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마우스피스
이 극은 삶의 낭떠러지 앞에 선 위태로운 소년 데클란과 작가 리비가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관계로 발전하면서 하나의 연극을 완성해나가는 이야기다.
누구보다 외로운 이들은 서로를 동앗줄 삼는다. 데클란은 빈곤하고 폭력적인 가정에서 불안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오직 그림과 동생 시안만이 소년을 세상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한편 리비는 차세대 작가로 한 때 주목을 받았으나 시간이 흘러 이제는 절필한 것도 아무도 모르는, 무명작가가 되어 길을 잃은 상황이었다. 이들은 서로를 동정하면서 이끌렸다. 리비에게는 소년이 안타까웠으나 그의 매력적인 그림과 상황에 관심이 갔다. 데클란은 자신에게 예술의 세계를 보여준 리비의 성숙함에 끌리며 동시에 외로운 작가로서의 어두움에 동질감을 느꼈다. 두 사람은 같이 연극을 쓰기로 한다. 소년은 기꺼이 인터뷰이가 되어주고, 리비는 그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그럼, 이 연극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데클란의 삶을 모티브로 하고 리비가 쓴 작품 ‘마우스피스’의 결말은 주인공이 목 매달아 죽는 것이었다. 데클란은 이 결말을 듣고 분노한다. 그는 자신과 작품의 주인공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데클란에게 이 작품은 자신의 삶 그 자체였다.
하지만 리비에게 그 작품은 ‘이야기’였다. 리비는 격렬하게 반응하는 소년에게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공식들, 이야기 구성, 전개-발달-절정-결말, 비극적 설정을 이야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들은 리비가 그토록 혐오했던 글쓰기에서의 ‘안정성’과의 타협이었다. 진짜 쓰고 싶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관객들에게 먹힐만한 이야기를 위한 구조들을 그대로 끌고 온 것이다.
피상적으로 이 작품의 목적은 ‘빈곤층 소년의 비참한 현실이라는 보이지 않는 삶의 단면의 고발’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두 인물이 원하는 것은 ‘안정성’이다. 리비는 작가로서의 성공, 데클란은 일상을 영위할 돈이다.
수많은 작가들이 리비처럼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취재하여 비극적 현실을 폭로하는 작품을 쓰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사회의 일원이 아닌 작가가 구성한 이야기는 현실과 얼마나 맞닿아있는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은 작가의 손에서 ‘번역’된 이야기다. 이 번역의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탈색된다. 작가의 최종적인 목표는 소외된 이들의 구원이 아니라 관객의 열광적인 반응으로 미세하게, 틀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극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데클란의 입을 훔친 작가의 목소리다. 이 도둑질이야 말로 사회의 또 다른 단면이다. 하루하루를 걱정과 불안으로 살아가는 데클란에게 이야기라는 건 없다. 그에겐 당장의 현실이다. 하지만 리비는 데클란과 달리 안정적인 집과 먹을 것이 있으므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데클란과 다른 상황의 우위 자체가 그녀가 가진 권력이다. 그녀가 펜을 들고 쓰고, 극장에 올려 다수의 관객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는 점. 애초에 오롯이 한 소년을 위한 이야기가 되기가 힘든 것이다.
부풀리거나 왜곡된 삶이 훌륭한 스토리텔링을 거쳐 많은 이들의 관심을 갖는다하더라도, 그 관심이 그들의 삶의 안정으로 이어지는가? 우리는 수많은 기부 단체의 껍데기를 쓴 사기행적들을 목격했다. 이 문제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이 잘 될거야.
그럼에도 이 극은 데클란과 같은 소년의 삶이 ‘이야기’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딜레마를 내포한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 데클란이 우연한 기회로 직접 목소리 내어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 한다해도, 그 말이 사람들에게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데클란은 무작정 무대에 올라 이 이야기가 자신의 것이라 외친다. 그 과정은 엉망진창이다. 불안정한 그의 태도와 고함은 분명하게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지만, 예쁘게 포장되어 있지 못한 말의 저의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 사람들은 이를 소음으로 인식한다. 데클란이 원했던 것은 안정성, 즉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절하게 외친다. 필요한 것은 예술도, 리비도, 작품도 아닌 돈이라고. 하지만 모두가 이 극적이고 불편한 상황에 움직이지 못한다. 긴장은 고조되고 데클란의 불안감은 극도에 달해 결국 그가 자신의 목을 찔러버리도록 만든다.
데클란의 죽음은 결국 다시 모든 문제를 원점으로 돌아오게 한다. 당사자의 목소리 그 자체가 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리비의 의도가 진실하지 못하다고 해서 그의 작품은 공연되어서는 안될까? 실화의 주인공이 있는 작품은 관객을 향해야 할까, 그 당사자를 위해야 할까.
이야기가 주목을 받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매력적인 방식이 필요하다. 데클란이 외치는 비명과 같이 날것의 목소리는 대중들의 피로감을 더할 뿐이며 한 사람의 푸념으로만 남아 뱉는 순간 사라지는 입김처럼, 공기중으로 흩어질 뿐이다. 그건 안타깝게도 냉정한 현실인 셈이다. 그래서 이 극은 단순히 이야기의 기만을 폭로한는 것과 동시에 그의 필요성을 이야기 한다. 그 사이의 줄다리기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