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건축 스튜디오 MAD 설계, 2025년 5월 개관
‘모든 가족에게는 이주의 역사가 있다’
거대한 은빛 나선형 계단 두 개가 직사각형 건물 지붕을 뚫고 올라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마스(Maas)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2025년 5월 개관한 피닉스 이주박물관(Fenix Museum of Migration)은 ‘토네이도’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소용돌이 모양의 계단 덕분에 개관과 동시에 로테르담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부상했다.
피닉스 이주박물관은 2018년 100년 된 창고건물을 매입한 드룸 엔 다드(Droom en Daad) 재단의 지원으로 건립됐다. 중국의 세계적인 건축 그룹 MAD Architects(대표건축가 마얀송)가 설계를 맡아 과거의 유산과 파격적인 현대 건축을 결합했다. 피닉스 이주박물관은 MAD가 유럽에서 완공한 최초의 박물관이다.
피닉스 이주박물관은 네덜란드 건축가 코르넬리스 니콜라스 반 고르가 1923년에 지은 샌프란시스코 창고로 알려진 길이 300미터의 창고 건물에 자리 잡고 있다. 한때 세계 최대 규모의 창고였던 이곳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수백만 명의 이민자들을 수송한 ‘홀랜드 아메리카 라인(Holland-America Line)’의 보관소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유럽인들은 가난과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배를 타고 미국이나 캐나다로 떠났다. 당시 이주민들이 마지막으로 유럽 땅을 밟고 짐을 부쳤던 창고 건물을 그대로 활용함으로써, 장소 자체가 가진 역사적 무게감을 박물관의 핵심 콘텐츠로 삼았다.
이 박물관은 단순히 유물을 전시하는 곳을 넘어, 로테르담이라는 도시의 정체성과 인류의 보편적 경험인 ‘이동’을 상징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항구도시로 끊임없는 인적교류를 통해 성장해 온 로테르담은 오늘날 170개 이상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계적인 다문화 도시이다. 이 박물관은 이주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로테르담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역사임을 보여준다. 박물관이 위치한 카텐드레흐트(Katendrecht)는 1900년대 초반 유럽 대륙 최초의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던 곳으로 이주와 정착의 역사를 설명하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박물관 이름 ‘피닉스(Fenix, 불사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다시 재건된 창고의 역사에서 유래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선 건물처럼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났던 이주민들의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상징한다.
로테르담 시는 이 역사적인 창고를 허무는 대신 세계적인 건축 그룹 MAD Architects와 협업하여 현대적인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특히 건물 중앙을 관통하는 거대한 나선형 계단 '토네이도(Tornado)'는 이주민들이 겪는 혼란과 역동적인 여정을 시각화한 명소로 꼽힌다. 단순히 멋진 디자인을 넘어 ‘이동’이라는 주제를 건축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우리는 변화를 가져와야 했습니다. 자연광을 들여오고, 움직임을 더해야 했죠. 이곳이 과거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관한 것이라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조각품처럼 보이는 계단을 디자인했습니다.” (MAD 대표건축가 마얀송)
약 30m 높이의 이 구조물은 롤러코스터 전문업체와 협력해 제작됐다. 297개의 광택 스테인리스 스틸 패널로 덮여 있어 주변의 빛과 방문객의 움직임을 거울처럼 반사한다. 얀송에 따르면, 외벽 마감재는 주변 환경을 반영하고 빛의 재미있는 패턴을 만들어내도록 처리했으며 특히 표면이 평평하지 않고 크기가 작아 새들에게 해롭지 않다. 또한 외부의 광택 처리된 강철 부분은 눈부심을 방지하기 위해 브러싱 처리됐다.
내부에는 550m 길이의 나무로 된 이중 나선형 계단이 있어 방문객이 직접 걸어 올라갈 수 있다. 계단은 배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의 케보니(Kebony)라는 특수 가공 목재 판자 12500개로 마감했다. 이중 나선형 계단은 두 개의 교차점을 지나 꼭대기에서 만나기 때문에 방문객들은 어느 계단이든 선택해서 올라가고 내려올 수 있도록 설계됐다. 계단을 따라 옥상에 오르면 로테르담의 마스 강과 과거 이주민들이 배를 탔던 부두, 그리고 유명한 ‘호텔 뉴욕(홀랜드아메리카라인의 옛 본사)’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360도 전망대가 나온다.
피닉스는 정면과 남쪽 입면에 있는 커다란 유리 출입구를 통해 들어갈 수 있으며, 이 출입구는 토네이도 조형물을 중심으로 채광이 좋은 아트리움으로 이어진다. 유리 지붕과 출입구를 도입한 것은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하고 건물이 이제 공공의 공간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내부 전체에 노출된 질감 있는 콘크리트 골조를 포함하여 기존 건물의 구조를 최대한 보존했다. 외부적으로는 창문이 1923년 당시와 같이 녹색 마감으로 복원됐다. 박물관 1층에 위치한 약 2000㎡ 규모의 열린 광장 플레인 (Plein)은 티켓 없이도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로테르담 시민들과 여행객들이 섞여 대화하고 휴식하는 광장 같은 역할을 한다.
‘이동’을 예술적 서사로 풀어낸 전시
박물관은 유물 나열 방식에서 벗어나 예술과 개인의 서사를 결합한 몰입형 전시를 선보인다. 가장 인상적인 전시물 중 하나는 ‘가방 미로(Suitcase Labyrinth)’이다. 전 세계에서 기증받은 2000개 이상의 오래된 여행 가방으로 만든 거대한 미로다. 가방마다 주인의 이름과 그들이 이주하며 겪은 사연이 담겨 있으며,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실제 이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주민의 가족(The Family of Migrants)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1955년 사진작가 에드워드 스타이컨(Edward Steichen)의 기획으로 열렸던 사진전 ‘인간 가족(The Family of Man)’을 오마주한 대규모 사진 전시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과 냉전의 공포가 가득했던 시절, 사진을 통해 전 세계 모든 인간은 결국 하나의 가족이라는 평화와 휴머니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전시에는 68개국 273명의 작가가 찍은 503점의 사진을 전시했다. 피닉스 이주박물관에서는 전 세계 수백 명의 사진작가가 포착한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류의 보편적인 경험을 공유한다.
현대 미술 컬렉션의 경우 서도호, 빌 비올라(Bill Viola)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이주, 정체성, 집’을 주제로 만든 설치 미술과 현대 미술 작품들이 박물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피닉스 이주박물관은 ‘모든 가족에게는 이주의 역사가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과거의 창고를 보존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인 ‘토네이도’를 더한 디자인은 로테르담이 이주민들의 도시라는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다.
건축설계사무소 MAD는 2004년 대표 파트너인 마 얀송(Ma Yansong)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베이징, 로스앤젤레스, 로마에 스튜디오를 두고 건축, 인테리어, 디자인, 제품 디자인 및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스튜디오는 인간과 자연이 균형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건축에 접근하며, 웰빙을 증진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을 창조한다. 2025 베니스 건축비엔날레에서 전통적인 중국 종이우산을 재해석한 캐노피를 통해 미래 건축물이 어떻게 더욱 기후 친화적일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설치 작품들을 선보인 MAD는 이주박물관에서 기존 건물을 재활용하는 방식을 혁신적으로 확장한 대규모 박물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세계 건축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MAD는 로테르담 이주박물관에 이어 2026년 9월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유기적인 형태의 루카스 내러티브아트 박물관의 완공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