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접촉’ 성폭력의 악독함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 마련
지난달 미국 방송매체 CNN에서 가상현실(VR)에 ‘개인 경계선(personal boundary)’이 도입될 예정이라는 흥미로운 기사를 접했다. 페이스북의 모회사 메타플랫폼이 소셜 VR 서비스인 ‘호라이즌 월드(Horizon Worlds)’와 VR 영상 플랫폼인 ‘호라이즌 베뉴(Horizon Venues)’에 아바타 간 약 4피트(1.2m) 거리의 ‘안전 거리’를 적용하기로 했다는 뉴스다.
이는 성희롱이나 스토킹, 인신 모욕 등 아바타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불미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처이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서비스 중인 호라이즌 월드와 호라이즌 베뉴의 회원 수만 30만 명을 상회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와는 또 다른 결의 ‘거리두기’가 가상현실에서 고안된 것이다.
A 아바타와 B 아바타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제는 가상현실에서 A 아바타가 B 아바타에게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도 일정 경계선 내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선 넘는 행동’이 원천 차단된 것이다.
지난해 말 메타플랫폼에 불유쾌한 일에 따른 신고가 접수됐다. 호라이즌의 한 사용자는 일면식도 없는 어떤 이용자의 아바타가 자신이 사용하는 아바타의 신체를 더듬는 기이한 광경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이는 신고로 이어졌고, ‘4피트’짜리 최소한의 보호 영역이 만들어지게 된다.
가상현실에서까지 무슨 성희롱과 성폭행을 운운하냐며 개인 경계선의 도입이 과도한 처사라는 비판적인 의견 제기도 곳곳에서 감지된다. 필자는 이에 찬동하기 어렵다. 가상현실에서의 성희롱은 아바타가 성범죄를 당하는 모습을 봐야 하는 시각적 고통에 그치지 않는다. 음성채팅 기능(청각)을 통해 입에 담기도 어려운 모멸적인 말로 상대를 괴롭힐 수 있고, ‘햅틱(haptic) 조끼’ 등을 통해 촉각까지 구현할 수 있다. 미각, 후각으로까지 VR 기술이 진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말 그대로 오감을 활용해 가상현실에서의 감각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첨단기술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쓰이면 체험 요소를 강화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데, 성희롱, 인종차별 등과 같은 저열한 범죄로 이어지면 그 부정적 여파가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2016년에 가상현실 게임인 ‘퀴버(QuiVR)’를 즐기던 한 이용자가 게임 중에 성추행을 당했다는 글을 필명으로 올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실제로 성희롱을 당해본 경험이 있었는데, 충격과 수치심은 실제공간에서든 가상공간에서든 진배없었다는 말을 남겼다.
런던과 워싱턴에서 활동 중인 국제 비영리단체 ‘디지털혐오대응센터(CCDH·Center for Countering Digital Hate)’의 조사 결과는 적이 놀랍다. 그들은 “페이스북의 메타버스는 안전하지 않다”는 제목으로 업로드한 동영상에서 CCDH 연구진이 발견한 유해한 콘텐츠들이 너무 충격적이라 자세히 공유할 수조차 없다고 말했다. 미성년자를 포함한 메타버스 사용자들은 무려 7분에 1번꼴로 성희롱과 괴롭힘, 인종차별 등에 무차별하게 노출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메타버스 플랫폼인 ‘로블록스(Roblox)’에서는 아동 성범죄 전력이 있는 남성이 어린이들에게 성희롱 메시지를 보낸 혐의로 구속되는가 하면, 옷을 입지 않은 캐릭터끼리 부적절한 관계를 맺거나 집단 괴롭힘을 일삼는 등의 흉악망측하고 불가해한 게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기술의 변화 속도에 법과 윤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국내로 눈을 돌려보자. 글로벌 누적 가입자 3억명을 돌파한 네이버의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는 성범죄의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을까? 이용자의 대다수가 10대라는 점과 법적인 처벌이 쉽지 않은 구조를 고려하면, 다양한 형태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비접촉’, ‘비신체적’ 성폭력도 신체적 성폭력과 마찬가지로 피해자에게 큰 상처를 가하는 악독한 범죄행위이다.
메타플랫폼이 설정한 ‘경계선’은 현시점에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젠 가상세계에서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선’ 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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