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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 Apr 26. 2021

우리들의 현실은 돈키호테보다
알돈자를 닮아있다.

뮤지컬 <맨오브라만차>리뷰



공연을 보고나서 든 감정은 돈키호테에게서 받는 위로가 아닌 애매한 찜찜함이었다. 어느때보다 꿈이 필요한 시기였지만 그의 꿈을 향한 도전은 나에겐 전혀 와닿지 않은 것이다.


출처_오디컴퍼니


 돈키호테가 꿈꾸는 것-기사도의 정신-은 극 중 시대에서 이미 져버린, 지나간 영광이다. 사람들을 위협하는 괴물들을 물리쳐 사람들에게 칭송받으며 나만의 '레이디'을 위해 온 몸 바쳐 불사지르는 것. 신의 영광은 기사들과 항상 함께했고 그러한 삶이 그들의 명예였고, 삶이었다.


 그래서 돈키호테라는 존재는 '꿈'이라기 보다는 '미련'에 더 가깝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에 핀 작은 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지나간 유물을 다시 재현하고자 하는 나이 든 노인에게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아직 많은 노인들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던 독재정권의 시절을 그리워하고 꿈꾸지만 지금세대가 그것을 더 이상 '꿈'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출처_오디컴퍼니



 하지만 극은 이런 그의 꿈을 긍정적인 것으로 그려내는데, 이를 위해 가져온 것이 극중극 형식과 알돈자이다.

돈키호테는 기사로서 지킬 레이디 '둘시네아'를 상상해내는데, 원작에서는 가상의 인물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 극에서는 한 여인숙의 하녀인 '알돈자'를 '둘시네아'라고 부른다. 밑바닥 인생을 사는 알돈자를 심성이 곱고 아름다운 둘시네아라고 착각해 보는 것은 사실 알돈자에게 희망을 주기보다는 그녀를 기만하는 것에 가깝다. 우리가 나를 봐주는 상대에게 감동할 때는 아무도 알아채주지 못한 나의 본모습을 보아주고 진심으로 공감해주었을 때지 상대가 보고 싶은 대로 - 그게 어떤 고귀한 대상이라도- 보았을 때가 아니다. 돈키호테는 알돈자의 인생이나 상황에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당연히 알돈자의 아픔이 어떤 아픔인지 진정으로 알지도 못한다. 그저 자신의 상상 속의 '돌시네아'를 투영해서 보았을 뿐이고 알돈자를 도와준 일 또한 자신의 레이디 둘시네아를 구하기 위해 한 일이지 알돈자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알돈자는 처음 받아보는 호의가득한 돈키호테의 행동에 흔들린다. 노새끌이들에게서 구해준 것에 고마움을 느꼈고, 그래서 자신을 희롱하던 이들이라도 '심성 착한' 둘시네아는 그런 이들마저 보살펴줘야한다는 돈키호테의 말에 기꺼이 그렇게 행동한다. 하지만 그 행동의 결과는 집단윤간이었다.


 알돈자의 사건은 굉장히 폭력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의 존재가 얼마나 망상에만 빠져있는 기만적인 존재인지 알려주는 사건이었다면 어느정도-시대보정을 통해-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알돈자는 현실을 직시한 충격으로 죽기 직전의 상태에 놓인 돈키호테에게 다시 찾아온다. 자신의 그의 공주 둘시네아라면서 그의 기사, 돈키호테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열변한다. 돈키호테로 살았던 시간이 꿈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돈키호테는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알돈자는 그 후로 '둘시네아'로 살아가기로 한다. 알돈자의 선언은 그가 꿈꿨던 기사의 삶이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불가능했음에도 아름다운 꿈이었다고 못 박는다.


 마지막 알돈자의 행동변화에서 그녀의 역할은 분명해졌다. 돈키호테의 꿈을 정당화하는 도구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 변화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알돈자의 행동변화에 힘입어 세르반테스(=돈키호테)가 재판을 받으러 가는 마지막 장면에는 그의 희박한 꿈(돈키호테 이야기)을 응원하는 죄수들의 합창으로 희망차게 끝이 난다. 돈키호테의 꿈이 긍정적인 것으로 끝까지 끌고 간 것이다.



출처_오디컴퍼니


하지만 이 극을 보고 난 후의 감정은 희망찬 감격이 아닌 이상한 찝찝함이었다. 서사의 아이러니는 관객과의 큰 간극을 만들어내고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알돈자의 서사가 그 중심에 있었다. 자신의 편의대로 이상향의 여자를 덧씌워 바라본 남자에게, 오히려 그 애매한 도움이 더 큰 불행을 낳았다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를 '레이디'로 보아주었다는 이유로 다시 그를 찾아왔다는 이 결말에 지금 어느 여성이 동감할 수 있을까? 알돈자를 둘시네아로 변모시키는 '창녀-성녀'프레임이 작동하고 그를 구해준 남자 또한 판타지에 갇힌 사람인 이 서사는 이제는 죽은 서사다.


 돈키호테의 주요 메시지는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포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관객들은 오히려 알돈자의 이야기에 이입하게 된다. 시궁창같은 인생, 누구보다 인간답게 살고싶은 그녀의 꿈은 나와 더 닮아있다. 알돈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정말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돈키호테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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