따져 정상수치와도 같은 150,000원을 쥐고 있는 것이었다면 엄마는 그래도 최소한 10,000원 이상을 손에 쥐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으므로 뜻밖의 용돈으로 평소에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살 수 있다는 기대로 부풀어 있는 아이의 배포와도 비슷한 경우였으리라.
나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엄마의 검사치가 최소한의 한계선까지는 지나치게 넘어서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아 왜 m3을 백혈병의 꽃이라고 말하는 지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환자로서의 신분이 오래될수록 중증환자임을 나타내는 일종의 과시욕, 누구든지 자기의 병세를 조금 더 과장되게 보이게 하고 그것을 애써 포장하여 마치 계급 사회의 진지한 분위기의 서열을 암시하는 상류층을 나타내거나 가능한 한 그것에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려는 환자만의 허영심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는 타고난 정신력의 소유자임을 알리며 공연히 으쓱해하는 그런 기분마저 느끼지 못했다면 아마도 무균 실의 환자들은 예상보다 훨씬 더 상태가 급히 악화되거나 더 빨리 죽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끔씩 의사의 허락을 받아 임시적으로 퇴원을 하거나 아예 치료를 포기하고 자진 퇴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환자들의 들락거림을 제외하고는 변화가 거의 없는 곳, 어떻게 보면 세상의 그 어떤 곳보다도 깨끗하고 평온해 보이는 곳, 유리벽 바깥세상에서 보면 이 무균 실 이야말로 멸균 세계로 보여졌으리라. 달력의 흐름대로 계절은 지나가고 돌아온다는 자연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곳, 어떻게 보면 시간의 흐름을 공간이라는 형태가 붙들어 놓아 모든 것이 정지해 버린 곳, 시계 초침의 바늘은 잠시도 한눈을 팔 여유도 부리지 않고 주저 없이 우회전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던 그 곳, B병동 12인의 무균 실은 그렇게 순간순간에 사로잡혀 마치 실체는 없지만 영원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공간과도 같은 곳이었다. 시간이 우회전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우회전 방식으로 살아가야한다는 자연 법칙은 존재하지도 않는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얼마 후, 그곳의 우리들은 좌회전과 같은 만성 환자가 합류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