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은님의 원초적 자연의 생명력

'힘과 시'

by 아트노마드 함혜리

재독화가 노은님의 작업실은 함부르크와 미헬슈타트에 있다. 함부르크는 작가의 기반이 있는 도시다. 작가는 파독간호사로 왔다가 함부르크 미대에 진학해 공부한 뒤 작가의 길을 걸어왔고 1990년부터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 교수로 재직했다. 미헬슈타트는 헤센주에 있는 작은 도시로 작가는 이곳의 성에 딸린 멋진 공간을 50년간 장기임대해 작업실로 쓰고 있다. 미헬슈타트 미술관은 15세기에 지어진 건물을 활용해 만든 미술관으로 15세기, 16세기에 활동한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최근 리모델링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전시공간을 마련해 20세기 작가의 작품을 영구전시하기로 했다. 그 작가로 노은님이 선정됐다. 노 작가가 선정된 것은 미헬슈타트에서 작업하는 작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술관은 노은님의 작품이 지닌 원초적 생명의 아름다움과 그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영구전시관 개관을 앞두고 미헬슈타트미술관에서 노은님 개인전 (2019. 11.23-2020.1.12)을 마련했다.


독일 미헬슈타트미술관 노은님 개인전 포스터.png 미헬슈타트미술관 노은님 개인전 포스터
미헬슈타트미술관 노은님 개인전 전시장 모습.jpg 미헬슈타트미술관 노은님 개인전 전시전경
KakaoTalk_20191229_091658623.jpg 미헬슈타트미술관 노은님 개인전 전시전경


노은님 ‘힘과 시 Kraft und Poesie’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자연은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력과 힘을 준다. 그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예술이다. 각자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열리고 있는 노은님(b. 1946~)의 전시 ‘힘과 시’는 예술의 본질에 한발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 준다. 노은님은 자연을 시처럼 그린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상상력과 순수함으로. ‘달 남자’, ‘피아노 동물’, ‘나뭇잎 사람’.. 이런 상상을 누가 할 수 있을까.

1.-%EC%83%9D%EB%AA%85%EC%9D%98-%EC%8B%9C%EC%B4%88-1984-Mixed-media-on-paper-258%E2%85%B9203cm.jpg?w=1080&ssl=1 생명의 시초, 1984, Mixed media on paper, 258ⅹ203cm


세상이 각박할수록, 기계문명이 우리의 정신과 물질세계를 압도할수록 순수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은 더욱 강해질 수 밖에 없다. 단순한 선과 원초적인 색상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생명의 화가’ 노은님의 작품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고 삶을 추슬러 나갈 힘을 얻는다. 가나아트가 가나아트센터와 가나아트 한남의 두 전시 공간을 할애해 노은님의 개인전을 마련했다. 자연과 생명을 주제로 한 1980~90년대의 대형 회화, 그의 예술관을 다룬 바바라 쿠젠베르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내 짐은 내 날개다’(1986), 테라코타 조각은 물론 신작 회화 등으로 다채롭게 전시를 구성해 노은님의 작업을 총망라 한다. 노은님의 작업은 유화 외에 한지에 그린 흑백의 아크릴화, 설치미술, 테라코타 조각, 교회의 스테인드글래스까지 매체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번 전시는 그의 광범위한 작업 스펙트럼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2.-%EB%82%98%EB%AD%87%EC%9E%8E%EB%B0%B0-1987-Mixed-media-on-paper-206%E2%85%B9505cm.jpg?w=1080&ssl=1 나뭇잎배, 1987, Mixed media on paper, 206ⅹ505cm


3.-%EB%AC%BC%EA%B3%A0%EA%B8%B0-%EC%9E%A1%EA%B8%B0-1988-Mixed-media-on-paper-49.5-x-68.5cm.jpg?w=1080&ssl=1 물고기 잡기, 1988, Mixed media on paper, 49.5 x 68.5cm


전시의 주제인 ‘힘’은 노은님이 평생에 걸친 작업의 주제로 삼는 화두다. ‘자연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이를 구성하는 힘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에 골몰한다. 그는 파독간호사로 함부르크 항구 근처의 시립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 큰 배를 항구에 정박시키기 위해 작은 배가 밧줄로 끌어오는 모습을 봤다. 큰 배를 움직이는 힘이 어떻게 작은 배에서 나오는가에 대한 의문은 그런 힘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우주를 구성하는 힘, 그리고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의문의 시작이었다.

어느 봄날, 2019, Mixed media on canvas, 161ⅹ225cm


8.-%EB%8B%AC%EA%B3%BC-%ED%95%A8%EA%BB%98-2019-Mixed-media-on-canvas-143%E2%85%B9158cm.jpg?resize=1024%2C958&ssl=1 달과 함께, 2019, Mixed media on canvas, 143ⅹ158cm


그의 작품은 원초적인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뛰는 동물’(1984), ‘밤중에’ (1990), ‘나무가 된 사슴’(2019)에서 퍼져 나오는 생명력은 노은님의 자연을 대하는 자세와 직관적인 표현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가는 함부르크의 한 공원에서 나뭇가지와 종이로 만든 나뭇잎을 실제의 나무에 매단다든가 합판으로 만든 강아지를 끌고 산책을 가는 등의 퍼포먼스를 했다. 이는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과 자연이 교차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7.-%ED%81%B0-%EB%B0%94%EB%8B%A4-1984-Mixed-media-on-paper-216%E2%85%B9275cm.jpg?w=1080&ssl=1 어느 봄날, 2019, Mixed media on canvas, 161ⅹ225cm


10.-%EB%82%98%EB%AC%B4%EA%B0%80-%EB%90%9C-%EC%82%AC%EC%8A%B4-2019-Acrylic-on-canvas-130.2-x-97.2cm.jpg?w=1080&ssl=1 나무가 된 사슴, 2019, Acrylic on canvas, 130.2 x 97.2cm


이런 의문은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1980~90년대 대작 회화에서 드러난다. 전시장 초입에 걸린 ‘생명의 시초’(1984)는 우주의 시작, 즉 태초는 이러했을 것이라는 작가의 상상력이 담긴 작품이다. 200호의 대형 화면을 가득 채운 화살표들은 각각의 방향으로 흐르는 힘의 양상을 표현한 것이다. 여러 갈래로 제각기 흩어져 있는 힘의 흐름은 서로 부딪히고 교류한다. 그리고 그 충돌 속에서 우주의 만물, 그가 그려내는 생명체들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밑그림 없이 직관적인 자아가 지배하는 순간에 그려진다. 바닥에 커다란 한지, 캔버스 천을 한꺼번에 늘어놓고 붓, 빗자루, 걸레 등 손에 잡히는 것들을 집어들고 ‘영적인 손님’의 손을 빌려 즉흥적으로 긋고, 칠하고, 던지고, 찍어 누르는 방식으로 작품을 ‘출산’한다. 표현방식은 함부르크 국립미술대학에서 그가 사사한 한스 티만, 카이 수덱으로부터 받은 독일 표현주의 영향과 함께 수묵화의 갈필에 가까운 붓질과 과감한 여백으로 인해 동양의 정신을 연상시킨다. 독일의 평론가 아넬리 폴렌은 “동양의 명상과 유럽의 표현주의를 잇는 다리”라 극찬했다.

노은님은 한국 여성작가로서는 최초로 국립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의 정교수로 임용돼 20여 년간 독일 미술 교육에 기여한 한편, 바우하우스, 베를린 세계 문화의 집, 베를린 도큐멘타, 국제 평화 비엔날레, 제5회 국제 종이 비엔날레 등에 초대된 바 있다. 더불어 그는 한국 작가로서는 드물게 프랑스 중학교 문학 교과서에 작품이 수록된 국제적 위상의 작가다. 이번 개인전은 올해 11월 현재 작가의 작업실이 위치한 독일 미헬슈타트의 시립미술관에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영구 전시관 개관을 기념해 기획됐다. 전시는 8월 18일까지.

<작품 이미지> 가나아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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