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생 창업팀을 추천하는 이유
학생 시절 다섯 번 창업에 도전했다. 인디게임 개발부터 온라인 쇼핑몰, 웨어러블 다마고치 앱, 로컬 숏폼 sns, 중고 거래 플랫폼까지. 세 번은 장렬하게 실패하고, 두 번은 현재 진행형이다. 성과도 없는데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해왔냐고 묻는다면, 실패하더라도 스스로 달라진 모습에 중독된 탓이다. 결과적으로 실패했더라도 나름대로 성장은 있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다음은 사업자, 다다음은 펀딩, 그다음은 공유형 스타트업 오피스 입주까지 -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갔으니 된 것 아닐까?
물론 학교를 졸업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 이상 ‘학생’이라는 변명의 울타리가 보호해주지 않는다. 창업이든, 프로젝트든, 모든 시도가 커리어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선뜻 도전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추천한다. 학생일 때 실컷 실패해 보라고!
서비스를 개발해 출시하고 유지하는 일이 개발자의 커리어고, 운영을 맡는 일이 기획자의 커리어라면, 디자이너에게 창업은 어떤 의미일까? 디자이너에게 창업은 기회다. 실현하기 어렵지만 멋들어진 포트폴리오에서 벗어나, 실제 유저를 마주하며 디자인할 수 있는 기회.
물론 지금도 나는 여전히 컨셉츄얼한 디자인을 제안하고, 기획자와 개발자에게 지적받기 일쑤이다. 그럼에도 창업 경험 덕분에 조금은 더 현실적인 디자인을 한다. 이제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을 고민하며, 유저가 정말 원하는 것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어, 애프터이펙트로 매끄러운 인터랙션을 연출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프레이머로 실제 코딩 가능한 플로우를 설계하는 식이다.
이런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프로덕트 디자인(Product Design)이라는 개념에 닿게 되었다. UX 디자인 중에서도 가장 실무에 밀착된 역할. 말 그대로 ‘작동하는 것을 만드는’ 디자이너로 변화한 것이다.
UX 분야라는 큰 틀 안에는 다양한 역할이 존재한다. 사용자에 대한 인사이트를 도출하는 UX 리서처, 콘텐츠의 흐름을 디자인하는 UX 라이터, 사용자의 플로우를 정의하는 인터랙션 디자이너까지. 각기 다른 역할이지만, 모두 사용자 경험을 중심으로 사고한다.
한때 데스크톱 환경의 웹사이트가 중심이던 시절에는 ‘퍼블리셔’라는 직무가 있었다. 당시에는 디자인과 개발 사이를 연결해 주는 중간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바일 앱과 반응형 웹이 보편화되면서 퍼블리셔는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췄다. 현재 그 역할은 UI 개발자와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나눠 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체적인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은 플랫폼 디자이너가 하지만, 실제 구현은 UI 개발자가 맡고, 그 중간에서 방향을 조율하고 현실적인 시스템 활용 전략을 설계하는 역할이 바로 지금의 프로덕트 디자이너다. 그에 따라 UI 개발자(프론트엔드 엔지니어)가 디자인 시스템을 활용해 직접 화면을 구현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업들은 프로덕트 디자이너에게 UX 전체를 통합적으로 담당해 주길 기대한다. 단순히 인력 부족이나 역할에 대한 오해 때문만은 아니다. 디자인 툴의 발전과 업무 방식의 변화도 큰 영향을 미쳤다. Figma나 Framer 같은 협업 중심 툴의 등장은 디자이너의 역할을 바꿔 놓았다. 디자이너는 더 이상 '완성된 결과물만 넘기는 사람'이 아니라, 디자인 과정에서 설득과 논의를 주도하며 문제 해결을 이끄는 역할로 발전했다. 여기에 ‘Data-Driven’이라는 용어와 함께 데이터 기반의 의사결정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리서치와 실현 가능성 판단까지 디자이너가 주도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Meta, Airbnb 같은 해외 테크 기업에서는 이러한 전방위적 역할을 수행하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 디자이너가 흔하다. 제너럴리스트는 여러 디자인 영역을 넘나드는 다재다능한 디자이너를 뜻한다. 이들은 단순히 시안을 만드는 것을 넘어, 기획 단계에서 문제를 정의하고, 리서치와 테스트, 실현 가능성까지 두루 고려하며 디자인을 풀어낸다.
모바일 시장 초기에는 신규 서비스를 런칭하기 위해 여러 기업이 앞다투어 기획자와 디자이너를 채용했다. 하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기업이 이미 앱을 보유하고 있고, 완전히 새로운 서비스를 만드는 것보다 기존 경험을 개선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앱에서는 사용자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수집할 수 있기 때문에, 최신 기업들은 빠르게 시장에 대응할 수 있는 점조직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사일로 단위의 스쿼드로 회사를 운영하는 토스(toss)가 있다. 예를 들자면 프로덕트 디자이너들끼리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형태가 아니라, 동일한 프로덕트 디자인 챕터로 각자 스쿼드의 1인 디자이너 역할에 배치되는 방식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다양한 제한사항 속에서도 빠르고 가볍게 실현 가능한 해답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다방면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도출하는 역량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프로덕트 디자이너 한 명이 서비스 기획을 토대로 기능을 설계하고, 스펙을 조율하며, 리서치 결과를 분석해 최적의 UX를 도출하는 경우가 많다. UI도 능숙하게 그려내며 종합적으로 사용자 경험을 최적화한다. 이를 위해 매니저로서 커뮤니케이션 스킬은 물론, 개발에 대한 이해도 필수가 되었다. 실현 가능한 시스템 구조와 기술적 제약을 이해하고 협업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개발자나 기획자 출신의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늘어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HCI 덕후인 나도 이러한 추세를 따라 대학에서 공대 소프트웨어와 미대 디자인을 모두 전공했다.)
예전엔 ‘예쁘게’ 만들면 됐지만, 지금은 ‘잘 작동하는’ 것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필요하다. 실현 가능한 디자인, 데이터를 읽는 눈, 그리고 유저를 이해하는 태도. 이 세 가지가 갖춰질 때 비로소 ‘좋은 디자인’은 현실이 된다.
이제 UX 디자이너는 단순히 ‘잘 만든 포트폴리오’만으로는 명함을 내밀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여전히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GUI를 요구하는 분야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디자인은 비즈니스 목표와 직결되며, 유저 데이터를 기반으로 실질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 예를 들어, “가입 버튼을 유저가 잘 누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디자인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 같은 고민이 매일 반복된다.
결국 UX 디자이너의 일은, 팀과 협업하며 현실 속 문제를 풀고 유저가 체감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어찌 보면, 그 본질은 창업과도 닮아 있다. 그래서 꼭 거창한 비즈니스가 아니더라도, 사이드 프로젝트에서 1인 디자이너의 역할을 맡아보는 경험은 큰 자산이 된다.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팀과 함께 끝까지 밀어붙이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디자인의 실행’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디자이너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멋진 비주얼보다 현실을 설계할 수 있는 감각이다. 그리고 현실과 부딪힌 경험이 많을수록, 사용자의 ‘진짜 니즈’를 파악하는 능력도 함께 자라난다. 이제 실전 경험이 곧 실력이 되는 시대다. 디자인 채용 시장은 ‘경력을 쌓기 위해선 경력이 필요하다’는 아이러니에 빠져 있지만, 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도전할 수 있었던 창업 경험이 그 어떤 포트폴리오보다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