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콧물 쏟으며 본방 사수했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11월 21일에 종영했다. 《동백꽃 필 무렵》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드라마다. 모든 캐릭터들이 입체적이었고, 웃음과 감동, 약간의 스릴과 교훈이 있었던 '유익한' 드라마다. 그래서 이 여운을 아쉬운 점과 좋았던 점을 소상히 기록해보는 것으로 달래려 한다. 이 글은 내용 유출이 파다하므로 마지막 회까지 꼼꼼히 본 시청자들이 읽는 것을 추천한다.
아쉬운 점 첫 번째, "아빠+엄마+아이"라는 사회적 정상가족 프레임을 은연중에 노출한 것.
동백과 필구는 애틋한 모자관계를 이어가며 그 자체로 온전했다. 아빠의 결핍은 그들이 영위한 7년의 삶 속에 종종 드러났지만, 필구의 자아에도 동백의 자아에도 큰 장해가 되지는 못했다.
친부 종렬과 필구의 쓰라린 대담.
그러나 친부 종렬이 아빠가 결핍된 채 자란 필구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은근히 '아들에게는 아빠가 필요하다'라는 정언 명령과 함께. 물론 아빠로서 형편없는 종렬이었지만, 종렬이 미안함을 느껴야 하는 것은 '사회적인 정상가족 프레임에서의 이탈'이 아니다. 그가 참회해야 하는 것은 동백이에게 매몰찼던 과거고, 동백이가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홀로 견뎌야 했던 수많은 나날이다. 이것은 곧 임신 사실을 몰랐다는 이유가 면죄부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종렬은 뒤늦게 찾은 친자 필구에게 온 힘을 기울이는 동안 그와 제시카의 딸 지선에게 몹시 소홀했다. 그런 점은 시청자인 나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가장 싫었던 장면. 용식이 필구를 위해 부정한 심판과 상대팀 코치를 소탕하는 장면.
이 장면이 정말 별로였다. 동백이 해결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굳이 용식이 등장해서 필구의 편에 섰다. '남자는 남자가 상대해야 한다'라는 은근한 플롯이었다. 동백의 무력한 모습을 보는 게 아쉬웠던 것도 잠시, 이 장면 뒤에 동백은 "이래서 아들에게는 아빠가 필요한가 봐요. 우리는 투닥거리면서 싸울 줄만 알았지."라는 식의 대사를 뱉는다. 그것은 곧 '규범적 남성성'이 필요성을 함의한다. 아들에게 아빠가 필요하다고 전제하는 순간, 드라마 안에서 엄마에게 길러진 유복자 용식은 '규범적 남성성'이 결여된 인물이 된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시청한 시청자들은 분명히 알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필구를 제외한 성인 남성 캐릭터 중에 용식이가 가장 흠이 없다는 사실을. 서사의 패러독스다. 이런 서사는 한 부모 가정의 아이들을 귀납하게 한다. 과거를 반추하고 트라우마 뒤에 숨게 한다. 무기력과 상처를 견인한다.
아쉬운 점 두 번째, 향미를 불행 포르노로 소비한 것.
물망초 앞에 서있던 어린이 향미와 까멜리아 앞에 선 어른 향미.
정말 끔찍하리만큼 불우한 향미의 인생에 가슴이 아프면서도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향미와 어린 동백이. 향미는 자존심을 지키느라 허언을 일삼는다.
'어린아이에게 가혹하다'라는 원론적인 반감을 차치하고서라도, 죽음에 이르기까지 축적되는 불행에 의문이 생겼다. 향미의 억울함이 떠올랐다. 향미는 동백이와 뭐가 그리 다른 걸까. 동백이는 불행을 훌훌 털어내는 방법을 알지만 향미는 그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향미는 털어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세상 속에서 늘 냄새나고 습하고 어두컴컴한 곳을 맴돌았다. 향미의 불행이 자극적으로 소비되었다. 불행 포르노가 아니라면 향미의 이야기는 어떻게 치환될 수 있을까.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동생, 병상에 누워있는 할머니. 향미 가족의 전부다. 동생과 함께 살고자 했던 마음은 무참히 짓밟히고 삶을 살게 했던 목적은 바스러졌다.
향미는 무려 여섯 명에게 "죽여버린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것도 향미가 죽게 된 그날.
펑펑 울었던 장면. 배우 손담비님이 연기를 참 잘한다는 생각을 했다. 향미의 뒷모습이 많이 아팠다.
향미는 주변인들에게 '죽어 마땅한'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행복은 사치라고 믿었던 그가 동백을 만나고 조금씩 행복을 발견했다. 동백을 대신해 죽음의 늪으로 전진하는 향미의 등을 보고 있노라면, 향미의 죽음이 마치 동백으로 인해 얻었던 한시적 행복의 값인 것만 같았다. 겉으로는 대담한척하지만 속으로 오들오들 떨었을 향미의 외강내유에 가슴이 아팠다. 그것이 별것 없는 자신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저항하는 몸부림 같았기 때문이다. 향미를 보면 드라마 <sky 캐슬>의 혜나가 떠오른다. 마냥 미워할 수 없어서 자꾸 마음이 쓰인다는 점이 무척 닮았다. 향미의 인생은 지는 순간까지 이토록 처참해야 했을까. 한국 드라마는 종종 여성 캐릭터를 이런 식으로 소비한다. 불쾌하다.
아쉬운 점 세 번째, 여성 캐릭터들의 대부분이 '불행'으로 점철된 것.
별스타그램에서 '미세스 강종렬'이라는 타이틀을 지키고자 온 생을 기울이는 제시카.
둘의 관계가 어떻게 권태를 향했는지는 논할 필요가 없다. 남편에게 의존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인생은 내팽개쳐져 있었다. 제시카는 불행했다.
제시카와 제시카의 엄마.
제시카의 엄마조차 불행했다. 그는 남편의 가부장적 행패에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딸에게 힘든 내색 한번 보이지 않은 채 묵묵히 살아왔던 여성이다. 그밖에 동백이 엄마, 용식이 엄마, 동백이, 향미, 잠깐 가엾게 묘사되었던 자영이까지 여성들은 대부분 불행했다. 남성 캐릭터가 (간간이) 불행으로 묘사되었다면 기껏해야 필구, 규태뿐이다. 동어반복이지만, 나는 그들이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가 그들을 불행한 것처럼 묘사했다는 것이다.
아쉬운 점 네 번째, 덕순과 동백의 관계.
동백이의 그늘이 싫다고 말하는 덕순.
덕순은 사별한 채 유복자 용식을 길러냈지만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동백에게 아픈 말을 내던진다. 동백이 감내하기에 아픈 그 말들은 하이퍼 리얼리즘에 가닿았고, 그래서 드라마로 조금 나은 세상을 꿈꾸고 싶은 나와 같은 시청자들의 울분을 샀다. 현실에서 아들에 의존하는 시어머니를 미리 겪는 것만 같았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의 가시 돋친 말은 더욱 상처가 된다는 말은 미뤄두고서라도.
아쉬운 점 다섯 번째, 마지막 회 까불이의 주제 발설.
용식과 흥식의 마지막 면회. 흥식은 이때 드라마의 주제를 대사로 내뱉는다.
"까불이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될 수 있고 또 계속 나올 거다"라는 말. '악인은 어디에나 있다'는 함의는 시청자에게 베푸는 과잉친절이자 진부함 덩어리였다. 그 뒤에 이어지는 용식의 '악인은 선인에게 쪽수 싸움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라는 대사까지. 그 정도의 교훈쯤은 시청자에게 넘기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이런 너절한 대사와 "어디 한번 감탄해봐라"식의 의도가 투명한 내레이션을 불호한다.
+) 작가의 소관은 아니지만, 《 sky 캐슬》처럼 네티즌의 추리가 극본보다 더욱 빛난 사실 역시 아쉬웠다. 향미 트랜스젠더설, 소장 까불이설, 코치 까불이설 등 다양한 추리들이 드라마보다 흥미로웠다.
++) 용식의 이 미소가 나올 때마다 감성이 차게 식었다. ↓
인위적이라서 이상하다.
좋았던 점 첫 번째, 까불이의 살인 장면이 (비교적) 적나라하지 않았던 것.
까불이가 에스테틱에서 살해하는 장면.
까불이의 살인 씬은 여타 스릴러 드라마에 비해 잔인하지 않았다. 에스테틱에서 미용기구에 갇혀있던 동백의 시선을 담은 장면은 신선했고 과하지 않을 정도로 오싹했다.
좋았던 점 두 번째, 성인들이 아이처럼 엉엉 우는 장면.
용식의 혐의를 벗기고자 용기 낸 동백.
이 장면 이외에도 둘은 줄곧 아이처럼 엉엉 울었지만, 이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동백이가 처음 용기를 낸 장면이기도 하고, 그들의 순수함이 아이처럼 우는 이 장면으로 충분히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서 아이처럼 꺽꺽 울어댔던 적이 있었던가. 이 드라마가 추구하는 순수함이 시청자인 나로 하여금 동심에 머물게 했다. 감정 표출하는 법을 점점 잊어가는 어른들에게 천진한 시절을 일컬어주었다.
좋았던 점 세 번째, 영영 자립하지 못할 것 같았던 동백이가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내는 장면.
용식의 규태 폭행 전과를 막기 위해서 치부책을 들고 나타난 동백.
향미를 괴롭히는 낙호에게 "꺼지라고 했지. 나 성격 있어. 얘도 성격 있고. 사람들 다 성격 있어!"라고 외치는 동백.
까불이와 맞닥뜨렸지만 기지를 발휘해서 살아남은, 심지어 스스로 나온 동백.
까불이를 소탕하는 동백.
동백은 과거에 까불이를 처음 보았던 그날, 에스테틱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줄곧 움츠러들었고 나약했다. 용식의 힘을 빌려 서서히 일어나는 동백의 모습도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기지를 발휘하고 대단한 용기로 자신의 두려움을 깨부순다. 동백의 이런 귀중한 용기가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좋았던 점 네 번째, 모녀관계와 모자관계를 불편하지 않게 그린 점.
동백과 정숙의 서사가 등장하면 계속 눈물이 났다.
드라마가 애증관계를 불편하지 않게 잘 풀어냈다고 생각한다. 엄마를 미워하지만, 그래서 끝내 이해할 수 없지만 안쓰러운 감정이 드는 건 모든 딸에게 보편적인 것이 아닐까.
시장 언니들에게 된통 데이고 고달픈 동백에게 필구는 "어린이인 내가 엄마를 왜 지켜야 해! 엄마가 나를 지켜줘야지."라고 소리친다.
동백과 정숙의 서사처럼 필구와 동백의 서사도 가슴이 아렸다. 아이답지 않은 필구를 바라보는 동백의 눈빛에 나의 마음이 좀먹는 것 같았다. 자신의 그늘이 필구에게 드리울까 노심초사하며 사는 동백의 조바심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제시카 모녀관계 역시 인상 깊었다. 혹시라도 딸이 으스러질까 멀리서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보는 마음이 너무도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서사는 모성애를 강요하지 않는다. 관망하며 조심스럽게 다룰 뿐이다. '온당한 책임'이나 '엄마이기 때문에 가져야 하는 초인적인 힘'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엄마는 자신의 인생을 살았고, 아이를 정말 사랑했고, 나약했고, 강했다.
좋았던 점 다섯 번째, 동백이라는 절대 선의 캐릭터를 융통성 있게 내보임으로써 세상을 조금 더 살만하게 그린 것.
동백은 절대적 선인이면서도 융통성 있는 선인으로 그려진다. 몹시 입체적인 캐릭터다. "고맙습니다"라는 말 한마디에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해하는 그가, "친절은 공짜잖아요"라며 매사 상냥한 그가 '옹산 하마'로 변할 때는 몹시 흥미진진하다. 가끔 답답할 만큼 미련해 보이는 그도 밟으면 꿈틀 한다. 그러나 대체로 선한 그는 현대사회에서 찾기 어려운 유형의 사람이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처음으로 겪은 '절대선'의 인물이었다. 그를 현실에 데려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푸근해졌다.
좋았던 점 여섯 번째, 조연배우들이 자신만의 색으로 빛난 것.
호쾌하고 인심 좋은 시장 언니들. 이들 덕분에 여성연대를 꿈꿀 수 있었다.
집단지성의 현장이다.
배우 김선영님의 연기 디테일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찬숙(aka 준기 엄마)은 얄미우면서도 든든한, 동백이의 멋진 '언니'였다.
전작 때문에 '박일도'로 불렸던 변 소장. 사람들이 자꾸 소장을 까불이로 의심하는 게 너무 재밌었다.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 자영과 규태.
특히 자영 역의 배우 염혜란님은 이 드라마를 통해 '국민 누나'로 자리매김했다.
《동백꽃 필 무렵》의 모든 여성 배우분들이 좋았지만 동백·자영·찬숙·향미 역의 세 배우분들이 특히 멋있었다.
+) 향미 동생 아역. 너무 귀여워서 꼭 올리고 싶었다.
한국 드라마 중 인생 드라마가 뭐냐고 물어본다면 쉽게 《동백꽃 필 무렵》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하고 따스하면서도 유익한 드라마가 뭐냐고 물어본다면 단연 《동백꽃 필 무렵》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선인이 악인보다 많다는 것, 쪽수 싸움으로 결코 악이 선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이 드라마의 종착역이었다. 매회 콧잔등이 시큰해서 펑펑 울다가도 목젖이 보이도록 호탕하게 웃으며 시청했다. 삶의 애환을 논하자면 동백꽃이고, 동심을 말하자면 동백꽃이다. 20회 내내 공감하며 공부했다. 드라마를 보고도 내 삶이 더 나아질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동백꽃은 활짝 피었으니 이제는 당신의 꽃이 활짝 필 차례라고 다독이는 마지막 화에 가슴이 벅찼다. 이 드라마가 이 세상의 모든 동백이에게 가닿아서 그들의 족쇄-이를테면 팔자나 트라우마-를 끊어버리길 진심으로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