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가 너를 찾아올 때까지 버티기
좋은 주제란 무엇일까? 나는 이걸 식재료에 가끔 비유한다. 여러분은 식재료를 어떻게 고르시나? 싼 거 위주로? 물론 나도 세일칸부터 눈여겨보기는 하지만 세일칸만 보면 맛있는 요리를 못 만든다. 몇 가지 기준이 있을 거다.
1. 신선도 : 먹고 죽거나 아프면 안 됨
2. 제철 여부 :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또 신선할 가능성이 높음
3. 영양가 : 먹고 건강해야 함
4. 나의 선호도 : 맛있어야 잘 먹음. 맛없으면 잘 안 먹게 됨
5. 가격 : 비싼 건 어차피 내가 못 삼 ㅎㅎㅎ
6. 요리의 용이성 : 라면이나 겨우 끓이는 주제에 산 꽃게 따위를 사면 안 됨
이 기준은 의외로 작품의 주제 고르기와 비슷하다. 어떻게 비슷한가 보자.
1. 신선도 : 시대상에 맞는 새로움
2. 제철 여부 : 지금 독자가 요구하는지 여부
3. 영양가 : 교양과 지식이 자연스럽게 들어감
4. 나의 선호도 : 쓰는 내가 흥미없으면 어차피 못 씀
5. 가격과 요리의 용이성 : 너무 어려운 주제면 내가 못 쓰거나 독자가 이해를 못 함
물론 이게 모두 충족되면 좋겠지만 그런 주제는 많지 않다. 게다가 4번과 5번은 늘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최소한 1, 2, 3번 중 두 개 정도는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면 최소 4개다.
'그런데요, 좀 진부한 소재도 재미있게 쓸 수 있잖아요? 그런 소설들 많던데요?'
'(어깨를 꽉 잡고)그분은 천상계의 분이다. 썩은 복숭아를 줘도 와인을 만들어내시는 분이다. 넌 신선한 복숭아를 받아도 먹기밖에 못 한다.'
'아...'
어느 정도 역량이 쌓이면 예전에 많이 다뤄진 진부한 소재도 필력과 시대에 따라 달라진 가치관에 따라 얼마든지 재미있게 쓸 수 있다. 단! 역량이 있다는 전제 하에. 그래서 프로 작가들은 언제나 간을 본다. 내가 이걸 다룰 수 있는가? 요리를 할 수 있는가? 지금 내가 김치를 먹고 싶은데 배추 오십 포기를 주문해도 되는가? 아니, 내가 배추 오십 포기어치 김치를 다 먹을 수나 있는가? 작가 지망생이라면 권유하고 싶다. 그냥 백김치 일 킬로만 딱 주문해서 드세요. 그것도 다 먹을 만치 소화력이 튼튼한지는 그대가 직접 먹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책들을 보면서 주제를 파악하고, 그게 좋은 주제인지 시원찮은지(출판사도 편집자도 실수란 건 하니까) 가늠하는 것도 공부가 된다. 매대에 나와 있다고 다 좋은 책이 아니다. 매대란 돈 주면 누구나 살 수 있는 거니까. 서점에 잠깐 서서 후루룩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실시간으로 쏟아져나오는 신간(마트처럼)들 중 정말 신선하고 맛있는 식재료로 만든 책이 얼마나 되는지 계속 본인의 선구안을 날카롭게 다듬어야 한다. 그걸로 언젠가 셀프 수술을 해야 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