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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운 Jun 18. 2024

초여름을 사랑해


여름이 시작되면 풀냄새가 코끝에 맴돈다. 배를 부풀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쉰다. 가까스로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난다. 감각이 하나둘 이곳으로 돌아온다. 소란스러운 아이들 웃음소리, 가게를 여는 자영업자의 한숨, 차도를 가로지르는 오토바이 엔진소리. 미지근한 바람이 목덜미에 달라붙는다. 이내 땀구멍이 활짝 열리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양산을 쓸까 말까 한참 고민한다. 따가운 햇볕이 팔에 닿는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아 그냥 걷기로 한다.


나는 초여름의 분위기를 사랑한다. 모든 풍경의 채도가 높아져 시야가 선명해지는 것 같다. 푸른 나무들은 땅보다 하늘에 가까워 보인다. 갈라진 나무기둥을 보며 지나간 여름들을 떠올린다.


언젠가 장마철에 축축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변을 걸었다. 면바지가 허벅지에 끈질길게 달라붙었던 것처럼 그때의 기억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 명랑하게 뛰어오는 강아지에 기억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파도소리가 잦아들고 다시금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앞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여름의 나무만큼 사랑한다고 말해줄 거라 굳게 다짐하며, 걷고 또 걷는다.


여름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그래서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곱씹기 딱 좋은 계절이다. 먼 과거를 그리워하면 괜히 슬퍼지기에 어제를 곱씹어 보려고 한다. 낮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 연락을 잘 안 하던 친구라서, 그가 남긴 부재중이 꼭 재난문자 같았다. 긴 신호음 끝에 전화를 받았다. 괜찮아? 친구의 물음에서 막대한 애정이 느껴져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당연히 괜찮지. 오래 본 사람을 속이는 건 쉽지 않다. 그는 쾌활한 말투에서 우울을 발견해냈을 거다. 우리는 조용히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전화를 끊기 직전에 친구가 사랑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마주보고 있었더라면 열 손가락을 말며 오글거린다고 말했겠지. 아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의 말투가 축축해 울어버렸을 수도 있겠다. 내년 여름에는 민망하다는 듯 웃던 친구의 웃음소리를 떠올릴 거라 확신하며 여름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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