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서대호 작가 사진전을 다녀왔다. 서대호가 누구지? 머릿속에 물음표가 뜨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지인한테 이야기를 듣고 정보를 찾아보기 전에는 내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진과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컨셉츄얼 발상으로 새로운 개념의 사진을 선보이며 인물 사진의 독보적인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기억에 다가서서’라는 주제로 그가 보여주고자 한 건 무엇일까.
입구에 쳐진 검은 커튼을 걷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마주한 벽에 두 개의 원이 사 분의 삼 정도 겹쳐 있다. 뒤의 원은 주황빛을 띤다. 앞의 원은 그보다 밝은 노란색에 뒤 원의 주황빛을 머금고 중앙은 핑크 오른쪽 일부는 연둣빛을 발한다. 그 원의 왼쪽 위에서 아래로 원태연 시인의 ‘기억’이라는 시의 시어들이 수직으로 낙하한다. 원의 색상과 어우러져 다분히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날 보면 생각나는 사람 있어?
응, 있어
그리운 사람인가?
난 아무것도 그리워 안 해. 그리워한다고 해서 곁을 떠난 게 돌아오진 않으니까
너무 차가운 거 아냐?
온도 같은 거 없어
기억에는 (원태연의 시‘기억’)
과연 그럴까. 기억에는 온도 같은 건 없을까. 누군가를 만난 날의 온도(기온)는 잘 떠오르지 않아도 그 사람과 관계의 온도나 감정의 온도는 있지 않을까. 그것이 기억을 따뜻하게도 차갑게도 만드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기억에는 온도가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고 싶었다.
머릿속 서랍에 잠자고 있던 기억을 하나 끄집어냈다. 어린 시절 어느 여름날, 냇가에서 아빠 등목을 해주던 장면, 아빠가 큰 돌을 들추어 가재를 잡아 보여주던 장면이 내 손에 딸려 나왔다. 여름이라 더웠겠지만, 온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끼얹은 물의 온도조차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아, 기억에는 온도가 없는 게 맞는구나! 서투른 동작으로 바가지에 물을 담아 등에 끼얹으니 얼굴로도 바지로도 흘러내려 난감했을 텐데도 시원하다며 좋아해 주던 아빠. 내게 보여주겠다며 이리저리 돌을 들쳐가며 열심히 가재를 찾던 아빠. 그날 아빠와 교감하면서 느꼈던 따뜻한 감정의 온도만이 기억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건 그날 온도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 기억에 편집해 덧그린 아빠와 나의 관계 온도였다.
기억은 ‘과거의 반응이나 경험들을 바라보는 전반적 태도’와 ‘이미지나 언어의 형태로 저장된 세부 사항’을 기초로 하여 상상력이 가미되어 구성되거나 재구성된다고 프레데릭 바틀렛은 말한다. 서대호 작가의 의도는 기억 자체에 온도가 없다는 말이다. 맞다. 하지만 프레데릭이 말하는 재구성된 기억도 분명 기억이므로 내 주장도 맞는게 아닐까.
작가는 선명한 색상으로 기억의 단상을 포착해내려 애썼다. 직접 무명천을 색칠해 원하는 색을 구현하고 둥근 모형을 매달아 모델의 얼굴이 원형으로 가려지게 했다. 작품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원형은 기억을 의미한다. 배경, 원, 모델의 의상으로 이루어진 색의 조합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자꾸 시선을 끌어당긴다. 일러스트레이션을 가미했다는 작품은 사진이라기보다 한 편의 회화 작품에 가까웠다.
작가는 말한다. “기억은 있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기억나지 않는 기억에 다가서서 당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보시길 바란다.”고.
작가의 말처럼 기억하지 않으면 기억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기억들이 있다. 잊고 싶은 기억은 잃을수록 좋다. 다만 잊고 싶지 않은,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을 잊고 사는 게 문제일 것이다. 기억의 단상을 “원형”을 통해 집약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감상하며 어떻게 하면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작가는 사진 작업을 통해 기억의 단상을 포착하려 했듯이 나는 글로 나의 기억을 간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기억에 다가서서’ 전시는 내게 ‘글로 기억에 다가서서’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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