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의 일기
내가 한 몇백년 전 조선에 태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스물 넷정도의 나이에 여자라는 조건을 걸면 벌써 아이를 낳아도 서넛을 낳았을 것이고. 외국에 나와서 공부하는 것은 꿈조차 꾸지 못했을 것이다. 양반집에 태어났을지, 일반 평범한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났을지는 모르겠지만, 탄생과 동시에 내가 가질 직업, 믿어야 하는 종교, 반려자, 평소에 먹고 살아야 하는 음식 등 내가 살아갈 삶의 형태들이 거의 모두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주어진 것 이외의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선택하고자 노력하는 자체가 말그대로 '이단'이자 '반역' 행위 였던 세상이 불과 몇백년 전이다.
현대 사회는 그러한 '이단,' 선택하는 것을 강요하는 사회다. 가장 근본적인 의식주의 문제 부터, 뭐해서 먹고 살지도 내가 정해야 한다. 선택의 확장범위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가장 커다란 예는 결혼제도이다. 옛날에는 나이가 차면 결혼 또한 부모님의 추천에 의해 비슷한 신분의 사람을 만나서 자연스럽게 진행이 되었는데, 이제는 결혼 여부, 상대방의 직업, 나이, 인종, 종교, 성별 까지 개인의 선택 범위로 들어왔다. 이러한 상황을 재미있게 잘 표현해주는 개념이 'Heretical imperative'인데, 한국말로 직역하면 '강요된 이단'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것 (옛날에는 이단/반역적 행위로 간주 되었던 것)을 계속하기를 강요받는, 강요된 이단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계속 발전하면서, 니체가 말했듯 절대적 하늘의 권위는 땅으로 내려왔고 신은 죽었다. 옛날에는 사회가 내려주는 하나의 믿음을 가지고 그것만 잘 따르면 '옳은/바람직한' 삶을 살수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어떠한 정부도, 사회도, 종교도 개인에 대해 무엇이 옳은 길인지 단언해서 알려줄수 없다. 다른 문화권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A 사회에서 통용되던 상식, 규범이나 예의 범절이 B사회에서는 틀린 것이 될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란, 남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본인에게 의미 있는 것들을, 본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선택하면서 사는 삶이 될것이다. 그렇다면 살기 좋은 사회라는 것은 누군가가 어떤 선택을 했을때 그것을 그대로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사회이지 않을까 싶다. 부족하지만 내 소견으로는 이것이 다름의 존중을 기반으로 개인역량을 꽃 피울수 있게 해주는 민주주의의 기본 토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만,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을 살펴보면, 일단 개인 선택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너무 쉽게 간주하는 것을 볼수 있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개인 공동체적 관점과 보편적 가치에서 너무 동떨어진 선택을 하는경우. 웃긴 예지만 다 짜장면 시키는데 너는 왜 볶음밥 먹으려고 하니 부터 시작해서, 건강한 몸 -> 좋은 성적 -> 좋은 학교 -> 좋은 직장 -> 좋은 반려 -> 자식생산 -> 건강한 자식... 으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대를 이어 이어지는 보편적 가치와 의무, 기대 등을 따라오지 못하거나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한국 사회가 찍는 낙인은 꽤나 가혹하다. 비슷한데 조금 튀게 잘난놈은 너랑 나랑 같은데 뭐가 잘났다고 나서니 해서 정맞고 못난놈은 못난대로 정맞는다. 가족들이 모여 가장 행복해야 할 명절이 스트레스의 원천이 괜히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우리 민족은 꽤 오랜시간동안 단일 민족이 한곳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다른것을 볼 기회가 많이 없었고, 의심없이 공동체적 가치를 따르기에 편안한 곳이다. 나 또한 한국에서 살아온 세월이 내 인생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에 의한 결정을 해야지라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습관적으로 남의 평가를 의식하게 되는 수동적인 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시간 가는 것을 생각하면 어물어물 하다가 나의 인생은 삼십대가 되고, 사십대가 되고, 황혼으로 접어들어가게 될것이다. 그때 가서 나는 왜 이렇게 살았나?를 묻고 인생의 허무함을 이야기 하지 않으려면, 인생의 주인이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 나는 여자니까, 나는 어리니까, 등등의 핑계를 대며 사회의 잣대로 나를 제한하지 말고. 그냥 현재 지금 내가 하고싶은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면서 나의 인생을 살아야 할것이다. 또 나는 운이 좋아 내가 좋아하는것, 그러니까 공부하거나 글을 쓰는 것이 사회의 가치와 일치하는 것이 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도 슬슬 압박이 들어오고는 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은 보통 본인이 좋아하는 것과 사회의 시선사이에서 갈등하고는 한다. 그러니 조금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려면, 나부터 다른것을 틀린것으로 보지 않고. 나를 돌아보고 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다름 안에서 아름다움을 보려고 꾸준히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