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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운 Jul 17. 2024

여름의 물약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비가 올 것 같지 않아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그러나 기상청이 예측한 것과 다르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장마 기간에는 비가 오든 안 오든 우산을 갖고 다녀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걸을 때마다 우산이 바닥에 부딪혀 딱, 딱 소리를 내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 또, 우산의 끝부분을 닳을까 전완근에 힘을 주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잘 주워 담아서 집에 가는 게 최종 목표인 날이었느니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걷기 시작한 지 5분쯤 되었을까.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횡단보도 근처에는 비를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일단 햇빛 가리기용 파라솔 아래에 서있었다. 그러나 파라솔은 햇빛을 가리기에 적합한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 얇은 천으로 거센 빗줄기를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내가 살면서 비를 맞아 본 적이 있었나. 절대 없다. 하물며 나는 탈모가 올 수 있다고 이슬비가 내려도 편의점에 뛰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만큼은 비를 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인지 오늘인지 혹은 내일인지 헷갈릴 정도로 비슷한 일상이 지루하던 참이었다. 일상에 작은 변화라도 좋으니 새로운 일이 벌어지길 원했다. 그것이 비를 맞는 일일지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의 내게 말해줄 것이다. ‘당장 뒤돌아 편의점에 가서 투명 우산을 사. 오천원 정도 쓸 수 있잖아. 아니면 버스를 타.‘ 하지만 나는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 오늘 하루를 반성하고 내일을 다짐하며 잠 드는 루틴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요즘 내 하루가 너무 뻔하고 무거웠으니까. 내 손으로 직접 무너뜨릴 수 없다면 비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정도 비는 맞을 수 있다며 호기롭게 걸음을 옮겼다. 갈수록 빗줄기가 거세졌고 길가에는 나밖에 없었다. 한 여름밤의 일탈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건 너무하지 않나. 길 양쪽으로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얼키고 설킨 나뭇잎이 비를 막아주었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서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낭만은 개뿔. 얼른 집에 가서 이불을 깔고 눕고 싶었다.


일단 달려 보자. 최근까지 러닝을 했으니 5분 정도는 달릴 수 있지 않을까.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10시간 근무로 피곤해진 몸과 습한 공기가 만나면 신체 기능이 일시적으로 노화된다. 축 처지는 몸을 어찌저찌 일으켜 1분 정도 뛰었을 때,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에선 비 맞는 장면이 낭만 있어 보였는데 다 연출이었나.


그러다 우연히 길가에 있는 스티로폼을 발견했다. 꼭 나를 위해 준비해 놓은 소품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스티로폼 상자를 들어 비를 막았다. 팔과 다리는 축축하게 젖어갔지만 적어도 얼굴은 보송해지고 있었다. 무선 이어폰에서는 변우석 배우가 부른 <소나기>가 재생되고 있었다. 타이밍 끝내준다.


부모님이 홀딱 젖은 나를 보며 기겁했지만, 처음으로 개시한 반팔티가 빨래통에 처박혔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가벼웠다. 만약 집으로 오는 길 내내 우산을 못 챙겼다고 자책했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힘이 빠진다. 삶에는 예상치 못한 일 투성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건은 발생하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예전에 친구가 해준 말이 있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을 살짝 바꿔주면 된다고. 그렇다면 나는 장맛비를 맞으며 여름 밤을 즐긴 사람쯤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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