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첫째가 하원하며 가방에서 꼬깃꼬깃한 리씨(Li xi)를 꺼내 보여줬다. 이 아이 가방에는 성한 것이 당최 하나도 없다. 유치원 다닐 때야 꼬깃한 종이들(곧 쓰레기통으로 고이 옮겨갈 것들)이 귀엽기라도 하지. Grande 1인 첫째는 여전히 학교에서 받아오는 모든 것들을 대충 구겨 가방에 쑤셔 박는다. 숙제로 받아온 종이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미술 작품들 심지어 상장마저도 책가방 아래 구겨져있다. 양말은 왜 그렇게 벗어재끼는 건지. 매번 책 아래 호떡처럼 뭉개져있는 양말을 발굴해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첫째에게 큰 소리를 낼 수가 없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 모든 행동이 어릴 적 나와 정말 소름 돕게 똑같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에게 혼났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열에 아홉은 정리정돈 때문이었다. 방 정리, 가방 정리, 머문 자리 정리, 입고 난 옷 정리, 설거지 후 그릇 정리. 마흔을 한 살 앞둔 지금도 냉장고 정리로 잔소리를 들으니 말 다했지 뭐. 그런데 조금 억울한 것도 있다. 내가 정리를 못하는 것도 있지만 우리 엄마가 또 유달리 정리에 강박이 있는 사람이다. 이 둘이 한 집에서 몇십 년을 지지고 볶았으니. 내가 그 답답함과 스트레스를 누구보다 잘 안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혼났던 그 억울한 기분. 그러니 내 딸에게 큰 소리를 칠 수가 없다. 너도 나이를 먹으며 잘 다듬어지겠거늘 하는 중.
리씨 얘기하려다가 정리에 강박 있는 우리 엄마얘기까지 흘러갔네. 다음 주부터는 베트남의 가장 큰 명절인 뗏(TET) 연휴가 시작된다. 뗏은 베트남의 설날로 한국과 비슷하게 가족들이 고향에 모이고, 어른들께 새해 인사를 드리며 한 해의 건강과 복을 기원하는 날이다. 그리고 한국의 세뱃돈처럼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봉투에 용돈을 담아 주는데 이것을 리 씨라고 한다. 우리 아이들도 매년 뗏이면 학교나 유치원에서 리 씨를 받아온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나 몇몇 상점에서도 리 씨를 나눠주는 것을 보면, 이 나라는 정말 아이들에게 참 따뜻하다.
마침 어젯밤에 Tomorrow is New Year's Day (내일은 설날)이라는 책을 자기 전 독서로 읽었다. 시기에 맞춰 읽어주려 일부러 준비했던 것은 전혀 아니고.(제가 또 그렇게 열정적인 엄마는 못됩니다.) 책꽂이의 많은 책들 중에서 마침 우연찮게 눈에 띄었다. 이 책은 3년 전 인터내셔널 데이 행사를 준비하며 산 책인데 해외에 살고 있는 만 4세- 6세 아이들에게 읽어주기 딱 좋다.
책의 저자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한국의 문화적 배경을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알려주고자 책을 썼다고 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매일 가는 스타벅스에서의 하루하루를 묶어 ‘스타벅스 일기’라는 책을 낸 작가가 생각이 났다. 남들이 그냥 흘려보내는 일상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콘텐츠로 만들어내는 이런 엄마들, 내가 정말 존경한다.
책을 읽어주는데 세배라는 단어가 생소했던 첫째가 내게 그 뜻을 물었다. 리씨(Li Xi)와 바잉쯩(Banh Chung)은 잘 알면서 아직도 세배가 뭔지 모른다고?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한국 나이 8세인 우리 딸을 보는데 경기도 하노이시인줄 알았던 우리의 배경이 베트남 하노이로 바뀌었다. 넓게 키우려고 국제학교에 보냈으면서 아이들이 세배나 송편 같은 것들은 자연스럽게 알 것이라는 당연한 기대를 했었나 보다. 가정 안에서 지도해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구나, 내가 조금 더 수고스러워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번 뗏에 베트남 중부 로드트립을 하기로 했다. 당장 내일 출발이라 마음이 붕 뜬 걸까. 요즘 안팎으로 행사가 많아서일까. 아니면 다음 달 이사에 둘째 학교 전학에 큰 결정할 것들이 있어서일까. 첫째의 착잡한 책가방으로 시작해서 책 소개에 경기도 하노이시에 사는 엄마의 반성으로 끝난 뭔가 두서없는 글이 될 것 같지만. 어찌 되었든 떠나기 전에 글 하나를 마무리하니 기분은 좋다.
그럼 저는 이만 여행 후에 보다 상쾌한 머리로 돌아오겠습니다. 해피설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