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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어온더문 Aug 06. 2021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노먼 포터의 저서 “디자이너란 무엇인가?”는 디자인과 디자이너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현실을 탐구한 디자인 에세이로 이뤄져 있다. 

책은 ’ 디자인’이라는 단어에 대해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해석으로부터 시작한다.


DESIGN
동) 도안하다;계획하다, 목적하다, 의도하다…
명) 마음속에 품은 계획…
명)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무엇이고, 어떤 소명의식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디자이너 커리어 첫날부터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며 지속적으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택하게 된 이유는 물론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 나의 머릿속에 있던 것이 현실화되는 경험,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경험에 희열을 느끼며 이 일에 대한 꿈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 역시, 막연하게 생각했던 무언가가 나의 손끝에서 그려지며 탠저블 하게 구현되는 형태를 보며 두근거림을 느꼈다. 


 이민 초기에는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자료실에서 책을 보며 그림을 자주 그렸고 그를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뉴질랜드의 고등학교는 일찌감치 전공과정을 선택하도록 하였다. 한국의 고1, 2부터 기본 과목은 최소화하게 되며 전공분야의 수업을 더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목공, 페인팅, 사진, 프린트 메이킹 등의 다양한 수업을 접할 수 있었고, 그 수업들을 통해 미감에 대해 접하며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물감 냄새나 나무가 다듬어질 때의 촉감이 좋았고, 어둠 속 아늑한 암실에서 내가 포착한 이미지들이 다시 생산되는 경험이 특별했다. 생각한 것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이 흥미로웠고, 공간이라는 입체적인 모습을 이차원적으로 재해석하여 나타내는 것이나 이차원적인 것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활동이 신선했다. 만들고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언어가 아닌 시각적이고 촉감적인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대학교와 대학원 과정을 거치며 모든 예술과 디자인의 보여지는 것의 거대한 배경으로서의 역할은 philosophy가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을 위해 이롭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아름다운 꿈속에서 이상적이기만 한 학창 시절을 지나 사회에 디자이너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보낸 첫 해는 상사가 하나하나 지시하는 대로 디자인을 했다. 아니, 그려냈다. 조금 자율적으로 디자인을 할 수 있게 되니 클라이언트라는 사람들의 니즈에 따라 제작하고 수정해야 했는데, 지금이야 클라이언트들의 수준이 굉장히 높지만, 15-20년 전쯤만 해도 많은 기업들이 로고를 무조건 크게, 글씨를 무조건 크게 디자인해달라고 했었다. 특히, 귀국하여 내가 일했던 회사는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직접 클라이언트를 대하지 않고 백오피스 직원들처럼 AE가 전달해주는 클라이언트의 디렉션을 반영해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디자인이 아닌 오퍼레이터의 역할이 더 크다고 생각이 되었다. 과연, 디자이너의 창의적 감수성이 반영되지 않은 디자인을 디자인이라고 보아야 하는지, 단순히 기능사 (오퍼레이터)가 아닌지 의문했다. 물론, 디자이너란 예술가가 아니니 개인적 고뇌를 작품화하거나 아름답게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해관계 속에서 협업하고 정리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이 크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어떻게 하면 내 생각을 반영한 것을 만들 수 있을까?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THOUGHTS와 EMOTION을 담아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꼭 시각매체 작업을 하는 그래픽 툴을 다루지 않더라도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도록 상황을 오거나이즈 하고 전반적인 코디네이션과 매니지먼트를 한다면 그게 더 ‘만드는 사람’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실질적으로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가 아닌 디자인을 기획하는 사람으로 서서히 포지션을 변경하게 되었다. 


그렇게 기업에서 일을 하며 나는 더 이상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내 손으로 조형적인 것을 만들어내지 않게 되었다. 대신 회사와 브랜드의 방향에 맞추어 기획서를 쓰고, 방향성을 잡는다. 어떠한 생각을 보고서 문구로 정리하고 백업 자료를 준비하고 레퍼런스 이미지를 찾아서 RFP를 만든다. 그리고, 공간과 디자인을 구현하기 위해 예산을 확보한다. 

커리어의 어느 시기에는 내가 나 스스로를 디자이너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이 없던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으레 디자이너는 시각 매체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지금 보고서와 기획서를 쓰는 나의 역할은 그에 부합하지 않는 다고 의구심을 갖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디자이너의 역할을 그렇게 단일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각적 툴을 다루는 디자이너도 있겠고 개념을 만들고 여러 이해관계와 상황 속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디자이너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디자이너는 고유의 철학과 심미안을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만드는 사람’으로서 소명의식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계속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나 스스로에게 '디자이너' 로서의 역할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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