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난 날의 시작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보다 더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알랭 드 보통씨의 <여행의 기술>에서
한국을 떠나는 날까지 내게 준비된 것은 여행 배낭과 필리핀으로 가는 비행기표 한 장뿐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야 챙긴 것을 되돌아봤지만 돌아올 표가 없이 떠나는 길에 무책임을 동반한 자유를 선사했다 여기며 발을 디뎠다.
서른이 넘은 아들이 멀쩡히 다니던 회사 생활을 멈추고 세계여행을 간다는 말에 엄마는 얼어붙었다.
흙빛으로 변한 엄마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왜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했는지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한 이유를 정리하지 못했을 때였다.
다만 가야겠다는 확신은 있었다.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그저 세상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했다.
왜 떠나는지에 대한 이유는 계속 내 안에 있었지만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관점에서 내 결정을 판단했다.
이 글이 다쓰일 때에야 세계여행이어야 했던 이유를 온전히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여행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이유와 세계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 모두.
여행과 여행이 연속되는 세계여행은 여행의 방법과 이유를 끝없이 고민하고 시도하게 한다.
세계여행의 방법은 여행의 목적과 닿아있고,
여행의 목적은 여행을 떠난 이유와 닿아있고,
여행을 하는 이유는 내 삶의 고민과 닿아있다.
나는 내 인생의 주체로 바로 서기 위해 청춘의 발버둥을 치고 있다.
옆자리에는 어린아이가 앉았다.
생애 첫 비행기를 타는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엄마에게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엄마는 얌전히 있도록 주의시키면서 동시에 그 설렘을 함께 해준다.
비행기가 어떤 것인지 필리핀은 어떤 곳인지 이야기하는 동안 이륙의 순간이 다가오고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엄마의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아이는 끝내 말을 잃었다.
‘간다!! 빠르다!! 떴다!!! 느낌이 이상하지?!!!’ 비행기는 그렇게 이륙했고 덕분에 나도 그렇게 이륙했다.
아마 아이 보다 내가 그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을 것이다.
솔직히 가장 신난 건 엄마다.
떠난다.
비행기가 상승하는 몇 초 만에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감을 느꼈다.
인간관계, 의무, 지위, 부, 명예, 시선, 욕심, 미래.
나를 감싸고 있던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것이 됐다.
여행을 만들어가는 것 하나만 오롯하다.
새벽 필리핀 막탄 공항.
한국으로부터 발을 떼어 필리핀으로 발을 디디는 동안 계절을 넘었다.
덥고 습하다.
어느 장소에 가면 먼저 그 지역 특유의 향에 반응하게 되는데 코끝에 느껴지는 향이 네팔을 떠올리게 한다.
대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네팔 해외봉사를 간 적이 있다.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했을 때 느낌이 마치 이와 같았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더위와 습기도 비슷하다.
그때 봉사자 숙소에서 많은 인원이 샤워할 방법이 없어서 숙소 앞 호수로 나가서 단체로 샤워를 했다.
마을 주민들의 빨래터이자 공용 샤워장이었다.
그렇게 샤워하며 장난치고 있으면 지나가던 주민들이 우리를 보고 웃었고, 우리도 참 많이 웃었다.
막탄 공항을 나와 막막함을 느끼던 찰나 픽업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스탭을 만났다.
이동하는 차 창밖으로 폭우가 쏟아졌다.
함께 지낼 룸메이트가 잠든 방에 도착해서 기어이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샤워장으로 갔다.
땀을 흘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몸을 식히지 않고는 이 더위와 습함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허름한 감옥의 샤워장 같은 곳에서 죄수의 심정으로 샤워를 하는 동안 석회로 막힌 샤워기 구멍 사이로 쏘아진 고압의 얇은 물줄기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마음에 울컥하는 것도 있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과정들이 생각났기 때문인지, 이곳의 열악함 때문인지, 기분이 좋아서인지 알 수 없었다.
금세 몸이 찝찝해지는 덥고 습한 새벽
이국의 낯선 침대, 낯선 룸메이트
온몸과 마음으로 뒤척이며 잠을 청했다.
여행, 한국을 떠난 날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