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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 Mar 07. 2021

[공연리뷰] 신은 없다. 책임 질 나만 있을 뿐.

연극 <파우스트 엔딩> 리뷰





 파우스트를 읽어보진 않아서 이걸 보러가도 되나 망설였지만 어쨌든 시작을 해봐야 남는게 있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충동적으로 표를 예매하고(이 시기엔 좋은 자리가 없더라) 쏟아지는 비를 뚫고 명동예술극장으로 향했다. 


 서울에 온지 몇 년 안됐긴 하지만 명동이 이렇게나 텅 빈 건 처음 봤다. 임대를 써 붙인 곳도 꽤 많이 보였고 포장마차 하나도 발견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의 어깨를 피하면서 걷지 않아도 되는 명동 거리라니... 

 그래도 중앙에 위치한 명동예술극장이 의연하게나마 버티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미지 출처 - 국립극단




 이번 국립극단의 <파우스트 엔딩>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건 파우스트가 여자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출연 배우가 여배우인 것이 아니라 극 중에서의 파우스트가 여성이다. 최근 공연계에서 시도하는 젠더프리 캐스팅 중 하나인 셈인데, 개인적으로는 젠더프리 캐스팅을 한 작품은 다른 이야기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몸만 여성이고 행동과 사고방식은 남성의 전형적인 것으로 가져간다면 단순히 성별만 바꾼 것일 뿐 전혀 새로운 것도 없고 굳이 성별을 전복시킨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파우스트 엔딩>은 국립극단 작품인 만큼 그렇게 안일하지 않았다. 파우스트가 여성으로서 원작과 다르게 펼쳐지는 지점은 그레첸과의 사랑인데, 그 관계가 원작과는 훨씬 이해가 갔던 교감이었고 지금 시대의 결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부터)파우스트 역의 김성녀 배우, 메피스토 역의 박완규 배우(이미지 출처 - 국립극단)





 파우스트와 그레첸이 긴 시간 눈을 맞추는 장면이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여러 감정이 들었던 것 같다. 긴 세월을 산 여성인 파우스트가 어린 그레첸에게서 느꼈을 복합적이고 미묘한 감정들은 미혼모로서의 쉽지 않을 미래에 대한 연민 혹은 공감, 오랜 시간 지식만을 파고들며 느껴보지 못했을 모성애에 대한 궁금증, 혹은 새로움 등이 섞여있지 않았을까. 그레첸도 파우스트에게서 같은 여성으로서 느낄 수 있는 공감의 감정, 나이든 지식인에 대한 든든함과 안정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 사이의 감정은 여러 겹의 빛깔로 쉽게 사랑이라고 단정짓기 어렵게 느껴졌다. 심지어는 언뜻 그 감정이 지금 시대 여성들이 서로를 보며 느끼는 연대의 감정과 비슷한게 아닐까. 그렇게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숭고한 사랑은 메피스토의 농간이 더해져 파우스트의 그릇된 욕망으로 깨어지고 만다. 파우스트에게는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만족감을 주는 듯 했던 사랑은 쉽게 깨어졌고 그 순간에 제자들은 '완전한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며 같이 힘을 보탤 것을 종용하며 파우스트를 꾀어낸다. 일생동안 탐구해 온 것이 인류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파우스트는 쉽게 제자들과 동조한다. 


 인간에 대한 완전한 이해, 완전한 인간에 대한 욕망을 표출하는 바그너와 다른 제자들의 광기를 보면서 과학 기술에 열을 올리는 지금 사회가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목표점은 달라도 자신이 얻은 지식과 과학이 사람 위에 있는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우리에게 이데아를 만들어 줄 것 마냥 맹신하는 것이 딱 지금 시대와 다를게 뭔가. 당연히 그 과정에서 윤리따윈 없다. 


  결국 그레첸이 낳았던 아이가 실험의 재료로 쓰여 호문쿨루스라는 인간도 아닌 인간 같은 것이 태어나고, 제자들은 들개가 되고, 그레첸도 죽고,,,,,




보아라 파국이다......



 이런 상황에 도달했는데도 불구하고 원작에서는 그럼에도 노력했기 때문에 선하다라고 여겨지고 구원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파우스트 엔딩>의 파우스트는 구원을 거부한다. 자신이 저지른 비극을 통가하고 계약대로 영혼을 메피스토에게 판다. 책임을 지고 직접 지옥으로 가는 결말-제목인 파우스트 엔딩-에서 이 작품이 하고 싶은 말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현 시대에서 '책임'은 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자율성을 갖게 된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신이 있어 내 죄를 사하고 삶을 구원해줄 절대신이 있었고 천국으로 가는 게 행복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절대신이 없다.

  맞다. 신은 없다. 이 작품의 신도 그렇게 절대적이거나 위엄있게 그려지지도 않는다. 심지어 중세시대의 신 처럼 인간을 그리 사랑하지도 않는다. 단순히 칭송받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할 뿐. 파우스트가 지옥으로 가도 큰 낙담 하지 않았고 인간이 아닌 자신을 칭송해 줄 호문쿨루스라는 존재가 나타나자 또 그에게 애정주는 척 하며 희희낙락하는 모습이란. 

 이젠 인간의 죗값도 인간이 정하고 인간이 벌한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퍼진 이래로 우리의 행동은 자유로워졌고 신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졌다. 하지만 이 변화가 더 나은 세계를 가져다 주었냐하면 아무도 당연히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은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처벌 수단이 법이라는 제도로 바뀌었을 뿐. 

 새삼스럽지만 당연히 법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 권력있고 돈 많은 이들에게 법은 거추장스러운 규제일 뿐이다. 옛날에는 그런 죄인들을 신이 지옥에라도 버릴거라 믿었지만 지금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은 점점 엿가락마냥 얄량해져가고 돈과 권력이 자신의 구원줄이 되었으니. 자유로워진 인간은 그만큼 져야 할 책임도 많아졌지만 그 책임은 자본주의 계층에 따라 상대적으로 짊어지게 된 사회다. 

 그래서 파우스트가 직접 지옥으로 걸어들어가는 결말은 우리가 져야 할 의무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행동. 단순히 인간이라는 이유로 방황할 수 밖에 없으므로 구원을 받을 게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게 이 작품의 가장 큰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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