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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Sep 06. 2024

[동해] 그래, 너는 푸른 바다야

열음방학 06 8월5일-8일

재미있는 아침을 먹었다. 전날처럼 해변가 식당에서 아침을 먹자고 하여 눈여겨보았던 식당 중 한 곳을 들어갔는데 메뉴가 너무 많아 고를 수가 없었고, 결국에는 마음에 든 메뉴는 다 시키고 말았다.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열무냉면, 김치찌개, 그리고 해물파전. 접점 하나 없어 보이는 메뉴를 골라 한상에 올려 두니 그럴듯한 한식 뷔페가 만들어졌다. 이른 아침부터 온천 탕에서 개운하게 목욕재계하고, 뜨신 밥까지 두둑하게 먹으니 오늘 하루도 가열차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이야말로 동해에서의 진짜 마지막 날이다.


친구가 점찍어둔 계곡이 있었다. 날씨로 계획이 어긋나지 않았다면 어제 일정에 껴서 가려고 했던 곳이었는데 여차저차 미루고 엎어지다가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가게 되었다. 그래도 가기는 간다. 내가 계곡과 별로 친하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올여름 계곡을 두어 군데 눈으로라도 구경해 보니까 사람들이 발 담그고 노는 게 여간 재밌어 보이는 게 아닌 거다. 친구가 무릉 계곡 얘기를 꺼냈을 때도 반드시 가보고 말리라는 다부진 마음보다는 어떤 곳인지 둘러보고 싶은 호기심 어린 마음이 더 컸다. 계곡은 자주 가던 곳도 아니었는 데다가 산속에 있으니까 산이나 숲과는 거리 두기를 하며 살던 나하고는 자연스레 동떨어진 공간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수영을 좋아해도 계곡은 안전하지 않고, 사고가 날 위험이 크다는 인식이 더 커서 물놀이 장소로 고려해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올여름 들어서 슬쩍슬쩍 들여다본 계곡은 신기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해서 이번 여행에서도 계곡을 한 번 더 가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언뜻 생각을 하고는 있었던 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얼마쯤 걸어 올라가다 보면 사람들이 이미 이곳저곳에 자리를 펴고,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수심이 깊어 보이는 곳이 몇 군데 보였는데 거기에선 팔 튜브나 구명조끼를 입고 노는 사람들도 있었다. 친구랑 나는 큰 돌바위를 몇 개 타고 넘어가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폈다. 옆에 내려놓은 아이스 박스에는 수박과 간식거리 몇 개를 넣어 두었다. 물에 들어간다고 차 뒷좌석을 뒹굴어가며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심지어 탄탄이 수영복이라서 씨름하듯이 입으면서 땀을 벌써 한 바가지는 흘렸다. 이미 몸은 잔뜩 지치고 머리는 산발이 되었다. 그러니 무조건 계곡에 들어가 찬 물로 더운 김을 식혀야 옳다.

계곡 수영은 언제 마지막에 해봤더라. 정말 어렸을 적에, 초등학교 입학 하기도 전에는 사촌들하고 놀러 다녔을 때나 종종 계곡을 찾았다. 이모부는 돗자리 위에서 꿈뻑꿈뻑 졸고, 우리 아빠는 사촌 동생의 떠내려가던 샌들을 나뭇가지로 주웠다. 파라솔 아래에 누워 있으면 돗자리 아래로 뾰족한 돌멩이가 낮 동안 품은 열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이모와 엄마는 먹거리를 정리하면서 잘게 자른 간식 한 입을 사촌 오빠와 내 입으로 넣어주었다. 집으로 가는 짐을 싸기 전에 우리는 다 같이 모여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엄마의 연한 청바지 자락을 잡고 반쯤 그 뒤에 몸을 숨긴 채 사진을 찍었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 뒤로 더 이상 계곡을 가지 않아 가끔씩 계곡 간다는 친구들 얘기 들으면 요새도 사람들이 계곡으로 놀러 가나, 싶은 의문을 떠올릴 정도였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내 발로 계곡을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계곡 올라오는 입구에서 산 차가운 오미자 차와 미숫가루를 마시고 잠깐 물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계곡 물은 차가울 것 같다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얼음장 같은 차가움이 아니라 찌르르 울리는 기분 좋은 차가움이었다. 아무래도 수영복 갈아입고 계곡 입구까지 올라오면서부터 차곡차곡 쌓인 더위로 이미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버린 것을 계곡 물이 한 번에 씻겨 내려주어서 차가움이 산뜻하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다.


계곡은 희한한 점이 아래 바닥이 들쑥날쑥해 어떤 곳에 발을 디디면 바로 돌덩이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데 또 다음 한 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자신 있게 내딛으면 후욱, 하고 빠져버린다. 그럼 허리춤까지 밖에 안 오는 데도 발 한 번 잘못 굴렀다고 물에 머리끝까지 잠겨 버릴 것만 같은 짜릿한 스릴이 넘실거린다. 물이 자꾸 아래로 흘러서인지, 이끼 때문인지 물기를 머금은 돌 바위는 표면이 젤리처럼 미끄러웠다. 어떤 아저씨가 엄청 세게 뒤로 넘어가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그건 크록스 같은 미끄러운 신발을 신어서인 줄 알았는데 직접 바위에 발바닥을 대보니 표면 마찰이 0에 수렴하는 듯한 극강의 매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엉금엉금 네 발로 기어도 자꾸 쭈르륵 아래로 미끄러져 물로 빠져버리고, 전략을 수정하여 팔 먼저 다리 다음으로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여 보아도 다시 쭈르륵 도로 빠져버린다. 끝까지 다 올라왔을쯤 아차 하는 순간에 다시 미끄러져 맹물을 들이켜면 어이없다가도 계곡의 재미에 무아지경이 되어 버린다.

게다가 무릉 계곡에는 나름의 다이빙 포인트도 있었다. 큼직한 돌바위 끝에서 풍덩풍덩,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이빙하는 아이들이 있어 재밌겠다며 보고만 있었는데 친구가 같이 가보자고 해서 쪼르르 달려가 보았다. 우리는 한 번씩 번갈아 뛰어내렸는데 그래도 우린 애들보다 키도 큰데 바닥에 세게 찧지나 않을까 싶었는데 꼬르륵 가라앉기만 해서 깜짝 놀랐다. 바닥을 차고 나와서 수면 위로 올라오는데 내가 올라온 수면 주위로 뽀글뽀글 거품이 일고 있어 마치 한 마리의 영험한 바다 생물이 된 것만 같았다. 두 번 더 뛰어내린 다음에야 흡족스러움을 느끼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서는 마트에서 사 온 수박 반 통을 갉아먹었다. 과도나 그릇 같은 준비물은 사치였기 때문에 우린 플라스틱 포크로 수박을 열심히 조각내 퍼먹었다. 마시던 오미자차, 미숫가루와 수박의 단내와 단물 때문에 꿀벌 두어 마리가 날아들면서 붕붕 대고, 발과 손등을 타고 개미가 오르락내리락 하이킹을 해댔다. 얘들아, 이건 우리들 간식이란다, 너희들도 먹고 싶으면 마트 가서 돈 내고 사 먹으렴. 손가락 사이사이를 타고 뚝뚝 흐르는 수박물을 핥아먹으니 꽃물 빨아먹는 꿀벌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수박 조각을 등에 업고 가족 품으로 달려가는 일개미가 된 것도 같았다. 옛날 옛적 우리 조상님들은 이곳까지 걸음해 여름 더위를 식혔으려나. 차도 없고, 잘 닦인 도로도 없어 힘든 여정이었겠지만 도착해서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오는 길의 고됨은 싹 날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괜히 무릉 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 아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나는 지금 한 폭의 수묵담채화 안에 들어와 있었다. 펴 놓은 자리에 벌러덩 누워 돌 바위에 누워 산의 굽이굽이 흘러가는 능선도 눈으로 따라가 보고, 졸졸졸 흐르는 계곡 물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보았다. 해는 구름 뒤로 가려져 하늘에는 한 점의 붉은 기운이 없었는데도 눈을 감으면 눈두덩이에 뜨듯한 열기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제 가야지.”

친구가 옆에서 쿡 찌르며 말했다. 싫어, 난 여기서 평생 살 거야, 참새처럼 계곡 물 마시고 나뭇잎처럼 계곡 물에 동동 떠다니면서 살 거야,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내려와 식당에서 나물과 간장게장 정식을 먹었다. 친구는 간장게장을 엄청 좋아해서 벌컥벌컥 마시듯이 식사를 마쳤다. 나는 간장게장은 또 몇 년 만에 먹는 데다 먹는 방법을 잘 몰라서 친구가 먹는 모습을 곁눈질로 따라먹었다. 티비에서 보면 사람들이 게딱지에 밥을 비벼 먹는 게 별미라고 하던데 먹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진짜 게딱지를 밥그릇처럼 써서 그 안에 밥을 비벼 먹는 거였다. 친구는 남은 밥 한 톨까지 싹싹 긁어먹던데 나는 한 입 하니까 너무 짜서 동해 앞바다를 통째로 집어삼킨 것만 같았다. 간장게장이 밥도둑이라는 건 나트륨 과다 섭취로 지나친 짠맛을 쌀밥으로 중화시키려다 보니 밥 한 그릇을 다 비워버린다는 말 아닐까. 이 정도면 학계 정설로 인정해 줘야 한다. 가히 합리적 추론이 아닐 수 없다.


여행의 시작은 활기찼고, 여행의 마지막은 노곤노곤했다. 금방이라도 잠에 곯아떨어질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머리가 희뿌옇게 흐려져가는 중에도 둥둥 떠다니는 색채 선명한 장면들이 있었다. 기와지붕 아래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물 담아 마신 연잎 차의 뜨듯 미지근한 맛, 축축함을 듬뿍 머금은 짙은 녹빛의 풀밭, 향이 짙게 배어 있던 갖가지 나물 반찬, 동굴 벽면에 어른거리던 새초롬한 그림자, 뜨끈뜨끈하게 달구어 주던 소금 사우나, 뚝뚝 떨어지다 쏴아아 쏟아지며 온몸을 덮어버린 소낙비, 보라색으로 물들다 주홍빛으로 잠겨버린 저녁 하늘, 계곡에 뛰어들 때 물이 날 떠안던 묵직한 느낌. 좋아하는 영화 속 매번 돌려보는 부분만 잘라내 엮는 것처럼 머릿속에 조각조각 떠다니는 여행의 순간들을 하나씩 이어 붙여 보았다. 피어오르는 기억을 하나씩 꿰어 갈 때마다 마음 바닥이 들썩였다. 흙더미를 들추고 어린잎이 싹을 틔우기 직전처럼 간질간질거렸다. 이대로라면 눈 깜짝할 새에 내 마음은 꽃밭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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