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개념 자체가 없는데...
그럭저럭 경기광주에서 산 지 10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동네 도서관 발전을 지켜보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처음에는 기대보다 괜찮다는 정도였는데, 어느덧 시립중앙도서관만 해도 10만 권이 넘는 장서를 보유한 곳이 되었지요. 그동안 지역 도서관과 작은도서관도 많이 생겼습니다. 물론 아직도 부족한 상태지만요. '15분 도시'라는 말이 있는데 걸어서 15분 거리에는 도서관도 포함되는 게 맞습니다.
가끔 도서관 강좌 소식을 카톡으로 받는데 이런 게 왔더군요.
'톡! 톡! 세계 4대 문명 스토리 : 세계 4대 문명의 탄생과 발전을 스토리텔링으로 이해해보아요 - 교육 대상 초등 4학년에서 6학년'
하... 한숨부터 나오더군요. 세계 4대 문명이라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아마도 일본 메이지 시대 즈음 서구 학문을 초고속으로 정리해 받아들이던) 개념을 22세기가 멀지 않은 한국에서 아직도 쓰고 있다니 너무나 뒤떨어졌습니다. 일단 '문명civillazation'이라는 개념부터가 학계에서 쓰지 않은지 6,70년이 가깝습니다. '문화cultura'로 통일된 지 오래됐지요. 고대 문명사를 배운다고 하면 또 모를까, 거기에 '세계'라는 말은 오랫동안 나라 문을 꽁꽁 닫아걸고 살아온 조선 후기의 못난 역사의식이 은연중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세계를 알게 됐는데 고대에 4대 문명이라는 게 있더라는 거죠.
고대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황하, 이집트, 인도 4개였다는 식의 관념도 오래 전에 폐기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있었던 문명들을 빼버리고 4대만 잡은 것 자체가 미심쩍지요. 지금도 튀르키예에서 인류의 역사를 엄청나게 과거로 끌어당기는 고고학 발굴이 진행중입니다. 그럴수록 '4대 문명'의 중요성은 점점 떨어져 왔습니다. 일단 그 많은 고대 사회중에서 유독 그 4개만 골라서 배울 이유가 없지요. 분류 체계에도 의문이 많습니다. 강의계획서를 보니 주나라와 제자백가가 있던데 그 부분은 중국 고대사로 분류해야 정확합니다.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라... 이건 문학 카테고리에 넣어야죠. 카스트 제도는 지금도 현대 사회학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어린이 교양서를 볼 때마다 가끔 문제의식이 드는 게, 비전공자들이 책을 쓰고 출판사들이 책을 냅니다. 그러한 모든 책들이 수준이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개중 전공자들이 보면 코웃음이 나오는 수준의 책들도 있습니다. 더구나 '세계 4대 문명'이라니, 외국 대중음악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모 DJ의 라디오 방송으로 한정된 시절 "세계 3대 기타리스트 중 하나인 지미 페이지" 운운 수준의 이야기이죠. 미안하지만 "세계 3대 기타리스트"보다 좀 나은 수준의 어린이 교양서들도 종종 보입니다. 비전공자가 책을 쓰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인 공부가 안 된 수준에서 책을 쓰는 건 일단 시장교란행위입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위 강의하시는 분의 프로필을 찾아봤는데 고대 문명사나 역사 부문에서는 이름이 안 나오더군요. 혹시나 해서 구글 스칼라도 뒤져봤지만, 같은 이름으로 역사 부문 논문 찾는 데 실패했습니다(10페이지까지 뒤져봄). 꼭 책이나 논문을 써야만 강의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남의 집 귀한 자녀들을 가르치려고 나왔으면 관련 영역 전문가가 보아도 '음 열심히 하셨구나'라는 정도의 학문은 닦고 나와야하지 않겠어요? 어린이 대상 영역이니까 이 정도만 알아도 된다는 것인지요? 설마 그렇다면 정말 문제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 한국 아동문학, 어린이책 분야가 상당히 발전했고 예전보다 훨씬 나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어린이 교양서 분야는(특히 역사) 어이쿠 이게 뭐야 싶을 때가 있습니다. 책을 골라주는 부모와 선생의 선구안이 중요한 거죠. 일단 부모와 선생의 교양이 기본적으로 높아야겠지만, 요령을 일러드린다면 되도록 전공자(프로필에 나옵니다)가 쓴 책, 그리고 최근에 나온 책을 권장합니다(도서관에는 의외로 오래된 책이 많습니다). 자연과학은 물론이고 역사나 사회과학도 쉴새없이 새로운 증거가 나오고 새 이론이 정립됩니다. 생각보다 역사적 사실, 특히 현대사는 많이 바뀝니다. 어른들이 자기 어릴 적 배운 지식이 이미 30년이 넘은 거라는 걸 자주 잊어버립니다. 역사학은 학부 첫 시간에 배우는 건 팩트가 아니라 '역사는 관점을 가진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관점이 바뀌면 해석도 달라지게 됩니다. 심지어 증거가 조작된 경우도 허다합니다. '지금 배우는 것은 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학문적 의식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의식을 기본적으로 깔지 않으면 내가 아는 것이 불변의 팩트라고 무의식적으로 주장하고 다니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세계 4대 문명'을 가르치는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