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소개를 간단하게 부탁할게.
안녕하세요 채연입니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약 2년반 정도 회계사를 준비했었습니다. 지금은 회계법인에 막 취업한 수습 회계사입니다.
인터뷰 해줘서 고마워. 불과 몇 달전까지만 해도 준비생이었으니까 그때의 생활을 최대한 복기하면서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알겠어.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볼게.
첫 번째 질문은 조금 뻔할 수 있지만 왜 회계사를 준비하게 되었는지를 말해줄 수 있을까?
난 사실 영문학과잖아. 어렸을 때부터 영어에 대한 갈망도 있었어. 그래서 24살 즈음에 어학연수를 가려고 했었거든. 근데 어학연수를 자비로 가야하니까 자금을 모으려고 휴학하고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었어. 그렇게 열심히 돈을 어느정도 모으고 나니까 코로나가 터진거야.
아이고. 내 주변에도 그런 친구들 많았어. 코로나 때문에 교환학생 못가고 어학연수 못가고.
나도 그래서 어학연수가 무산된거지. 이제 뭐해야하지? 멍했어. 코로나가 터지고 밖에 나가지도 못하니까. 그러다가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할 만한걸 찾게 된거야. 행정고시, 로스쿨, 회계사라는 선택지를 두고 고민했지.
밖에 안나가고 진득하게 공부해야하는 시험들을 골랐구나.
그치. 일단 로스쿨은 내가 그때 마침 경제법이라는 수업 때문에 변호사 시험을 중간고사 시험으로 봤었거든. 그게 또 나름대로 재미있는거야. 그래서 리트를* 한번 집에서 풀어보려고 뽑았는데 지문이 너무 긴거야...
* 로스쿨에 입학하기 위해 치루는 시험. 로스쿨을 졸업하면 변호사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래서 일단 리트를 집어치우고 다음으로 행정고시 시험지를 뽑았어. 근데 더 엄두가 안나는거야. 감히 도전할 생각이 안들어.
남은게 CPA.(회계사 시험) 내가 경제학을 복수전공하면서 회계원리 수업을 들은 덕에 회계사는 그나마 도전해볼 수 있겠다 싶었어. 엄두가 나더라고 이건. 그나마 조금 아는 내용이니까. 그래서 회계사 시험 준비를 시작하게 된 거야.
근데 왜 경제학을 복수전공한거야? 영문학하고 경제학은 연관이 크게 없잖아.
내가 경제를 정말 좋아했잖아.
맞다. 난 니가 쉬는시간마다 교무실 앞에서 경제쌤을 놓아주지 않았던게 기억나.
질문도 많이하고 그랬는데. 근데 객관적으로 경제를 잘하지는 못했어. 수능 때도 진짜 말아먹고.
수능 때 경제 선택한 것만으로도 말 다했다.*
* 2017 수능 경제 선택 수험생은 2% 남짓이었다.
그런데 좋아는 했으니까 경제학을 복수 전공 했지. 그 덕분에 회계원리 수업을 들었었고 회계사 시험까지 준비하게된거야. 회계원리 수업 듣기 전에는 회계사가 뭐하는 직업인지도 잘 몰랐고.
어떻게 보면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기였는데 회계원리를 들어놨던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거네.
그치. 필수 과목도 아니었어.
되게 운명적으로 들려. 그 교수님한테 절 한번 해야겠다. 그러면 그렇게 회계사 준비를 시작하게 된 후에 너의 하루 일과가 궁금해.
난 집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다른 수험생들하고는 하루가 좀 달라. 특히 내가 좀 올빼미 체질이어서 늦게 일어났어..
그게 몇 시쯤이야?
보통 한 오전 10시~11시쯤에 일어났어. 그때 일어나서 씻고, 고양이 밥도 주고. 고양이 2마리 있거든.(춘삼이와 시월이) 물 갈아주고, 화장실 치우고. 그 다음에 내가 만든 공부방으로 들어가서 공부하는거지. 공부방을 침대가 있는 방하고 분리해뒀거든. 그렇게 공부 시작하고 스탑워치로 시간을 재면 보통 10시간에서 14시간 정도 공부를 했었어.
밥은 어떻게 먹었어?
난 그냥 정해진 밥 시간이 따로 없었어. 밥 안 먹고 싶으면 굶고. 배고프면 무조건 배달. 아니면 편의점 음식. 뭐 해먹고 이럴 시간이 없었어. 그리고 새벽 4~5시에 자는거야.
헉. 대단하다. 나는 배고픈거 절대 못참는데...! 새벽 4~5시까지 안졸렸어?
난 안졸렸어. 일찍 일어나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았던 것 같아. 보통 사람들은 밖에서 효율적이고 규칙적으로 공부를 하잖아. 근데 난 아니었어. 난 집에서 시간도 질질 끌고 그래서... 솔직히 버리는 시간도 많았어.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공부를 한 것을 인정하고 사과드립니다.
급 반성모드네ㅋㅋ 그러면 한번에 공부를 몇시간 정도 했었어?
난 집중은 잘하는 편이어서 보통 2시간씩은 계속 공부했지. 휴대폰도 안 하고.
SNS 이런 것도 전혀 안했잖아.
그 당시에는 SNS도 다 지웠고. 핸드폰도 일부러 피쳐폰으로 바꿨지.
맞다 기억나. 너랑 서촌갔을 때 니가 그 핸드폰 들고왔었지!
맞아. 앗 커피 왔다. 내가 가지고올게.
고마워. 커피가 와서 좀 환기가 된다. 너도 하루 중에서 제일 환기되는 시간이 있었어?
밖에서 커피 사오는거. 왜냐하면 난 운동도 안했었어. 그래서 일부러 좀 멀리까지 가서 커피를 사왔었어.
멀리까지? 얼마나 멀리?
왕복 한 30분? 근데 거기가 회사들이 모여있는 곳이라서 회사원들을 보면서 자극받고 그랬지. 트레이닝복 입고 양복들 사이를 활보했었지.
되게 눈에 띄었겠네.
그치. 씻지도 않고 그냥ㅋㅋ
그래도 그 시간만큼은 행복했었어?
아니 사실 커피 사러 가는 게 딱히 행복하진 않았지. 굳이 즐거웠던 시간을 찾자면 밥 시켜 먹는 거? 솔직히 지금 수험생활을 돌이켜 보면 되게 행복하거나 그랬던 것 같지는 않아.
맞아. 즐거울 일이 별로 없지.
그 당시에는 주변 사람들도 내가 좀 우울해보였다고 했어. 그리고 시험 끝나고 밝아졌다고 하더라고. 다시 생각 해보면 그때 확실히 행복한 이벤트 같은 건 없었어.
공감해. 나도 옛날에 로스쿨 준비를 했었잖아. 그냥 매일이 우울했던 것 같아. 너도 혹시 그때 가장 기억에 남는 우울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왜 자격증 시험 공부는 다 정석적인 커리큘럼이 있잖아. 회계사 시험도 그런게 있어. 그런데 나는 그걸 안따르고 과하게 진도를 뺀거야. 보통 사람들이 2~3개의 문제집을 풀 때 나 혼자 4~5개를 풀고 이런거지.
근데 나는 아직 1차도 안 본 시점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너무 갑자기 세게 나가니까 그때 한 번 좀 심하게 힘들었었어. 그냥 그때... 내가 너한테도 말하지 않았어? 그 막 글자가...
*회계사 시험은 1차와 2차로 이뤄져있다.
1차에서는 5개 과목을 객관식으로 치루고 2차는 5개 과목을 주관식으로 치룬다. 2023년 회계사 1차 시험은 2월 8일 수요일, 2차 시험은 6월 2일 치러졌다. 회계사 1차 시험은 모든 과목에서 40점 이상, 평균 60점 이상을 받은 수험생 중 상위 2,600명을 합격자로 간주한다.
1차 시험을 합격한 자는 2차 시험을 볼 수 있다.
2차 시험은 모든 과목에서 60점 이상 받은 수험생 중 1,100명 만이 합격으로 간주되며 회계사가 될 수 있다. 1차시험을 합격한 자가 같은 해에 치러지는 2차시험에서 탈락해도 다음연도 2차 시험까지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맞아 맞아. 글자가 흔들린다고.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글자가 막 앞뒤로 막 움직이고... 토할 것 같고... 너무 어지럽고. 방에서 그냥 운 적도 있었어. 공부 때문이 아니라 몸이 너무 힘들어서.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몸이 너무 힘드니까 옛날에 안 좋았던 기억들이 떠오르는 거야.
그러니까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우는 거야.
공부랑 전혀 관련 없이 우는거야.
그래서 병원도 많이 다녔다고 했었잖아.
병원도 진짜 많이 돌아다녔어. 처음엔 정형외과에 갔었어. 왜냐면 어지러운게 척추나 목뼈 때문일 수 있다는거야. 그 외에도 이비인후과, 안과 다 갔었지. 안경도 다시 맞추고. 그래도 안 나아지는 거야. 마지막엔 내과를 갔는데 내과에서 피 검사를 한번 해보자고 했었어.
근데 또 피 검사 결과가 그렇게 좋지 않았어. 혈압도 너무 높고. 결과가 안좋으니까 쌤이 초음파검사까지 해보자고 했었어. 결과적으로는 약을 먹어야 되는 수준이라고 하더라고. 근데 지금 이 나이에 약을 먹기 시작하면 앞으로 평생 먹어야 하니까...
의사선생님도 일단 집에 가서 부모님이랑 상의하고 오라고 해서 부모님한테 말을 했더니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셨지. 근데 엄마는 일시적으로 그런 걸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몸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공부를 쉬어보라고 했어. 그래서 엄마랑 호캉스도 가고 하면서 공부를 쉬었지.
얼마정도 쉰거야?
3주 정도? 아예 공부를 쳐다도 안보고 완전히 쉬었어. 근데 그랬더니 어떻게 됐게.
나아졌어?
진짜 감쪽같이 나아졌어. 어쨌든 그때가 진짜 내 인생에서... 가장... 아니 인생까지는 아니고 수험생활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기간이어서. 일상 생활이 안될정도였으니까.
정말 힘들었겠다. 그러면 그렇게 3주를 쉬고 돌아와서 심리적으로도 많이 나아졌어?
마음을 좀 내려놔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어. 처음 시작했을 때는 강박 같은 게 있었거든. 보통 회계사 시험은 상경계열 애들이 많이 준비하는건데 나는 영문과에다가 회계 베이스도 전혀 없고.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10시간씩 하는걸 난 12시간, 14시간씩 공부했었어.
내가 그만큼 했던 이유는 나는 남들보다 좀 더 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래야지 남들만큼 할 수 있다라는 그런 생각이 모든 분야에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랬어. 신체적으로 힘들었던 슬럼프도 결국 이 강박때문이었던 것 같아. 근데 이 생각을 버리자는 생각을 하면서 몸도 나아졌던 것 같아.
그런 강박을 가지게된 이유가 있을까? 내가 보기에 너는 충분히 똑똑하고 야무진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옛날에 아는 언니가 약대 편입을 성공하고나서 들려준 얘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만약에 떨어지면 사람들은 그 시간을 결국 낭비한 시간으로 생각한다는거야. 그래서 그 언니는 무조건 더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었대. 그 시간을 낭비한 시간으로 만들기 싫어서. 그 말이 갑자기 나한테 턱 꽂혔어.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만약 떨어지면 '남들 눈에 나는 그냥 실패한 애겠지' 이런 생각이 들면서 강박이 생기는 거야. '절대 떨어지면 안 된다. 무조건 붙어야 된다.' 이런 생각이 드니까. 그래서 슬럼프가 오지 않았나 싶어. 근데 3주를 쉬면서 그런 마음들은 최대한 내려놓게 됐어. 그래서 많이 괜찮아졌어.
그럼 공부 양도 줄일 수 있었어? 5과목씩 하기보다는 3과목으로 줄인다던가?
줄여서 했지. 처음에는 1차도 보기 전에 2차 시험을 같이 준비했었어. 근데 3주를 쉬고오니까 1차가 얼마 안남은 시점인거야. 그래서 2차 시험을 내려놓고 객관식 1차 시험 공부에 집중하게 되니까 공부도 수월해지더라고.
3주를 쉬고 왔더라도 어쨌든 계속 공부는 해야하니까 순간순간 힘들 때도 있잖아. 그럴 때 너만의 극복 방법이 있다면?
진짜 먹는 거.진짜 맛있는 거 시키는거. 시험 공부하면서 우리집 근처 배달 맛집을 전부 리스트업해뒀지.
ㅋㅋ 먹는거 말고는 없었어?
아파트 단지 안에서 산책! 산책이 정말 좋았어. 계속 걷는거야.
다음 질문으로는 좀 감성적일 수 있는데... 엄청 힘들었을 때, 3주를 쉬기 직전에 너에게 한마디 해줄 수 있다면 뭐라고 할래?
지금 내가 뒤돌아보니 알게 된건데 그렇게 힘든 시간이 있으면 반드시 뒤에는 깨닫는 게 있다는 거. 얻어가는 게 분명히 있으니까 그냥 견디라고하고 싶어.
그냥 견뎌라! 단순한 진리다.
근데 나는 그 말 되게 좋은 것 같아. 견디라는 말.
결국 다 지나가니까.
지나가는 것도 지나가는 거지만 견디면 분명히 얻어가는 게 있으니까. 분명히. 얻어가는 게 분명히 있습니다!!
나도 힘들때마다 생각해야겠어. 나는 힘들 때 자꾸만 잡생각이 많아져서 그게 힘들때가 많았거든. 너는 공부할 때 너를 괴롭히는 다른 생각들은 없었어? 시험에 붙고 싶다 이런 생각말고도 떠오르는 잡생각들.
나는 붙고 싶다 이런 생각도 안 했어. 그런 생각보다는 수험 생활 자체가 내 삶이었어. 보통 사람들이 회사 가고 출근할 때 별 생각 안하잖아. 나도 똑같았어. 나는 회사 대신에 공부방으로 출근한거니까. 뭐해야할지도 다 정해져있으니까 ‘이거 다 하면 퇴근한다, 집간다, 다시 침대방으로 간다’ 이런생각 하는거지.
그럼 생각말고 행동은? 공부 말고 다른 행동은 안했어? 나는 옛날에 로스쿨 준비할 때 너무 공부가 하기 싫어가지고 독서실 가는길에 아파트 분리수거장 있거든. 거기를 꼭 들렸어. 거기 들러서 페트병 띄지 비닐을 다 떼는거야. 그걸 10분이고 20분이고 했어.
와 진짜? 근데 그런 사람들 있더라. 나는 근데 안그랬어. 아 근데 그런건 있었어. 내가 원래 연예인 별로 관심 없잖아. 근데 가끔씩 방에서 사진들...보고..
누구 사진?
아니 그냥 잘생긴 사람 사진...ㅋㅋ 연예 뉴스같은데 잘생긴 사람 있으면 찾아보고...ㅋ 근데 시험 끝나니까 아무것도 관심 없어지더라.
이번엔 분위기를 좀 바꿔서 유머 코너야. 내가 로스쿨을 준비한 시절에는 커뮤니티에 들어가면 수험생들만 쓰는 밈 같은 게 있었거든. 예를 들면 ‘리트 신수설’이라고 해가지고 ‘리트를 잘 보는 건 신이 내려주는 재능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리트를 잘 못본다’ 이런 밈이 있었단 말이야. 패배자들이 자위하는 밈이긴 하지만... 그런 것처럼 회계사 수험생들 사이 유행하는 밈 같은게 있어?
나 진자 그런거 몰라... 몰라.....
너 이런 거 안 했구나... 왜 내가 공부하기로는 "와꾸"라는 말이 있더만!
와꾸가 왜... 뭔지 몰라?
와꾸라고 하면 보통 얼굴을 가리키는 은어잖아.
와 진짜 그렇구나. 신기하다! ㅋㅋ 와꾸란 말이지. 어떤 과목에 문제 별로 유형이 있잖아. 그러면 이 유형에는 이 와꾸를 쓰고 저 유형에는 저 와꾸를 쓰고 이런 식으로 쓰는 말이야. 문제 풀이 방식을 뜻하는거야.
얼굴이랑은 전혀 다른 뜻이네.
그치. 또 강사별로 와꾸가 달라서 강의평을 할 때 "누구는 와꾸가 좋다~", "이 문제에는 이 강사 와꾸를 써야돼" 이렇게 말해. 나는 그렇게 원래 다 쓰는 줄 알았어. 나도 그냥 이 말에 스며들어 그런가 보다. 이런게 너무 그냥 일상이어가지고.
내가 강사 유튜브를 좀 찾아봤어. 거기 보면은 “이건 와꾸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얘기도 하더라고.
그치 그치. 그냥 무조건 와꾸에다 넣는다고 되는 건 아니야. 와꾸를 이해 해야 돼. 이해해야 풀 수 있는 것도 있어.
재밌다. 너 영화 “캐스트 어웨이” 봤어? 페덱스 직원이 무인도에 표류해서 생존하는 이야기.
어 알지.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 배구공인 윌슨에 엄청 의지하잖아. 뗏목을 만들어서 탈출할 때도 윌슨을 데리고 갈 정도로. 니가 시험공부를 했을 때 너에게 윌슨같은 존재가 있었는지 궁금해.
난 고양이. 내가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들. 왜냐하면 나는 원채 집에서 잘 안 나가는 성격이기도 하고... 슬럼프 왔을 때도 진짜 고양이가 큰 위로가 됐지. 말로 설명할 수 없어. 고양이가 공부할 때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좋았어.
고양이들은 내가 물도 갈아줘야 되고 밥도 줘야 되고 똥도 치워줘야 된단 말이야. 그럼 내가 먼저 부지런히 움직여서 청소기도 돌리고 털 관리도 해줘야하거든. 그러니까 슬럼프가 심하게 왔을 때도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지만 '그래도 쟤네 밥은 챙겨줘야 되고 물은 갈아줘야지' 이런 생각에 더 움직이니까 활력이 생겼어.
고양이들이 너의 윌슨이었네. 그러면 반대로 혹시 너를 힘 빠지게 했던 것도 있어?
내가 MBTI가 J거든. J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싫어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계획한 상황에 변수가 들어오는게 힘들어. 근데 내가 공부를 할 때 가족들이 자꾸 방에 들락날락 하잖아. 밥도 같이 먹어야되고.
그러게. 가족이랑 같이 사는 집이니까.
가족들 행동 하나하나 내가 통제할 수도 없는거고. 예를 들어 아빠가 늦게 온다고 했다가 일찍와도 나는 내 일정이 꼬이는거야. 근데 그게 아빠 탓은 아니잖아. 그리고 거실이 시끄러워지는 것도 내가 매번 조용히하라고 할 수 없잖아. 그런 상황들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짜놓은 계획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 말 한마디로 틀어지기도 하니까. 특히 공부할때는 괜히 내가 짜놓은거 이 사람 때문에 못한 것 같고...
그리고 내가 아까 말했듯이 난 밥 때가 따로 없다고 했잖아. 밥 안먹어도 되고 대충 컵라면 먹기도 하고. 근데 가족들이 있으면 가족들 식사를 챙겨야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거야. 누가 배고프다고 하면 나는 안고픈데도 같이 먹어야될 것 같고. 지금은 당연히 이해하고 그렇게하지. 근데 그때는 내가 그 식사를 챙겨야하는게 짜증이 났었어.
맞아 맞아. 계획한 것들이 있는데 이걸 못 지킬까 봐 막 안절부절하게 되잖아. 그래서 괜히 짜증 엄청내고. 또 나중에 미안해지고.
맞아. 그랬었어.
혹시 그럼 회계사 준비를 하면서 포기한 것도 있었어? 이걸 할 수도 있었는데 못한거.
나는 어학연수. 언어 쪽으로 가고 싶었거든. 교육자가 됐든 언어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뭐든지.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언어 공부를) 조금 더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연애. 왜냐면 어쨌든 한 2년 반 동안은 집에서 안나갔거든.
그치 아예 누구를 만날 수가 없잖아.
나는 연애는 아예 생각도 못했으니까.
혹시 니가 했던 것 중에 남들이 안 했을 법한 노력이 있을까? 그러니까 나는 진짜 이렇게까지 했다 이런거.
그런 거 되게 많았는데 지금 생각이 많이 안나네. 아 나는 안 씻었어.
엥? 너무 의외인데 이거.
그러니까 그 시간까지 아꼈다 이 말이지.ㅋㅋ 지금은 진짜 잘 씻어. 근데 그때 당시에 시간을 아낀거야. 내가 머리가 길잖아. 그러니까 머리 감는데 오래걸리잖아. 샤워는 맨날하는데 머리를 자주 감진 않았지.
맞아 한번 감으면 기본 30분 이상 걸리잖아. 근데 되게 불편했을 것 같은데? 가렵잖아.
가렵고 냄새나지. 근데 그냥 그런 거를 참았지. 어차피 집 밖에 안나가잖아. 머리감는 시간이 다 잘 시간이고 공부할 시간이니까.
그거 참 좋은 방법이다. 근데 그거 말고는 없을까... 좀 더러워가지고...ㅋㅋ 웃기긴 한데...
ㅋㅋㅋ아 그리고 밥 사먹은거.. 근데 이건 남들도 다 하는.. 없어.. 남들 다 하는 만큼 했어.
오케이 넘어갈게. 마지막으로 회계사가 되어도 준비생이었던 내가 절대 잃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면 말해줘. 생각, 다짐, 마음 다 좋아.
나 이거 진짜 있어. 최근까지도 계속 했던 생각인데. 2개 있어. 2개 말해도 돼?
2개 좋지.
일단 하나는 엄청 간단한 건데 공부할 땐 회계사가 엄청 되고싶었잖아. 근데 내가 벌써 몇 주 다녀보니까 회계사 업무가 어렵고 힘들더라고. 그래도 다시 수험 생활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
그치. 너무 힘들었을테니까.
그러니까 그냥 불평 불만하지 말고 다닐 것. 그냥 다닐 것.
견디고 그냥 다닐 것?
견디면 된다! 그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진짜 이거야. 내가 팀이 배정됐을 때 내가 원하지 않았던 곳이라도 “5년차까지는 가리지않고 배우고 흡수하라!”
신입의 의지가 느껴지네!
수험생 때 어떤 강사분께서 하셨던 말인데 너무 감명깊어서 내가 다이어리에 적어놨었거든.
일단은 5년차까지는 가리지 않고 뭐가 됐든 간에 배우고 흡수하라고. 진짜 어떤 게 됐든. 왜냐하면 그게 나중에는 결국 내 캐파가 되는 거니까 무조건 믿고 따라가라 그랬어.
근데 요즘 내가 고민이 많았잖아. 내가 원하는 본부에 배정이 안 돼서 걱정이 많았거든. 나도 모르게 이 말을 잊고 이런 고민을 한거야. 근데 내가 최근에 이 말을 다이어리에서 우연히 다시 보면서 다짐했지. 뭐든지 배우고 흡수하자고. 그리고 난 요새 그 마음가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야.
바로 잃을 뻔했네요....
큰일날 뻔한거지....
마지막으로 오늘 인터뷰 어땠어?
길었던 수험생활을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어서 좋았어. 특히 마지막 질문 좋았어. 끝까지 이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볼게...ㅎㅎ 그리고 전국의 회계사 수험생들 파이팅.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