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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파리 Jun 27. 2024

절전모드

혜이드가 씁니다

작년 내 블로그에 썼던 문장이 있다.


'나이 먹으면서 깨달은 것은 시간이 빨리 간다는 것, 근데 내 시간이 더 빨리 간다는 것? 그런데 그렇게 느끼는 것이 나만 그렇다는 것 = 문제가 있다는 것?'


 미미한 점들이 연속으로 이어져 가느다란 선을 만들어 내는 게 인생이라면 내 인생은 점과 점 사이가 꽤 먼 점선이다. 나는 다들 이런 줄 알았다. 이름을 잊어버리고, 제목을 잊어버리고,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고, 주소를 잊어버리고, 숫자를 잊어버리고, 번호를 잊어버리고. '이런 일이 있었지~ 그때 이런 기분이었지~'도 1년 뒤면 잊어버리고 만다. 그게 아무리 강력한 것이었더라도. 아무래도 시간 감각은 기억'력'이나 체'력'과도 관련이 있다. 힘! 힘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내 시간이 남들보다 더 빠르게 흐른다는 걸 근육과 관절이 먼저 느꼈던 것 같다. 시간이 점점 더 급하게 흐른다는 것은 어쩌면 빠르게 낡아가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간 감각이랑 힘이 무슨 관계가 있냐, 지난 내 인생을 이루는 작은 점들의 모임을 최대한으로 기억해 낼 수 있는 게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난 10분 동안 뭐 했지?'에서 10분의 가치를 하는 것을 했는가, 그리고 그것이 기억이 나는가, 앞으로 10분 동안 무엇을 할 것이고 그걸 성취할 수 있는가, 그것이 시간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나는 하루 종일 사람들과 대화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꽤나 사교적이고 낯을 가리지 않는 나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이 많이 든다는 것을 너덜너덜 해진 뒤에야 깨달았다. 그다음부터는 스스로를 과도하게 소모하지 않기 위해 하루의 70퍼센트 이상을 '절전 모드'로 산다. '절전 모드'의 좋은 점은 굳이 큰 힘들 들이지 않고 뇌를 쓰지 않고, 익숙한 것들을 숨 쉬는 것처럼 자동으로 쳐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집중이나 긴장을 할 필요가 없어 하루 종일 졸리고 멍하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1분 1초 뭔가 하긴 하지만 문득 돌아보면 한 게 없다. 점가 점 사이가 멀다 보니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인지가 잘 안 되기도 한다. '오늘 점심 뭐 먹었지?' 하루가 그냥 가버린다.


 내 과거를 가만히 회상해 보려 하면 흐린 점선 같은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난 십 년간에 있었던 그 많은 별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뉴진스의 하입보이요. '내 지난날들은 눈 뜨면 잊는 꿈~'. 절전 모드로 살면 순간순간 깊이 있는 의미 부여나 탐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벌써 29년이나 살았다는 것이 신기하다. 내 지식이나 자아는 아직 고등학생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인간이 깊이를 지니려면 충분한 시간과 몰두가 필요하다. 성공하는 똑똑한 '이상적'인 사람들은 늘 시간 감각과 시간 분배 능력이 뛰어나다고 배웠다. 게다가 대부분 기억력도 좋고 집중력도 훌륭하다. 아무래도 나는 이상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좀 있다. 최근에 기회가 생겨서 성인용 지능 검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항목에 비해 순간 기억력이 조금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는 그것을 어떤 시간 위에 있는 순간을 인지하고 유지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뒤돌아서면 까먹는다. 물리적인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나아가지만, 내 뇌가 세는 시간은 아마추어 러너가 인터벌을 하듯 뛰다가 걷다가 기다가 한다. 어찌 됐건 난 시간에 몸을 맡기고 나이를 먹게 되어있다.


 그래도 가끔 꽂히는 게 생기면 '절전 모드'를 끄고 뇌를 쓴다. 그러면 드디어 몰입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데,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한 번 몰입 상태에 돌입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한 시간이 십 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머릿속엔 생각들이 소용돌이치고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순위가 시도 때도 없이 바뀌고, 사방팔방 꼬리에 꼬리를 물고 뇌절에 뇌절을 거듭한다. 기본적으로 완벽한 형태의 선이나 형태를 그리기 위해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촘촘하게 점을 찍어야 한다던가 하는 법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한다.


 일단 느낌이 왔으니 이리저리 점을 찍긴 하는데, 한붓그리기 퀴즈 같은 점들이 먼저 찍힌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모양이 나왔지? 아무렇게나 점을 찍다가 나도 길을 잃는다. 어떤 점에서 어떤 점으로 이어가야 할지 까먹는다. 피곤하게 뇌는 굴리는데, 끝엔 그냥 다 흩어져 버린다. 처음에 생각했던 모양이랑 다른 형태로 가고 있는데도 멈추지 않는다. 체감 한 시간, 실제 다섯 시간짜리의 마음에 썩 들지 않는 묘한 모양의 흐린 선이 완성된다. 짜잔~ 어쨌든 하긴 했잖아~


 나는 이상한 완벽주의가 있고, 그래서 내가 열심히 한 것에 대해서는 누가 봐도 잘 한 모양을 내보이고 싶어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게 잘 안된다. 그리고 심지어는 뇌를 풀가동 시킬 수 있는 '피버 타임'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최초의 '찍먹'에서만 뇌를 열심히 쓰고, 다음에 비슷한 일을 할 때가 오면 그새 지겨운 일로 여겨 인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얼렁뚱땅 별 볼일 없는 결과를 내놓는다. 이런 내가 불만스러워도 이젠 그냥 인정하는 연습을 해야 현상 유지라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냥 잘 자고, 잘 먹고, 운동을 하고, 비타민을 챙겨 먹는 일 따위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다. 그마저도 쉽지 않아서 문제지만. 하여간 아무렇게나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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