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프

by 은규

지울 수 있어서 좋다. 어쩌다 글자는 빨리 달아나는 것을 쫓아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날지 못하는 새가 푸드덕 거린다. 완전하지 않고 배열도 서지 않은 다급해진 글자는 길을 잃는다. 잰걸음으로 달리지만 자주 잊어버린다. 생각은 번개의 잔상. 눈을 감지마. 깜박. 머물렀던 사랑은 반짝였다가 꺼진다. 내렸다가 녹았다.

딸깍딸깍. 뒤통수를 눌러 마음을 밀어낸다. 써야 할 의무가 그에겐 있다. 곧으나 허약하다. 책에 밑줄을 치고 메모를 한다. 샤프의 공간은 임대. 0.2mm 차의 더 부드럽고 가는 것을 선택한다. 좁은 곳을 비집어 타인의 기록에 사유를 곁들인다. 무엇인지 모르는 늦음이 빈집 위로 내려앉아

둥글게 짙어질 때 샤프는. 딸깍딸깍, 위태롭다. 헛발질에 발목을 삔다. 굳음과 허약함을 동시에 지닌 자.

잘못 쓴 글자는 지워진다. 검은 얼룩이 먼지처럼 남는다. 도드라지지 않는 음각. 좁디좁은 품은 또각또각 걸어가는 글자를 잉태한다. 지워내지 않아도 되는 글자.

너의 꿈은 샤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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