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킬이 씁니다
내가 가진 여러 가지 방어 기제 중엔 '유머'가 있다. 몇 번 언급했지만 나는 자기 희화화를 즐기는 광대다. 나의 웃긴 모습도 웃기게 말하고 남이 듣기엔 유쾌하지 않을 법한 개인적인 일도 웃기게 말하는 걸 좋아한다. 성인 adhd를 진단받게 된 이야기가 내가 생각하기엔 웃긴 것 같아서 적어본다.
지난 글에서 쓴 adhd 모임은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지원금으로 두 번 전문가를 초빙해 짧은 강의를 듣고 두 권의 책을 구매하기로 했다. 순 님은 기획서에 작성한 대로 정신과 의사 선생님을 초빙하고 adhd 대처 기술에 관한 책을 함께 읽어보자고 했고, 아직 진단을 받기 이전이었던 나는 도대체 adhd가 무엇이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했기 때문에 격렬하게 동의했다.
의사 선생님은 순 님의 담당 의사였고, 어렵게 시간을 내 모임을 찾아주셨다. 그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참석하고 제시간에 오는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강연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일반인들은 보상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파민 분비와 수용체 간의 상호 작용이 원활하게 일어난다. 도파민은 어떤 일을 성취할 때도 분비되지만, 반복된 성취를 학습함으로써 성취 이전일 때도 분비된다. 따라서 도파민은 동기 부여로 이어지는 자극 호르몬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adhd를 진단받은 이들은 도파민 등 보상 호르몬 분비의 불균형 발생 또는 해당 호르몬들의 수용체들이 부족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문제를 겪는다. 때문에 집중 및 집중 유지의 어려움, 혹은 과도한 집중, 비조직화와 건망증, 불안정함과 끊임없는 활동, 충동성, 감정 조절의 어려움 등이 발생하며 더 나아가 조증, 우울증, 불안 증세 등이 함께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일상에서 반복되는 크고 작은 성취 및 보상 체계가 습득시키는 규칙적인 부지런함과 소확행의 짜릿함이 이들에게는 쉽게 체화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설명의 대부분이 나에게 해당되었다. 대표적으로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금융치료도 잘 먹히지 않는다. 목표나 목적의식이 뚜렷하게 없었다. 흥미롭지 않은 일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에 해결했다. 계획을 세우는데 서툴고 중구난방으로 일처리를 한다. 뭐든 금방 잊는다. 몸도 마음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갑자기 확신에 차 이리 튀고 저리 튀다 쉽게 식어버린다. 다행히 지금까진 adhd 특성으로 말미암은 큰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성인이 된 이후론 정말로 내 손에 남은 인생이 달렸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온 정신을 모아 스스로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강연이 끝나고 선생님께 현재 항우울제와 항불안제, 신경 안정제를 복용하고 있다고 알리며 adhd 검사를 하고 약을 복용해도 될지 물었다. 선생님은 adhd가 다른 정신 질환을 동반할 가능성이 높아 오히려 함께 치료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 말했고, 바로 며칠 후 정신과 진료에서 내 담당 선생님께 adhd 검사를 요청했다. 선생님은 다음 주 진료에 20분 정도 일찍 오라고 말씀하셨고, 여지없이 그 말은 잊은 나는 예약 시간에 맞춰 병원을 방문했다. 약속을 깜빡 잊어 부끄러워하며 adhd 자가 진단 검사표를 받았고 간호사 선생님은 오래 생각하지 말고 문항들에 답하라고 하셨다.
이 부분부터가 좀 웃기다. 30-40개 정도의 모든 문항은 다섯 개의 척도, '전혀 그렇지 않다'부터 '매우 자주 그렇다'까지 중 선택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이런 종류의 검사들이 보통 총점으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왕 검사를 하게 되었으니 최대한 객관적인 나의 상태를 알고 싶었고, 최대한 보수적으로 질문들에 답했다.
체계가 필요한 일을 해야 할 때 순서대로 진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까?
항상 그렇진 않지. 중간! '약간 혹은 가끔 그렇다'에 체크.
약속이나 해야 할 일을 잊어 곤란을 겪을 적이 있습니까?
자주 그렇지도 않아. '약간 혹은 가끔 그렇다'에 체크.
골치 아픈 일을 피하거나 미루는 경우가 있습니까?
내가 회피형이라도 항상 그렇진 않은데. '자주 그렇다'에 체크
오래 앉아 있을 때 손을 만지작 거리거나 발을 꼼지락 거리는 경우가 있습니까?
이건 '매우 자주 그렇다'에 체크.
질문들에 답하면서 '보통 사람들도 조금씩은 다 이렇지 않은가?'하고 생각했다. 검사를 마치고 몇 분 지나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검사를 해보니 어땠냐고 소감을 물었다. "저는 옛날부터 제가 조금은 adhd 성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평생 이렇게 살아와서 그런지 크게 불편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시곤 말을 이어갔다. "어떤 분은 adhd 성향이 작게 나와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시기도 하고 어떤 분은 adhd 성향이 크게 나와도 불편함을 호소하지 않으시기도 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모니터를 내 쪽으로 휙 돌렸다. "근데 혜원 님은 만점이에요!" 고작 두 문장에 불과한 그의 함축적 스토리텔링에 나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역시 나는 뭐든 잘하는군.
그는 장치 등을 이용해 정확하게 adhd를 판별해 내는 검사는 아직 없으며 문진과 증상을 종합해 진단을 내리게 되고 방금 실시한 문진 검사는 결과의 총점으로 환자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의 답변이 색이 칠해진 특정 범위 안에 있으면, 예를 들어 '약간 혹은 가끔 그렇다'에서 '매우 자주 그렇다'의 범위 내에 있으면, 추가 검사가 필요한 방식의 검사였음을 설명했다. 내 답변은 모두 색이 칠해진 칸에 자리하고 있었고 내 기억에도 '전혀 아니다'와 '거의 그렇지 않다'에 체크한 적이 없었으므로 바로 그 자리에서 20여 개의 추가 문항에 답했다.
'어릴 적 수업 시간에 자주 집중을 하지 못했습니까?', '어릴 적 유별난 행동을 했습니까?', '준비물이나 숙제를 자주 잊었습니까?' 등 질문이 이어졌고, 혼자 진행했던 검사 답변들과 비슷하게 답했다. 역시나 만점에 가까운 결과가 나왔다. "선생님 제가 학부모 참관 시간에도 졸 정도로 수업에 집중을 잘 못했어요." 하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그는 인자하게 웃으며 "왜 그랬던 것 같아요?"라고 물어왔고 나는 오른쪽 왼쪽으로 눈알을 굴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선생님은 "재미없었죠?"라고 질문했고 나는 한 번 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알고 있는 것처럼 adhd가 도파민 분비 및 수용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현재 앓고 있는 우울증이나 무기력증을 동반하거나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으며 약을 복용하면 각성 효과로 동기 부여와 의욕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이라 말했다. 약효는 8시간 정도 지속되며 심박수 증가나 메스꺼움 등의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으니 필요시 추가 약물을 처방해 주시겠다고 했다.
콘서타를 며칠 복용하니 그의 말대로 커피를 마신 것처럼 졸음이 가셨고 브레인 포그가 걷히는 듯했다. 몸이 적응을 좀 한 듯한 요즘은 약효에 꽤 만족하고 있다. 나름 성공적인 adhd 인간으로의 정체화였다. 그러나 순 님의 모임에서 구입한 '성인 adhd의 대처 기술서'는 두껍고 지루해 아직도 읽지 못했다. 세 페이지를 넘기질 못한다. 과연 콘서타가 뒤집어지는 효과를 발휘하는 마약이 아니기 때문에 안 하던 짓을 하는 등의 대단한 변화를 기대해선 안된다. 정식으로 진단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항우울제와 콘서타 간의 복용량을 조절하고 있고, 그래서 매일의 느낌이 조금씩 다르다. 앞으로 얼마간 더 살아보고 복용 이전과 후의 삶에 대한 글을 적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