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우리는 이야기 과잉 시대를 살고 있다. 영화, 책, 드라마부터 시작해서 짧은 10초짜리 광고나 쇼츠 콘텐츠까지. 모든 콘텐츠에는 이야기가 있고, 심지어 기획된 상품, 음악 조차 저마다의 세계관 만들기에 돌입하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는 쉴새 없이 이야기를 보고 듣고, 읽고 있다.
하지만 정말 마음에 진하게 남는 코코아 같거나, 멍이 진 것처럼 아프게 때리고 지나가는 이야기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좋은 이야기란 그만큼 만들기 어려운 것이다. 올해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기묘한 이야기4>, 영화 <헤어질 결심>들이 진한 인상을 남겼다. 이들의 인기 이유와, 수작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이야기의 조건을 알고 적용해보는 일이다.
사실, 우리가 아는 대다수의 이야기들은 겨우 20가지 정도의 플롯 안에서 모두 분류할 수 있다. 고대부터 축적되온 수많은 이야기들을 여러 학자들이 분석해본 결과, 겨우 몇 가지의 이야기 구조로 분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 유형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유형이 바로, 마스터플롯이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은 20가지 플롯>의 저자 토비아스가 구분지은 20가지 마스터 플롯은 다음과 같다.
추구(Quest) / 모험(Adventure) / 추적(Pursuit) / 구출 (Rescue) /
탈출 (Escape) 복수 (Revenge) / 수수께끼 (The Riddle) / 경쟁 (Rivarly) /
희생자 (Underdog) / 유혹 (Temptation) / 변신 (Metamorphosis) /
변형 (Transformation) / 성숙 (Maturation) / 사랑 (Love) /
금지된 사랑 (Forbidden Love) / 희생 (Sacrifice) / 발견 (Discovery) /
지독한 행위 (Wretched Excess) / 상승 (Ascension) / 하강 (Descension)
예를 들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은 '금지된 사랑'의 플롯에 속한다. 금지된 사랑은 사회의 관습에서 어긋나는 사랑, 영화의 경우 불륜, 동성애이다. 이들은 규범을 어기고 마음의 방향에 따라 움직이고 연인이 되지만, 헤어지는 결말을 맞이한다.
첫 번째 단계는 두 사람의 관계와 사회적인 위치를 알려준다. 그들이 위반한 금기와 이를 다루는 방식, 주변 사람들에 대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엘리오는 아버지의 지인으로 올리버를 만나게 된다. 올리버는 약혼자가 있는 상황이었지만 둘은 서로에게 강렬한 이끌림을 느낀다.
두번째 극적 단계에선 이들은 연인관계를 맺게 되지만 사회적 압박으로 인해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위기를 맞게 된다. 엘리오와 올리버는 마음의 방향을 따른다. 그들은 연인이 되고, 꿈과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그들의 시간은 '여름'에 국한되어 있었다. 올리버는 약혼자가 있어 돌아가야 했고, 둘의 사랑은 사회에서 쉽게 인정받기 어려운 형태였다.
마지막 극적 단계에서 연인들은 도덕적 문제를 해결할 단계에 이르고, 보통 죽음, 압력, 추방 등에 의해 헤어진다. 결국 그들은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 헤어진 후 본인의 자리로 돌아간다. 올리버는 결혼을 하고, 엘리오는 여전히 혼자 남아 그를 그리워 한다. 사회적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헤어진 그들의 사랑은 절절한 여운을 남긴다.
이 많은 플롯 중에서 주목하고 싶은 플롯은 바로 '성숙 '플롯이다. 성장이라고도 볼 수 있는 '성숙'플롯은 매력적이다. 우리 모두가 성장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기대와 환상이 차가운 현실에 깨어져도, 성숙하고 자라나는 주인공 혹은 내가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희망이기 때문에 우리에겐 필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시련 뒤에 있는 것이 오직 절망과 슬픔이 아니라 피어난 꽃 한송이가, 열매 하나가 있을 거라는 메시지는 앞날을 살아갈 힘을 주기 때문이다.
최근 현실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것에 취한 수많은 콘텐츠들 사이에, 빛나는 하나의 작품이 있다. 바로 넷플릭스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다. 올해 시즌 4가 나왔고, 어렸던 주인공들이 자라 청소년이 되어 여전히 세상을 구하고, 우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이 이야기에 주목하는 이유는 우정과 사랑의 메시지가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가장 단순하기도 하다. 그 누가 사랑과 우정의 소중함을 모르는가? 하지만 요즘 너무나 많은 콘텐츠들이 폭력과 잔인함을 가감없이 화면에 담고, 냉정한 현실의 돌파구를 피가 낭자한 사적 복수에서 찾고 있기에, 이 이야기는 더욱 소중하다.
세계를 구한다는 막중한 미션 아래 거대한 판타지 세계관이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이야기가 작동되는 구조는 단순하다. 위협하는 괴물(안타고니스트), 베크나는 인물들의 약하거나 악한 마음을 자양분 삼아 파고들고, 이에 대항하는 주인공들(프로타고니스트)은 서로간의 믿음, 즉 사랑과 우정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한다. 일레븐은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능력을 각성하며, 친구들은 서로를 위해 용기를 내고 뭉친다. 고작 어린 아이들이 친구들과 함께 사는 작은 마을-호킨스를 구하기 위해 용기를 내는 그 자체가 이미 이 이야기를 사랑스럽게 만든다.
이번 시즌에서 가장 벅차오르는 장면은 바로 베크나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 맥스가 살아 남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한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이다. 이때 흐르는 배경음악 케이트 부시(Kate Bush)의 'Running up that Hill'은 이 애틋함과 간절함의 감정을 클라이막스로 상승시킨다. 오빠가 죽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맥스는 줄곧 괴로워했고, 친구들과도 점차 멀어졌다. 베크나가 이 여리고 아픈 구석을 이용했고, 맥스를 죽이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친구들이 맥스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맥스는 친구들과 보냈던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다시 나아갈 힘을 얻은 맥스는 출구를 향해 달려나간다. 손을 뻗어 친구들의 곁으로 다가가기 위해 이를 악문다. 그리고 마침내 안착한 친구들의 품은 무엇보다도 안전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나에게 가장 매력적이고 가슴뛰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개개인마다 끌리는 이야기 유형이 다양할 것이다. 누구는 '수수께끼' 플롯을 가진 셜록홈즈의 추리에 마음을 뺏길 수도 있고, 누군가는 '복수' 플롯의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마스터 플롯을 깬 이야기들에도 이끌릴 수 있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이야기를 씹고 뜯고 맛보기 시작할 때, 처음에는 보지 못한 것들을 포착하게 된다. 세계관을 이해하고, 이야기를 분석하는 것의 즐거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무엇보다 이야기를 끊을 수 없는, 호모 나랜스(homo narrans)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