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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파리 Aug 10. 2024

고도의 T는 F에 가깝다

혜킬이 씁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밈이 있다. "T라 미숙해~ T라 미숙해~"


 T는 미숙한가?


 MBTI는 이제 흔한 스몰토크 주제를 넘어, 거의 한국을 지배하는 수준으로 대화의 중심에 있다. 처음 MBTI가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16가지 개별 성격들만 가지고 놀더니, 요즘에는 그것들을 결정하는 네 가지 분류기준, 8개의 알파벳으로 다양한 패러디물을 만들어내며 논다. 내향(I)이냐 외향(E)이냐, 직관(N)이냐 감각(S)이냐, 사고(T)냐 감정(F)이냐, 판단(J)이냐 인식(P)이냐. 네 가지 분류 기준 모두 어느 정도 범주화되어 밈으로 떠돈다. 네 가지 분류기준 전부 흥미로워 사람들은 유희적인 논쟁을 펼치곤 하는데, 특히 사고형(T)들과 감정형(F)들의 싸움이 뜨겁다.


 나머지 세 개의 분류 기준보다 '사고형(T)이냐 감정형(F)이냐'가 인기있는 주제인 이유는, 가장 많이 일어나는 갈등이나 문제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글을 쓰면서 MBTI에 대해 검색해 본 결과 사실 T와 F를 가르는 기준은 '판단 기능'을 따르는 것인데, 많은 이들이 '행동 기능'에 따른 것이라 여기고 있는 듯하다는 걸 깨달았다. '사고'를 바탕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 '감정'을 바탕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 '바탕'이 아니라 이후의 '행동'이 기준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적인 판단과 논리뿐 아니라 감성과 공감 능력의 중요성도 함께 대두되는 현시대에 'T들은 이성적이고 늘 경계하기 때문에 팩트만 따진다, 인간관계에 미숙하다, 남에게 쉽게 상처를 준다', 'F들은 감성적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무작정으로 낙관적으로 군다, 무르고 감정적이다'라고 서로 삿대질하거나, '난 T라 부드럽게 돌려 이야기할 줄 몰라', '난 F라 사고나 실리에 약해, 마음이 약해'하며 자신의 태도에 명분을 부여하는 일이 잦아졌다 느끼고 나는 그것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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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MBTI에 관한 가장 선명한 기억은 열아홉 살 말에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내 MBTI는 ENFP로 같다. 요즘과 MBTI 검사 발명 당시의 의도를 주관적으로 비교 해석하기 위해 굳이 길게 풀어보겠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3월이 되자마자 어리둥절 '정시파 유망주' 중 한 명이 되었다. 학교의 관심을 받자 이전까지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던 수능 공부가 드디어 재밌어졌고 그 기세를 몰아 모든 모의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그러나 열아홉의 11월 둘째 주 목요일, 예상보다 낮은 수능 점수를 얻곤 오만하게도 온 세상이 돌아가는 게 결국 운빨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세상은 계산하고 예측할 수 없다, 전부 운이다, 운명이다, 불가항력이다'가 나를 움직이는 첫 신념으로 자리 잡았다.


 아무래도 성과주의인 엄마 아빠에게 '드디어! 내가 뭔가 보여주나', 그들도 '드디어! 이 속 썩이는 가시나가 좋은 대학에 가 걱정을 덜어줄까, 드디어! 그놈의 공부 때문에 서로 깊었던 갈등이 해소될 수 있으려나' 싶어 가족 모두가 기대를 했다. 나는 미래 언젠가에 꼭 효녀 모드로 살고 싶었으므로 '공부 잘해서 예쁜 딸 모드'를 미리 켜둔 상태였다. 하지만 모의고사는 '모의'였다. 실전에서는 운도 기세도 따르지 않았다. 당연히 '운 7 기 3, 도합 10' 권법을 쓰던 나는 '실력 10'들에게 패배했다.


 엄마는 수능이 끝난 지 겨우 2주 만에 나를 어느 자기주도학습 학원에 밀어 넣었다. 그 어떤 재수학원에서도 방금 수능이 끝난 11월 말에는 개강 일정이 없었다. 본격적인 개강 전까지라도 자기 주도적인 정신수양을 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세상 살아가는 것 전부 운에 달렸을 뿐인데 '효녀 모드'는 무슨, 돌이켜보면 오만이고 고작인 이유로 학창 시절 내내 디폴트 값이었던 '질풍노도 반항아 모드'를 다시 켰다.


 학원은 미성년자 입시생들을 위한 곳이었기 때문에 원장 선생님은 곧 성인이 되는 나를 등록시켜도 되는지 조금 망설였다. 다시 생각해도 좀 부끄럽지만, 밝게 염색한 머리에, 곧 경극이라도 할 듯 진한 화장에, 대충 입은 교복에, 귀걸이와 피어싱을 주렁주렁 달고 눈을 세모나게 치켜뜬 채로, 그 모습을 보며 한숨만 쉬는 엄마와 등록 상담을 받으러 갔기 때문이다.


 그 학원에는 관리 선생님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에게 배정된 학생의 등하원 시간을 포함한 공부 및 생활 전반에 대한 계획을 함께 세워주고 점검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학생과 관리 선생님 모두 MBTI 검사를 해야 했고 어떤 기준에 따라 짝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비슷한 유형을 묶어 선생님이 학생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던 것인지, 반대 유형을 묶어 시너지를 낼 수 있게 하려던 것인지 하여간 그랬다.


 나도 곧 MBTI 검사를 받았고 관리 선생님이 배정되어 첫 대면 상담을 했다. 검사지를 들여다보던 그의 첫마디가 아직도 생생하다. 여전히 무슨 의도였는지, 그리고 이제 와서는 그가 무슨 MBTI였는지는 궁금하다.


"이거 중2병 MBTI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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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2병'이라는 말은 미숙함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가 아닌가. 정식 검사 당시에 ENFP 유형은 '스파크형'으로 불렸다. 확실히 '스파크'라는 단어는 '중2병'과 어울린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ENFP 유형이 최근에는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골든 리트리버형'으로 이미지 세탁을 했다. '스파크'라는 단어와 '골든 리트리버'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아무래도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T와 F를 '판단 기능'이 아니라 '행동 기능'으로 해석하는 테스트가 많아진 결과이지 않을까. 참고로 글자 하나 다른 ENTP 유형은 MBTI 검사가 유행한 이후 '싹수없는 팩트폭행형'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예전에는 '발명가형'이라고 불렸다. 그래서 ENFP가 미숙한가 ENTP가 미숙한가? 10년 전 기준으로는 아무래도 전자가 미숙해 보인다. 당시의 상태에 이입해 풀어본 위의 글도 성숙한 태도가 아니다. T가 아니라 F가 미숙한 거 아냐?


 나이를 조금 더 먹은 지금의 나의 행동 양식이,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으로 보이는 일을 자주 했던 예전과는 조금 달라지긴 했으나, 그 좁은 간극은 그저 시간의 누적으로 길러진 약간의 조심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성숙이 덜 되었던 탓이다. 수능 이후 했던 행동들은 감정적이다. 소위 요즘 이야기하는 'F적'이다.


 아마 돌아가도 즈게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이, 여전히 10년 전과 변함없는 신념과 규칙을 따른다. 게다가 그것들은 요즘 이야기하는 F유형의 이미지와 비슷하지도 않다. 어쩌다 운명론을 내면화했고 삶보다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더 좋아한다. 어떤 일에 사소하더라도 이유가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작조차 하기를 꺼린다. T와 F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을 어떻게'가 아니라 '왜?'에서 비롯된다. 가끔 나조차도 헷갈리는 내가 T유형이 아니라 F유형인 이유는, 다만 규칙의 기원이 계산이 아니라 느낌이기 때문일 것이다.


 '왜?' 다음엔 '그래서?', 원인을 넣으면 결과가 나오는 것이 수순이다.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 사고를 기반으로 한 긍정적, 부정적 판단의 알고리즘이 '이익'과 '손해', '성공'과 '실패' 등으로 이어진다면, 감정을 기반으로 한 알고리즘은 '좋음'와 '싫음'로 이어진다. 결국 같은 거 아닌가? 어느 유형이 더 미숙한가?


 T라서가 아니라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숙하다. 더 좋고 나쁜 MBTI란 없다. 그저 삶에 활용할 수 있는 도구이자 특성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특성은 무조건 양면적이다.


 다양한 T유형과 F유형을 만났다. 성격 유형을 핑계 삼아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확히 반대로 행동하는 이들이 있었다. 본인을 극단의 T라고 소개한 이들 중엔 스스로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그렇기에 뇌로 타인을 이해하여 공감하고 지지하는 제스처를 취하려 노력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반대로 본인이 극단의 F라 상대방의 상황에 감정을 이입하여 그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끔 계산을 거듭해 도움을 주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어떤 알고리즘을 거치든 마주하고 있는 사람을 위한 행동을 한다.


 그래서 '선'이 정말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인간은 '선', 즉 '좋음'을 추구할 줄 아는 존재다. 그리고 '선'을 추구할 줄 아는 성인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생존 및 '이익'과 성공'을 위해서는 끝내 비판이나 평가보다 이타성과 다정함을 전략으로 가져가야 한다. 정답이 딱히 없는 세상이지만 정답이 없기 때문에, 예측 불가하기 때문에, 더 나아가 그 불확실성이 대부분 개별 인간의 행동에서 말미암기 때문에, 인간은 반드시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그 편이 좀 더 현명하지 않을까.


  고도의 T는 F에 가깝고 고도의 F는 T에 가깝다. "T라 미숙해"라는 문장아, 이제 그만 원곡 "티라미수케이크"로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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