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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May 20. 2024

오늘의 해부

글쓰기가 낚아 올린 과거의 나들

아침에 봉이를 깨우면서 나도 일어나 몸을 움직였다. 오랜 경험으로 우리는 안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머리를 움직이면 절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는 걸. 졸려 눈을 감은 채여도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기 물을 틀어야 씻고 머리 말리고 스킨로션 바르고 선크림까지 바른 뒤 옷을 입고 출근길에 나설 수 있다는 걸. 

딱히 출근할 곳이 없는 나로서는 눈이 감기면 그대로 눈을 감고, 샤워 물줄기가 맞기 싫으면 머리띠로 머리를 넘기고 가벼운 세안만 했다. 요새 늘어진 나를 일으켜 세울 외부 힘은 딱히 없었다. 처음 입주를 했던 서재가 내 출근지인데, 사장도 나고 전무도 나고 부장도 나이다 보니 웬만하면 재택근무요 현장퇴근이었다. 정확하게는 ‘근무’는 없이 ‘재택’만 있고, ‘현장’은 없이 ‘퇴근’만 있는 생활이랄까. 그런 내가 오늘은 백팔십도 달라졌…냐고?


그럴 리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퇴사를 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아이들이 등교를 하면 청소기로 집 안을 한번 밀고 세안과 양치를 대충 한 뒤 헐레벌떡 책상 앞에 가 앉았다. 9시 출근 시간을 집에서도 똑같이 지켜야 마음이 편했다. 십오 년간 직장인으로 살았던 몸에 밴 습관이었다. 아이들이 돌아오는 시간 전에 간식 준비할 한 시간을 계산하면(심지어 내 점심시간을 아이들 간식 준비하는 시간에 엎었다. 나의 점심시간, 아이들 간식 준비 시간,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가…라고 3년 전의 나는 생각했다. 꽉 막힌 부장님 마인드 아닌가.) 오후 1시까지가 내가 가용할 수 있는 업무 시간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네 시간을 나를 위한 글을 쓰는 시간으로 사용했다. 

그때의 글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나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던 일기였고, 다른 하나는 매일 정한 주제에 대한 가벼운 수필을 한 편씩 쓰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인스타그램 광고 하나에 낚였는데, 글쓰기 초심자들이 강제로라도 매일 한 편씩 글을 써서 책을 만들어 준다는 내용이었다. 글쓰기 회사에서 매일의 미션 주제를 새벽에 이메일로 주면 나는 그걸 가지고 하루 동안 글을 쓰고 제출했다. 나는 그때 회사를 떠나 나를 위한 작업이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원기충천한 상태였다. 


일기를 쓸 때 나는 진심이었고, 쓰면서 많이 울었고, 일하고 애 키운다고 잊었던 내 삶의 앙금들이 뿌옇게 일어나는 걸 확인했다. 

한편 매일 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한 편의 글로 완성하는 일은 일기와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렇다고 미션 주제가 다 맘에 들어서라고 생각지 말라. 그와 정반대였다. 만약 30개의 주제라면 그중 맘에 안 드는 주제가 29개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떤 주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아서, 어떤 주제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 쓰기는커녕 내버리고 싶은 주제여서, 어떤 주제는 쓰면 쓸 텐데 쓰더라도 매우 작위적인 내용이 될 것임을 뻔히 알아서 등 맘에 들지 않는 이유는 정말 다양했다. 하지만 숙제가 무엇인가. 싫어도 해야 하기 때문에 숙제가 아닌가. 나는 거의 매일 억지로 그 주제에 관한 짧은 수필을 써 나갔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거부하고 싶은 주제일수록 그걸 일단 쓰기로 작정하고 써 내려가면 할 말이 많아서 제한 분량을 훌쩍 넘어갔다. 무언가가 ‘좋다’는 마음보다 더 깊은 감정이 ‘싫다’라는 감정임을 그때 오롯이 깨달았다. 좋아하는 이유보다 싫어하는 이유가 백 배는 많고, 구구절절하고, 일단 싫어하게 되기까지 여러 감정의 파도가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고나 할까. 싫어하는 마음을 직시하고 왜 그렇게 싫은지에 대해 죄수가 탈옥하기 위해 숟가락으로 구멍을 파듯이 집요하고 절실하게 매달리다 보면 알게 된다. 내가 싫어하게 된 그 이유를 말이다. 

그런 순간이 오면 나는 제출용 수필과 별개로 나만의 수필을 썼다. 분량에서 자유로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글을. 그것은 일기 같기도 했지만, 그저 일기는 아니었다. 그 주제에 대해 파고들어 가보는, 그러다가 빛이 새 나오는 탈출구로 완성되는, 결말이 있는 수필이었다. 

꽉 쥔 주먹을 펴면 손가락 사이로 풍경이 들어온다. 옆에 있던, 그러나 놓쳤던. 2023년 부산시립미술관 

결말. 대체 그 결말이라는 것이 무언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은 현재의 지금 내 모습에 갇혀 있는데, 소설처럼 내 소망이나 저주를 담아 주인공의 현재를 바꿀 수도 없는데 과연 수필에서 결말이란 무언가.

그것은 내게 성찰과 통찰이었다. 내가 왜 이런 현재를 맞게 되었는지에 대한 성찰. 내가 왜 그것을 싫어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또렷이 알게 된 통찰. 더불어 나의 생각 회로가 왜 그런 모양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깨달음. 그것은 나와 동일한 생년월일을 가진(그래서 같은 사주팔자를 가진) 자여도 나와 같은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와 같은 대학의 같은 과를 나온 사람이라도 나와 동일한 오늘을 갖춘 사람으로 서 있을 수 없다는 자각이었다. 나라는 사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에 대한 뒤늦은 조망.

보고 싶다, 아니 보지 못해 다행인가. 과거를 드러낸 나의 장기들. 

해부된 오늘을 마주하는 일은 무척 끔찍했다. 속이려 해도 드러나는 뼈대와 장기들이 내 아집과 질투와 분노와 열등감과 외로움과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망과 허영심과 자존심과 게으름과 용기 없음과 불평과 원망과 잘난 체와 핑계들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날카로운 송곳이 꺾여 있는 모습에 왜 민망했을까. 왜 다행이었을까.

처참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게 내가 아니라고 소리치고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번 실체를 드러낸 오늘은 집요하게 나를 붙들고 늘어졌다. 처음엔 도망치는 내 발목을 잡더니 긴 팔로 지방기 가득한 내 허리를 휘감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사각의 내 턱을 꽉 틀어쥐더니 고개를 꺾어 돌려서는 내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쑥 들어간 눈에서 이글거리는 빛을 뿜어내며 물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내 미래를 책임져.”


목소리는 갈라지는 저음의 기계음이었다. TV 프로그램 <먹찌빠>에서 미션을 지령하는 목소리. <오징어 게임> 속 목소리를 패러디하며 나온 그것.

목소리는 긴 총을 장전하며 목숨을 걸고 신중하게 답을 선택하라고 내게 요구한다. 나의 선택이 그의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 

내가 목소리를 책임질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오늘도 바다에 나가 고기를 낚아 올리는 일. 광어일지 우럭일지 돔일지 모르지만 일단은 바다에 나가 낚싯대를 드리우는 일.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먹고살기로 하였으니 오늘도 담담하게 글 바다에 나가 글을 쓰는 일을 하는 것이다. 


“쓸게요”


목소리는 총을 거둔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일이면 목소리는 다시 내게 총을 내밀며 똑같이 물을 거라는 걸. 자신의 미래를 책임질 너의 선택이 뭐냐고 물으리라는 걸. 내 대답 또한 같다. 변할 수 없다. 그것이 오늘의 나의 전부니까. 

매일 부서진 오늘을 고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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