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킬이 씁니다
인생을 놀이공원에 비유하는 걸 좋아한다.
9살에는 온 가족이 에버랜드 연간 이용권이 있을 정도로 놀이공원에 자주 갔다. 아빠는 토요일까지 일하는 자영업자, 엄마는 일주일에 7일 쉼 없이 일하는 가정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빡빡한 공부 스케줄을 소화하기 바쁜 어린이 둘을 위해 2주에 한 번은 꼭, 일요일 오전에 좋아하는 옷을 입고 의정부에서 용인까지 꼬박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아빠 차를 타고 에버랜드에 갔다.
오전 11시쯤 에버랜드 주차장에 도착하면, 입술에 김 묻은 얼굴 사진이 인쇄된 플라스틱 연간 회원권을 목에 걸고 마치 에버랜드의 주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당당하게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 당시 연간 회원권이 얼마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커서 계산해 보니 적은 돈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때도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입장하고 나면 일반 방문객과 다를 바 없다.
줄을 서서 포토스팟에서 사진을 찍고, 줄을 서서 화장실에 가고, 줄을 서서 비싼 간식을 사 먹고, 줄을 서서 '지구 마을'을 타고, 줄을 서서 비싼 돈가스와 우동을 먹고, 줄을 서서 '오즈의 마법사'를 타고, 줄을 서서 퍼레이드를 구경하고, 줄을 서서 동물용 건빵을 사 북극곰에게 던져주고, 줄을 서서 '바이킹'을 타고. 나는 자랑스럽게도 바이킹을 탈 수 있는 용감한 어린애였다. 다시 줄을 서서 '사파리 월드'에 들어가고 줄을 서서 곤돌라를 타고 출구로 돌아왔다. 진심으로 갖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일종의 전리품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동물 인형이나 요술봉 등을 조르고 졸라 줄을 서서 계산하고 저녁 9시경 집으로 출발했다.
사실 놀이공원에 있는 내내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츄로스가 아무리 비싸도 나는 츄로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는 건 다리 아픈 일어있고, 몇 시간씩 내 차례를 기다리는 것은 인내심 없는 어린이에게 아주 고역이었다. 엄마가 범퍼카라도 타자고 하는 날엔 정색을 하고 타기 싫다고 했다. 나는 바이킹을 탈 수 있는 용감한 어린애였지만 범퍼카는 도저히 즐기는 척할 수 없는 무서운 놀이기구였다. 전속력으로 운전해 일부러 모른 사람의 차를 박는 게 놀이라니! 그래도 아빠랑 같이 탈 때는 괜찮았다. 아빠는 이리저리 차들을 피하며 안전하게 운전했다.
하지만 매번 에버랜드에 갈 때마다 최대한으로 행복하다는 듯이 행동했다. 다다음주 말고 다음 주에도 다시 오고 싶었으므로. 오늘과 별 다를 일 없는 반쯤은 신나고 반쯤은 피곤한 하루를 보내겠지만 그럼에도 놀이공원은 늘 다시 오고 싶은 곳이었다. 매일 하기 싫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척하는 것보다야 다리가 아프고 졸리지만 신나는 척하는 게 훨씬 좋았다.
10살 이후로는 놀이공원을 갈 일이 거의 없었다. 학교에서 현장학습 겸으로 갈 땐 무슨 일이 생겼고, 더욱더 공부에 매진해야 할 두 자릿수 나이가 되었으므로 엄마는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 시간을 많이 주지 않았다. 그래도 가려면 갈 수 있었을 텐데 엄청나게 좋아하진 않았나 보다.
성인이 되고 나선 나름 자주 놀이 공원에 갔던 것 같다. 에버랜드도 다시 가고, 롯데월드도 가고, 유니버셜 스튜디오, 디즈니 랜드도 가봤다. 보통 오전 11시쯤 들어가서 마감하기 직전인 9시경에 나왔다.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를 얻었음에도 굳이 오픈 시간에 맞춰 입장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스무 살 이후의 놀이공원도 어린 시절의 그것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줄을 서고, 서고, 또 서고. 기다리는 일이 거의 전부였다. 기구를 타는 시간은 길어봐야 2분이다. 마감까지 하루에 5개 정도 탈 수 있었던 날이면 "그래도 많이 탔다~"하고 너덜너덜하지만 만족스러운 기분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서론이 길었다. '인생은 놀이공원이랑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일단 꽤 비싼 돈을 내고 들어왔으니 뽕을 뽑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바쁘게 돌아다니지만 결국은 짜릿한 몇 분을 위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분속 3미터 정도의 속력으로 움직이게 된다. 뜨거운 태양 아래 가만히 서 있을 땐 좀 불쾌해지기도 하고, 너무 붐벼 사람들과 부딪힐 땐 짜증도 좀 나고, 나는 타기 무서운 놀이기구를 친구는 타고 싶어 하면 서로 멋쩍어지기도 하면서.
그래도 다행인 점은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왔다는 것이다. 그들과 밀린 수다를 떨고, 줄이 그늘로 이어질 땐 다행이라고 여기고, 배가 고파지면 일행 중 누군가 살짝 빠져나가 간식을 사 오고, 놀이 기구를 타면서 실컷 소리를 지르다가 너무 재밌었다고 박수 치며 다른 놀이 기구를 타기 위해 걷는다. 아무리 지겨워도 우리는 꽤 큰돈을 내고 들어왔고,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뭘 해도 즐겁다.
살면서 짜릿한 순간이 몇 번이나 있을까. 그리고 그 순간이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엄청 많고 엄청 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그런 것들은 강렬해야 하거든. 성공! 승진! 명예와 부! 성장과 자아실현! 그리고 그런 위대한 것들을 더 빠르게, 더 완벽하게 실현하고자 집착하면 오히려 안 행복해진다.
줄에서 같이 기다리던 친구가 물어본 적이 있다. "언니, 언니는 미래의 행복을 위한 현재의 불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대충 기다리다 보면 놀이기구는 타게 되어 있다. 기다리는 시간이 불행하다고, 원하는 놀이기구의 줄이 너무 길다고 마음이 조급해지면 온 하루가 다 망가져 버린다. 억지라고 느껴지더라도 즐겨야 이득이다. 인기 놀이기구 대신에 선택한 유치한 놀이기구도 막상 타면 깔깔 웃게 되어 있다. 놀이 기구를 많이 타야만 의미 있는 나들이가 되는 것도 아니다. 평소에 즐기지도 않는 값비싼 츄로스를 단지 기분 내려고 2개나 먹고 기분이 좋았다면 그걸로 된 걸 지도 모른다.
난 무교지만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는 종교들에는 관심이 간다. 좋든 싫든 태어남은 아주 비싼 기회고, 죽음 이후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시 살아가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인생은 다시 살아보고 싶은 것이어야 한다. 이번 생에서 어떤 식으로든 뽕을 뽑는 것, 그건 오직 '나'들만이 할 수 있다.
놀이공원에 도착하면 오전 11시, 폐장 시간까지 최선을 다해 놀다가 퇴장하는 시간은 오후 9시. 총 10시간. 사주 상 나는 오래 산다고 했으니 100살까지 산다고 치자. 인생 10년은 놀이 공원에서의 1시간이다. 1년은 6분, 한 달은 12초 정도다. 지금까지 28년 하고 7개월 조금 덜 살았다. 삶이라는 놀이공원에 입장한 지 2시간 49분 24초 조금 덜 되었다. 오후 1시 49분 24초째를 살고 있다. 요즘 하루하루가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놀이 공원에서도 가장 견디기 힘든 대낮을 지내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얻는다. 폐장까지 시간은 한참이나 남았고, 조금 있으면 딱 기분 좋게 시원해질 거다. 일단 태어났으니 숨 크게 들이마시고 입꼬리를 올린다.
환상의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부디 즐거운 인생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