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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작 Apr 04. 2020

방송작가의 글쓰기 회피증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고찰

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3n세 여성이다.

직업은 작가. 그중에서도 방송작가.


브런치 어플을 설치하고 가입하고. 그리고 이 첫 글을 쓰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없어서"는 누가 봐도 거창한 핑계이고, 난 후천적(?)으로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대외적으로 나는 '글'을 써서 수입을 얻는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인데 말이다. 수많은 글 중 방송 대본을 작성하는 방송작가가 내가 지난 10년간 유지(?)해온 내 직업이다. 우리 부모님도 내 친구들도 다들 그렇게 알고 있다.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마도 내 밑천을 드러내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글 쓰는 것을 즐기는 것과, 잘하는 것과 직업으로 삼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속성의 것들이다.



나는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이는 글쓰기를 즐긴다와 잘한다를 내포하지 않는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은 이쪽(?) 일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수많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직업이다. 

연예인이랑 친한지, 돈은 많이 버는지, 연예계의 뒷이야기를 잘 알고 있지는 않을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측은한 눈빛을 보내게 되는 게 수순. 

작가라면 당연히 글을 잘 쓸 것이라는 편견, 그리고 글쓰기보다 많이 쏟아지는 다양한 업무 (그래서 방송잡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나도 똑같이 카톡 찌라시를 받는 사람인데, 찌라시가 한 번이라도 도는 날에는 나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들, 대본 한 줄을 적기까지 내가 해왔던 수많은 작업들에 대해 이제는 솔직히 말해보기로 했다.



나는 방송작가를 시작하고 글쓰기가 무서워졌다.


한 줄 한 줄 누군가의 평가를 받게 되고, 거침없이 빨간 줄이 그어졌으며, 개인 SNS에 하고 싶은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며, 노트북 앞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바닥을 보이는 통장잔고를 보며 직업 글쓰기에 대한 고찰을 10년째 하고 있는 중이다.


이전에 그냥 대충 읽고 넘겼던 방송 관련 인터넷 기사는 방송작가가 보도자료라는 이름으로 넘겼던 파일이 고스란히, 오타가 있다면 오타마저 업로드한 기자의 이름을 달고 인터넷에 올라가 있던 방송작가의 글이다. (요즘은 홍보팀이 작성하기도 하고, 자기 입맛에 맞게 고치는 기자도 있다.) 

내가 써도 아무도 모르는 내 글을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물론 기사라도 나는 프로그램은 나름 인지도 있는 프로그램이다. 

 

내 대본을 보는 사람들 (선배 작가 일수도 있고 PD일수도 있고 심지어는 출연자일 수도 있다.)은 "이거랑 이거 바꿔봐"라고 너무 쉽게 말했다. 

사실 대본 한 줄을 작성하기까지는 수많은 섭외와 자료조사가 수반되는 일인데, 이걸 손바닥 뒤집듯이 바꾸라고?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교무실에 불려 간 학생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수정하는 것뿐이다. 다시 해야 하는 섭외와 자료조사는 당연한 수순이다. 물론 이건 나의 능력 부족에서 기인하는 일 일수도 있다.  


여러 가지 일을 거치면서 점차 나는 글 한 줄, 대본 한 줄 쓰려면 한숨을 수백 번 쉬어야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누군가 비웃진 않을지, 누군간 화내지 않을지, 누군가는 불편해하지 않을지 수백 가지 생각이 한숨을 거친 후에 더 이상 쓰지 않으면 시간을 맞추지 못할 시간에 시작한다. 



며칠 전 종영한 프로그램의 마지막 대본, 마지막 줄을 쓰면서 생각했다.

'이제 더는 못하겠다.'

'이런 글 그만 쓰고 싶다.'


이젠 생일 축하 카드마저 쓰기 싫어졌다.

사실 내가 쓰는 것들이 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다. 정확하게는 글쓰기 회피증이 아닌 글씨 쓰기 회피증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기도 하다. 



"남의 돈 벌어먹는 게 다 힘들지, 뭐 그리 대단한 일 한다고."

누군가는 비웃을 수도 있다. 그러게 그 별거 아닌 일이 왜 10년간 나에게는 가시밭길이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마저 나는 뭘 할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고, 제2의 직업은 몇 년째 찾는 중이다. 

하지만 글쓰기 일을 손쉽게 그만둘 수 없다. 글쓰기가 생업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다. 나는 글쓰기 싫다.


하지만 이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방송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지 만으로 10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며 나는 앞으로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기 위함이랄까. 

되짚어 생각해보면 욕 나오는 일이 태반이고, 다시는 안 해야지라고 생각했던 게 100회 이상일 것이며, 지금도 후회하는 내용만 주르륵 적었지만 분명 나에게도 즐겁고, 이 일을 하기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도 오늘처럼 생각 없이 작성하는 글일 것이다. 꼭 직업적인 내용뿐만은 아닌 그냥... 지난 내 10년간의 후기 정도. (일기도 거창하다.) 



내가 지금껏 써온 글의 마지막에는 출연자를 위한 "수고하셨습니다^^"를 적었는데... 이건 어떻게 끝맺음을 지어야 할까? 정말 모르겠다. 

심지어 글의 말미에 오자 제목을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정도로 나는 글쓰기에는 소질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작가랍시고 돈을 벌고 있어요 여러분!!!!


무튼, 이 글의 새로운 제목은 글쓰기 회피증이 아닌 


방송작가의 10년, 행복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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