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서부터 출발한다. 작가는 무심코 쓴 '결정장애'라는 말을 왜 쓰냐는 물음을 듣게 되었다.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닌 잘못에 대한 지적에 가까운 물음이었다고 한다. '결정장애'는 왜 잘못된 표현인가. 전문가의 말로는 '장애'는 언제나 비하의 표현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렇게 '장애'를 포함한 비하 단어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장애인을 "부족하고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작게 보면 사소한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단어를 '사소하다'라고 여기는 순간 이 문제를 축소시킨다.
'공정'을 표방하는 우리나라 사회를 떠올린다. 하지만 '공정'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 되어 보이지 않는 차별과 배제된 소수자들이 있다. 그리고 차별을 공고히 하는 차별적, 혐오적 단어들이 있다. 우리는 그런 교묘한 것들을 인지하기 어렵다. 우리의 판단과 사고를 흐리는 것들은 왜 있는 것일까, 배경은 무엇일까. 그 원인을 찾아 이 책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왜, 왜, 왜?
나에게 답을 알려주세요.
누구나 그런 것처럼, 나도 차별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 자유의 가치를 배우며 자랐다. 이러한 가치들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인류가 꿈꾸는 미래이기도 하다.
그래서 차별을 경계하고 변화에 목소리 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번번히 외부에서, 내부에서 태클을 거는 반문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남녀 임금 차별을 문제삼으면 사실을 부정하고 여경 사례를 들고 오며 임금 차별은 능력에 따른 차이라고 얘기한다. 또 여성할당제에는 역차별을 이야기한다. 성소수자에게는 자신들에겐 싫어할 권리가 있음을 얘기한다. 장애인들을 위한 제도와 시설의 부족에는 자원의 부족을 얘기한다.
이런 반론이 들어올 때마다 말이 막히는 나를 발견했다. 논리적으로 말하는 능력은 둘째치고서라도 자신있게 말하려 해도 아는 것도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또 쉽게 말했다가 함부로 말한게 될까싶어 차라리 입을 닫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반가웠다. 누가 이 미묘하고 교묘한 말들에 반박을 해줬으면 했다. 천성이 조금 게을러 누가 쉽게 정리해놓으면 나는 그걸 익히기만 하면 된다는 속마음도 조금 첨가해서. 물론. 감사의 인사도 같이 드린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작.창비.
새로 알게 된 것들.
개인적으로 가졌던 물음에 대한 답은 물론이고 자기반성을 하게 해준 내용들이었다. 책은 차별이 왜 발생하는지부터 여러 차별에 대해 통계와 자세한 설명들과 앞으로의 미래도 제시한다.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조금씩 정리해 보았다.
1. 차별은 '교차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은 같지 않고 흑인 남성과 흑인 여성은 같지 않다. 내가 처한 상황에 다라 차별은 유동성이 있다. 20대 여성인 나는 때론 비장애인으로 장애인에 비해, 대한민국 국민으로 이민자에 대해 다수자이기도 하고 여성으로서 소수자이기도 하다. 차별은 단순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없다.
2. '다르다'라는 말은 사실 차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에 대해서만 '다르다'라고 표현한다. 다문화라는 말이 결국 차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3. 권력자의 말과 일반 시민의 말의 무게가 같지 않다는 것.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쉽게 공격할 수 있지만 소수자는 다수자의 눈치를 보며 표현을 순화시키고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 의견을 이야기한다(자유론).
4. 공공공간에서는 권력이 작용한다. 인종, 성별, 국적 출신 등은 기표가 되고 이 기표에 따라 공공공간에 입장 여부가 결정된다. 소수자들은 공공공간(옛날에 아고라라고 불렸던)에서 배제된다. 그래서 퀴어들은 '퀴어들을 위한 축제'에 나선다. 축제를 통해 거리에 나서 우리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직접 목소리 내 외친다. 이 거리를 우리도 걸을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왜 굳이 축제를 하나요?'라는 질문은 굉장히 모순적이다. 촛불집회는 왜 할 수 있었는가. 아무도 집회 참가자들에게는 물어보지 않았으면서 퀴어들에게는 하는 질문들이다.
5. 능력주의 사회의 '공정'은 치명적인 함정을 가지고 있다. 사실 '공정'을 강조하는 이들은 자신이 경쟁에서 쏟은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이 논리는 결국 '실패', 즉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들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이를 답습할수록 부와 가난의 대물림은 심해질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대우가 심각하게 다르고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교육 접근성은 현저히 차이가 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단순히 '개인의 선택'으로 볼 수 없다.
6. 유머의 함정. '우월성'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이의 약함, 불행, 부족함, 서툶을 볼 때 즐거워"한다고 한다. 비하성 유머는 이 우월성 이론을 바탕으로 소비된다. 문제는 이 비하성 '유머'를 사용하면서 차별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 유머의 방향이 약자에게 향할 때는 더욱 심각해진다. 하지만 우리가 그 비하대상의 집단에 속할 때는 전혀 유쾌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덧붙여서+) 얼마 전 블랙페이스를 유머로 소비한 일에 대해 유명인 샘 오취리가 비판하자 오히려 네티즌은 그에게 그저 '유머'일 뿐 오히려 사과를 요구했다. 결국 샘 오취리는 사과를 했다. 차별을 한 이들이 피해자에게서 사과를 받아낸 아주 절망적이고 멍청한, 사례다.
더 나은 미래를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차별을 하기 위해선 차별의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이 언급하듯 차별을 억제하기 위한 행동들이 '사회적 합의'라는 이유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렇게 지적한다.
다수결의 한계에서 발생한 차별을 다수결로 해결하는게 가능할까.
정말로, 모순적인 이야기이다. 다수자에 의한 피해자가 존재하고 실제적 피해 사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수자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웃기다. 물론 적극적 조치를 행했을 때의 큰 반향이 부담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그 부담이 결국 상황을 방관하는 것이 되면 안된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사는 사회는 평등과 인권을 중심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고 또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 그 희망을 전제로 우리는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이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자신이다수자여도 언제나 불의의 사건으로 소수자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때가 되어서도 같은 인간으로 대우받기 위해서, 차별은 적극적으로 경계해야 하고 사라져야 하는 우리의 관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