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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Dec 22. 2023

내 손은 어디에

윤석남 개인전 후기 2

2. 손가락이 잘린 작가, 팔이 잘린 화가


껌벅껌벅 커서가 세로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 초들을 바라볼 때가 있다. 쓰고 싶은 말이 있다. 하나의 문장을 쓴다. 읽어보니 쓰레기라 ‘backspace’ 키를 눌러 지운다. 새로 쓴다. 읽어보니 고약한 냄새가 나서 지운다. 짧은 문장으로 압축한다. 읽어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지운다. 친절함을 문장 속에 담아 긴 호흡으로 문장을 늘린다. 읽어본다. 지루하고 쓸데없는 단어들이 서로 새치기를 하겠다고 난리를 쳐서 질서가 전혀 없다. 지운다. 이제는 내가 무슨 말을 쓰고 싶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대체 쓰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인지 의심스러워진다. 껌벅껌벅 커서가 세로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내 손은 어디에


손가락이 있으되 손가락이 잘린 기분이 드는 요즘이었다. 그런 내게 드로잉 한 점이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 등을 토닥여줬다. 그림 속 주인공은 팔이 잘려 없는데도 말이다.


2001년이면 윤석남은 스무 해 이상 작업활동을 꾸준히 하고 전시도 여러 번 하고 상도 받은 때였다. 그런 그가 슬럼프를 맞았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내 그림이 세상에 어떤 쓸모를 줄지 불안했고 흔들렸다.


나를 부끄럽게 혹은 희망차게 만들었던 것은 그 불안들을 계속해서 드로잉했다는 것이다. 사랑과 사랑에 대한 기억, 이별과 쓸쓸함에 대한 추억,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존경, 예술과 내 작품 사이의 접점, 예술가와 윤석남 사이의 간극을 냉정하게 바라보려는 간절함, 그는 그 고통의 시간조차 그림으로 채웠다. 그것이 그의 성실함이 낳은 아기들이다.     


“규칙적인 습관처럼 매일 꾸준히 그리고 어떤 날에는 몇 장씩도 그렸다. 그런 시기를 거치고 나니 그는 작업이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고 손을 쓰며 스스로를 단련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시관 소개글 중에서)    


수백 점의 드로잉 중 팔십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의 팔 없는 팔이 그려낸 작품이다. 나의 경우 작품을 만들려고 하니 머리만 아프다. 지금 쓰고 있는 것이 작품이 아니라 그냥 체력단련 훈련이라고 생각하며 그저 오늘도 적는다. 세로 커서가 네모 단추로 커져서 자꾸자꾸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좋다. 손가락이 없어 못 쓰지 않는다. 쓰고 있다면 손가락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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