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이드가 씁니다
“죽는다는 건 뭘까? 조심스러운 주제다. 정감독님은 자주 나에게 죽음의 냄새가 난다고 했었다. 그리고 나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안다. 내가 스스로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내가 남들보다 죽음에 대해 더 오래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이전 글들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나는 허무주의를 내면화한 극강의 회피형이다. 그 어떤 삶을 살았든 모든 인간은 절멸하고, 대단한 이들도 죽음 앞에선 다를 바 없이 잠시 스친 우주의 먼지일 뿐이다. 20대 초반에 이 사실을 깨닫고 난 후부터는 내내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끝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끝이 언제 어디서 날지 모르기 때문에 내일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시간을 보내야 했다. Memento mori, Amor Fati, Carpe diem. 죽음을 기억해, 운명을 사랑해, 오늘을 살아.
아무것도 의미가 없으므로 모든 게 의미 있을 수 있다고 스스로 세뇌했다. 하지만 죽음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전략적으로 이용하려 해도 가까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혜킬은 라틴어로 된 고대의 세 가지 진리를 품고 해탈한 현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나에겐 능력 밖의 일이었던 것 같다. 인생을 이끌어가고 싶었던 개똥 철학자는 여기저기 십여 년을 치이며 그저 좀 더 피곤한 개똥 철학자로 자랐다. 인생에 끌려다니는 건 덤이다. 요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안 그렇겠냐마는 죽음을 업고 있는 내 하루는 '깨어남'이 보다 '잠듦'에 더 무게를 싣는다. 인간은 매일 가상의 죽음과 가상의 부활을 체험하도록 설계되었고,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가상의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 중 하나가 되었다.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 깨어나도 기쁘지 않은, 깨어나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로 잠에 든다.
문득 죽음에 관한 답 없는 물음표가 하나 떠올랐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한 현재의 불행을 감내하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 어느 날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와 그 순간 중요한 것이 아니어버리게 된 것에 몰두하다 생을 마감하게 되면 얼마나 억울할까. 회피형 액션 플랜을 짰다. 계산한다, 눈치를 본다, 시작하지 않는다, 도전하지 않는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상황 회피뿐 아니라 감정 회피도 밥먹듯이 하게 됐다. 논리와 이유는 또다시 죽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차피 죽으면 끝~ 지옥에서 만나요~ 엄청나게 뜨겁거나 차가운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면 곧장 죽음을 생각한다. 뒤집어지게 기뻐하고, 와장창 슬퍼하고, 싸르르 분노하고, 엉망진창 후회할 필요가 없다."
라고 스스로 세뇌하며 살았다.
-
특히 최근 도처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음을 더 실감한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내가 타고 있는 택시가 무아지경 사 차선을 넘나들 때, 그리고 그것이 암묵적인 규칙인 양 다른 차들도 똑같이 움직일 때, 입맛이 없지만 위에 뭐라도 집어넣어야 할 것 같아 억지로 식사를 하곤 소화가 안된 채로 잠이 들 때, 시야를 흐리고 있다가 귀신에 홀린 듯이 빨간 불의 신호등을 건너려 할 때, 분명한 이유 없이 심장이 꽤 오랫동안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을 때, 일방통행로를 역주행하는 오토바이가 코 끝을 스쳐 지나갈 때, 갑자기 주변의 소음과 기운에 압도 당해 밑도 끝도 없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낄 때, 대충대충 계단을 오르는 중 난데없이 무릎에 힘이 풀려 뒤통수를 깰 뻔할 때, 숨 쉬는 법을 까먹고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질 때, 자꾸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릴 때.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고 하지 않나, 준비된 자는 보이지 않는 공기의 변화를 냄새로 맡을 수 있다. 지금이 바로 생을 마감할 기회인가?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이젠 또 죽고 싶지 않아 졌다는 거다. 어쩌면 나는 언제나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죽음의 기운은 준비되지 않은 자가 마침내 두려워하는 법을 깨닫자 무겁게 짙어졌다. 뭐든 갖고자 하면 멀어지고 잃고자 하면 성큼 다가오는 우주의 진리처럼.
두 번의 자기 세뇌를 발견했다. 반전의 반전은 곧 원점이다. 살고 싶게 된다면 뭔가 더 흥미진진하고 강렬한 이유에서 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라고 해야 할지 허무하다고 해야 할지 실소를 터트려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까닭으로 죽음이 무서워졌다.
재난을 다루는 영화와 가족을 다루는 영화를 특히 좋아하지 않는다. 재난과 가족을 동시에 다루는 영화는 말할 것도 없다. 눈물을 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짜게 만드는 것 같은 부자연스러운 소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재난 같은 해에 가족들의 존재감이 뾰족하게 파고든 바람에 그 억지스러움이 실은 너무 노골적인 것이라 눈물이 절로 짜지는 것임을, 그리고 나는 그런 불가항력의 감정을 마주하기를 겁낸다는 걸 알아내버렸다. 그들에게 나도 느끼기 싫은, 너무 원시적이고 일차원적이라 격렬할 수밖에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영원히 슬플 것이다. 슬프게 하고 싶지 않다. 영원히 편히 잠들지 못할 것이다. 잠 못 들게 하고 싶지 않다. 그 생각만 하면 갑자기 살고 싶어 진다. 쓰면서도 웃긴 말인데, 효도하고 싶어서 죽고 싶지가 않다.
내가 무슨 철학과 고집으로 살든 죽든, 우주의 안중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 이다음에 용기가 나 가족들에 대해 자세히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멸종하지 않으려면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