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을 왜 하는 걸까

북한 인권, 이름만 들어도 무겁다

by 혜람

대한민국에서 ‘북한 인권’ 일을 한다는 것은 혼돈이다. 오해는 기본값이며, 환영받기 어렵다. 말머리에 붙은 ‘북한’은 오늘 나의 삶을 살기에 바쁜 보통의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이며, 만나서 하는 이야기라고는 돈 들어가는 일 뿐이고 안팎으로 사고를 쳐서 집안 우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먼 친척과 같이 약간은 회피하고 싶기도, 감싸주고 싶기도 한 복잡한 감정을 일으키는 어려운 주제다. 전쟁과 이념 갈등 등의 이유로 ‘북한’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북한 인권’ 활동에 대해 왜 우리의 적국인 북한을 도와주는 것이냐고 비난하고, 외세에 맞서 민족의 ‘자주성’을 지켰다며 ‘북한’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내부 인권 문제도 많은데 왜 굳이 북한을 공격하는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냐고 비난한다. ‘북한 인권’ 논의가 평화와 협력을 방해한다는 말 역시 단골처럼 따라 나온다. 이와 관련해 외교관이나 고위 관료가 아니라면 당사자인 북한 주민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한민국에 정착한 북한 출신 이주민에게 전해 듣는 ‘북한’ 또한 각자의 인생사와 경험에 따라 삼만가지가 넘는 색을 띈다. 그러니 ‘네가 북한을 알아?’라는 말을 듣는 것은 어찌보면 숙명적이다.


같은 ‘북한 인권’ 운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해와 화합을 구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듯,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북한의 ‘인권’에는 매우 다양한 결이 있다. 기본적인 생명권, 자유권, 평등권 및 사회권, 노동권으로부터 시작해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자유의 갈래 역시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이는 또다시 여성, 아동, 장애인 등 인권 취약 대상에 따라서도 구분될 수 있고, 강제 구금, 고문, 납치, 성폭력, 노예화, 박해, 강제 이주, 강제 낙태 등 구체적 인권 침해 항목과 피해의 내용으로도 세분화 될 수 있다. 같은 범주 안에 속해있다고 여겨지더라도 피해자들과 활동가들은 서로를 구분짓고, 무엇이 더 우선 순위에 있는지,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쉽게 반목한다.


외부적인 혼란 외에도, 내부적으로도 역시 끊임없는 질문들과 자기성찰이 계속된다. 장담하건대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무력감과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답이 없는 질문 사이에서의 방황은 끝이 없다. 도덕적인 의심과 회의도 계속 마주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편을 가르고, 어떤 피해자의 편에 설지 선택하며,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상처를 무시하거나 이용하거나, 각자의 논리를 만들어 전시한다. 과연 나는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의심은 늘 함께한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끝이 보이지 않는 괴로운 문제와 오해를 붙잡고 고민하다 보면, 결국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는거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차라리 더 분명하다. 내가 사랑하는 일들로 인해 박해받는 이들의 고통은 타인의 것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북한 인권’을 비롯하여 인간사, 개인사에서 지속적으로 목격되는 모든 혼돈과 반목, 화합과 방황, 모순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다른 생각과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 안에서는 모두가 대체로 안전하다. 자유는 그 자체로 불안정하고 불안하지만,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과 포용력을 품고 있다. 그 품에서 나는 나의 우주를 확장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읽고 싶은 글은 마음대로 읽고, 세계를 누비며 현재를 살아가는 자유인으로 서른 네해를 살았다. 내가 만약 조금 만 더 윗 동네인 북한에서 태어나 이러한 자유를 추구했다면 정치범 수용소 행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가 삼족을 멸하고, 죽음이 오히려 자비롭게 여겨질 정도의 노동을 해서 씻어내야 하는 죄가 되는 일은 참으로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다. 진솔하게 소통하며 자유에서 오는 행복과 공존의 아름다움을 함께 누릴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를 나로서, 너를 너로서, 우리를 우리로서, 온전히 존재하게 해줄 자유를 잃는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본능적인 두려움과 상실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는 내가 모든 혼돈에도 불구하고, 북한 인권 분야를 8년 넘게 떠나지 못한 근본적 이유다.


결국,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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