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 '불편한 미술관', 창비
성경은 미술사에 있어 중요한 소재다. 성경에 등장했던 일화, 예수의 제자들은 각자 지닌 도상이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도 마찬가지다. 가령 거울과 함께 등장하는 나체의 여성일 경우 미의 여신 비너스를 드러내는 도상이며, 긴 머리카락으로 몸을 감싸는 경우 막달라 마리아를 나타내는 도상이다. 여기, 미술사에 중요한 도상이며 여러 화가의 시각에 의해, 그림을 향유하는 계층에 의해 다양하게 그려진 도상이 있다. 도상의 의미와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쩐지 불편하기도 할 이야기, '수산나의 목욕'을 소개하고자 한다.
수산나는 바빌론의 부유한 귀족 여성이다. 어느 더운 날 홀로 목욕을 하려는데 두 재판관이 몰래 다가와 성관계를 강요하였다.
"자, 정원의 문은 닫혔고 우리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도. (...) 만일 거절하면 부인이 젊은 청년과 정을 통하려고 하녀들을 내보냈다고 증언하겠소."
수산나는 원치 않았다. 그러나 수산나는 혼자고 덕망 있고 권위를 지닌 재판관은 두 명이나 된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그림을 사는 주인은 둘 다 남성이었던 시대에 수산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 당시의 권력 있고 신뢰받는 계층의 두 남성이 한 여성을 겁탈하려는 순간, 여성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수산나는 때로 두 남성을 유혹하는 모습으로도, 혹은 유혹당하는 탕녀로 그려지기도 하며 괴롭고 두려워하는 피해자의 스테레오타입으로도 그려진다.
'성폭력'이라는 주제로 수산나 일화와 그림을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성폭력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성폭력은 성적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지배 욕구의 문제라고 한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힘으로 제압하여 자기 말을 듣게 만들려는 짓이라는 것이다.
-p. 84, '성폭력, 성적 자기 결정권의 침해' 중에서-
수산나와 두 노인은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는 주요 계층인 남성의 시각에서 향유되었던 그림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바라본다면 성적 자기 결정권을 지키려는 수산나를 어떻게 바라보았느냐에 따라 그림의 감상 포인트와 작가의 의도가 달라진다.
'수산나와 두 노인' 도상은 매우 다양하게 그려졌다. 렘브란트는 드물게 피해자 수산나에 초점을 맞춰 그림을 그린 작가이다. 어떠한가. 그림 속 수산나는 관객을 향해 똑바로 바라본다. 이 상황을 보고 있는 당신, '어서 구해주세요!'
그러나 이러한 수산나의 시선은 당시의 귀족들에게는 불편했을 것이다. 아래의 그림을 살펴보자.
화가들은 피해자의 간절한 시선보다 껄떡거리는 남자들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더욱 편하게 느꼈던 것 같다. 게르치노의 그림에서는 두 노인 중 한 명은 그림을 보는 관객에게 튀어나올 듯이 묘사되었다. "우리 함께 훔쳐보자! 쉿, 당신과 난 공범일세."라고 말하는 듯하다. 수산나는 대상화돼 피해자로 표현되어 철저하게 관객에게서부터 고개를 돌렸다. 여성은 언제나 희생되고 나약한 존재로 고정된 채 그려진다. 스테레오타입으로서,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위한 대상으로서 타자화된다.
다양한 미술사에서 드러난 여성의 인권에 대한 짤막한 예시일 뿐이다. '불편한 미술관'은 이제껏 아름답게 향유되던 미술 속 인권의 개념을 되짚으면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저자는 미술 작품을 소재로 하여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왔으며 현재 진행형으로 논의되는 여성, 장애인, 성적 소수자, 빈곤에 기인한 사회권에서부터 답하기 어려운 최근의 인권 개념에 대해 다양하게 다룬다.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종주의, 혐오표현, 세대 갈등, 고령화 사회로 인하여 촉발되는 다양한 인권 갈등의 소재까지. 책은 포괄적인 주제를 딱딱하고 거부감이 들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미술과 시사성 있는 주제와 함께 책의 끝까지 힘 있게 이어져서 독자들이 몰입하기 쉽게 구성되어 있다.
더불어 그림을 감상할 때 그림에 그려지는 등장인물의 시선, 구도에 따라 작가의 의도가 어떻게 달라지는 점에 대해 다뤘다는 점에서 인권과 관련된 사회학 책이 아닌 '미술'과 '그림'을 다룬 예술서라고 충분히 느낄 수 있어 매력적이다. 앞서 소개한 '수산나와 두 노인'의 경우 각각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산나의 시선, 모습과 두 노인의 표정과 몸짓을 이야기하면서 작가마다 표현하고자 했던 핵심 주제를 알 수 있어 작품을 이해할 때 어떤 시선으로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있다.
판화를 주로 하던 케테 콜비츠도 '피에타'를 조각으로 만들었다. 그의 아들 페터가 1차대전에서 전사했다. 케테 콜비츠는 그 고통을 지울 수 없었다.
(...)
이 작품을 마뜩찮다는 반응도 있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어째서 한낱 개인의 슬픔만 보여주느냐며 트집을 잡았다나. 글쎄,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 슬픔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p. 120-121, '제노사이드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중에서.-
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게 불편해한다. 혹자는 말한다.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소수야." 그러나 개인의 슬픔이면 충분하다. '전쟁'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적인 필연성을 논하기 전에, 참전했던 개개인은 모두 하나의 고유한 삶이었으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온전한 존재이다.
우리는 잔인한 뉴스와 너무 많은 통계에 따른 큰 수치에 익숙해져서 한 명 한 명 개별적 존재를 향한 존중을 잊을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각자의 온전한 세상이 타인의 삶과 비교되어 더 가볍고 가치 없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인권이란 그러한 것이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의 무게를 가늠하고 판정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 무수히 많은 개인을 보편화하여 바라본다. 그 사람이 지닌 고유성과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품위와 기본 예의를 단순히 대상화하여 바라본다. 남성이니까, 여성이니까, 흑인이니까, 무슬람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지닌 몇 가지 속성을 확대 해석하여 특정한 역할을 부여하고 그에 맞는 시선을 강요하는 고정관념이야 말로 혐오의 시작이며 반인권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면서 일상을 불편하게 하는 책. 인권이란 어쩌면 삶을 마주하는 우리의 삶의 태도에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편함이 있어 편안함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함께 읽는다면 더욱 많은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 기대하며 그림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선물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