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에서 자동차 여행을 할 때 가장 괴로운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화장실이고 다른 하나는 주유다.
'화장실이 어디엔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다가는 정말 운전이 다급 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미 수차례 당한 터라 웬만해서는 수분 섭취를 최소한으로 하거나 부득이한 경우 자연 방뇨하고 있다.
늘 마음에 죄책감이 들고 부끄러워서 숨을 장소를 찾는 것도 일이다.
화장실은 마음을 비운다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만 주유의 경우는 다르다.
주유 경고등이 켜지면 조바심이 나고 식은땀이 흐른다.
조난 상황을 생각하게 된다.
기름이 반 정도 남았을 때 주유할 곳을 지나치면 여지없이 경고등에 불이 들어올 때까지 주유소를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데 나는 특히 그렇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 탓도 있다.
보이는 주유소마다 들러 주유를 하면 되는데 왠지 1만 원씩 계속 주유하는 것이 습관 되지 않기도 했고, 주유를 반복하다 보니 나름 합리적인 가격의 기준이 생겨서 비싼 곳은 지나치게 된다.
지나친 후에 오랜 시간 주유소를 발견하지 못하면 어김없이 주유 경고등이 켜지는 상황이 온다.
경고등에 불이 들어오면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집중력으로 연비 운전을 해야 한다.
중립을 이용해서 제동거리를 최대한 늘리고 브레이크는 거의 잡지 않았다.
차가 정말 멈출뻔한 상황이 몇 번 있었다.
그래서 주유소를 발견할 때마다 '지금 채우지 않으면 언제 채울 건데'라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금 채우지 않으면 언제 채울 건데' 이 물음을 던지고 보면 기름에 대한 질문만이 아닌 것 같다.
삶이 이와 마찬가지라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지를 묻다가 나라는 차를 멈춰 세웠다.
베르겐(Bergen)에서 눈을 뜬 아침에, 전날 있었던 모든 일이 아름다웠다는 생각을 하며 괜히 먼 곳까지 산책을 다녀왔다.
나는 늘 좋은 순간에 대한 갈무리가 필요하다.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들을 마음에 새기는 거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마법 같은 오후였다.
목조 건물을 비추던 포근한 가로등 불빛과 부두에 늘어선 천막들, 배를 이용한 수상 레스토랑 이 모든 것이 자고 일어나니 온데간데없다. 베르겐이었다.
절경이라는 피오르를 보기 위해 베르겐에서 구드방엔(Gudvangen)으로 이동했다.
2시간가량 페리를 타고 플롬(Flåm)으로 향하는 길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지정된 피오르를 볼 수 있다.
피오르드는 아름다웠으나, 개인적으로는 깎아져 내리는 듯한 절벽이 그대로 솟아 오른 듯한 Lysefjord의 협곡이 더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완만한 경사의 산이 만든 골짜기를 지나는 느낌이어서 친숙하고 관광을 하기엔 왠지 아쉽다.
헬기나 드론처럼 높은 고도에서 전체를 눈에 담을 수 있다면 더 나은 경치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여행자들이 빼곡히 자리한 갑판 위에서 보는 시야는 너무 가깝고 좁기 때문인지 보트 체험 같았다.
허기질 때 페리 지하에 식당칸으로 내려왔다.
하나라도 빠지지 않고 눈에 담으려는 여행자들이 모두 위에 몰려있는 동안 식당칸에 있는 사람은 나와 노부부뿐이었다.
라면을 먹으며 식당칸 창문으로 경치를 즐기는 것이 꽤 아늑하고 즐거워서 이후로는 편하게 앉아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나름의 시간을 즐겼다.
페리를 타고 가는 동안 카약 보트로 줄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봤는데 몹시 부러웠다.
저렇게 몸으로 뭔가를 헤쳐 나가면서 둘러봐야 피부로 느껴지는 게 많을 테다.
피오르드는 페리보다 직접적인 활동을 해야 조금이라도 진 면목을 볼 수 있는 듯하다.
트레킹으로 고지대까지 걸어 올라가서 내려다봤을 때 대지가 솟아나고 갈라진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피오르드는 빙하가 만든 골짜기에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하여 바닷물이 침입한 것이다.
땅이 솟아난 것이 아니라 패어있는 부분에 물이 차오른 것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언젠가 땅이 솟아나 갈라진 틈에 빙하가 얼었던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다.
플롬에 어딘가에 올라가면 피오르드를 내려다보고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했지만 그때는 왠지 내가 좋아서 가기보다 사진을 찍기 위해 그곳에 가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반발 심리로 가지 않았다.
구드방엔을 떠나 본래의 목적지 Laerdalsoyri로 향하는 길에 내비게이션과 구글이 안내하는 E16 도로를 무시하고 샛길로 핸들을 틀었다.
여행자들의 정보를 참고하여 아름다움이 가득하다는 내셔널 루트로 가기 위함이다.
그곳에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세상이 있었다.
도로변에 정차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작은 감동에 휩싸였다.
정차 중임을 표시하기 위해서 깜빡이를 켜 뒀는데 구조 신호로 생각한 여행자가 지나가면서 차를 멈춰 세우고 괜찮냐고 물은 일도 있었다.
그때 보닛에 앉아 한참 동안 풍경을 감상하던 중이었기에 당장 어떤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괜찮다며 웃어 보냈다.
자연이 너무 대단하지 않냐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 있었다.
처음 보는 지형과 온통 초록색으로 뒤덮인 미지의 세상 곳곳에 눈이 녹지 않고 쌓여있으나 여전히 여름의 노르웨이였다.
시간상으로 늦은 밤에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해가 늦게 지는 것을 이용하여 마음껏 정차하고 길가에서 책을 읽은 탓이다.
연수원을 닮은 형태의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차리기 위해 쌀과 스팸, 고추장을 챙겨 왔다.
Trolltunga에서 어머님이 챙겨주신 반찬으로 연신 행복한 식사를 이어가고 있다.
최대한 끓여서 졸이고 불린 재스민 쌀밥에 스팸을 잘게 부서뜨려서 섞고, 고추장을 비비는 정도로 한 접시 가득한 식사를 할 수 있다.
식당에는 4인의 인도 가족이 여행을 왔는지 음식을 만들고 있었고 강황 가루가 뿜는 카레향이 아찔하게 풍겼다.
카레는 마음 깊은 곳을 뒤흔드는 무언가가 있다.
카레를 만드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지만 나는 어떤 방식이던지 거칠고 진한 카레가 좋다.
향긋한 재스민 쌀과 카레의 조합을 생각하니 입안 가득히 군침이 돌았지만 나의 소울 푸드는 눈앞에 있는 한국 반찬이다.
꼬마 숙녀는 나와 내가 먹는 밥이 신기한 모양인지 다가와서 말을 걸고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덕분에 다른 가족들도 내게 편히 다가와 함께 식탁에 앉았고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혼자 여행을 다니는 내가 신기했나 보다.
나는 인도 아버지들에게 인기가 많다.
언젠가 이 이야기가 인도에 도착하겠지만 인도에서도 여러 아버지들에게 붙들려 질문을 많이 받았다.
대체로 질문은 대동소이한데 내 인생이었다.
어떤 것을 배우고 어떤 전공을 선택하고 무슨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언제 세계여행을 시작했는지 그런 것들 말이다.
모든 결과물의 행적을 궁금해했다.
이유나 과정에 대한 문답은 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많은 대화 중 이공계를 졸업하고 기업에 취직한 이야기만을 콕 집어낸 그들은 몹시 열광했고 어떤 부분에서는 나보다 내 삶을 더 존중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이룬 것에 우쭐하면서 동시에 입이 썼다.
내면에 품은 어떤 것보다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과정을 확인하고 싶어 하고 그 과정의 결과물인 나를 통해 자녀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하도록 훈계하고 싶어 했다.
결국 이것이 나에게 열심히 질문을 던진 주된 목적인 듯했다.
자녀의 훈계로 이어질 때면 민망해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 <세 얼간이>가 인도에서 제작된 것은 현실의 고증인 셈이고, 그 영화에 공감하는 나도 동일한 현실을 살고 있다.
식탁에 앉은 아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나는 이렇게 인생을 걸고 청춘의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내 인생이 타인에게 전달하는 교훈이 학교 성적을 높여야 하는 것이라니 가슴이 답답했다.
이것은 누구의 삶인지 한번 입을 열면 둑이 터지듯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끝내 아무 생각도 흘리지 않았다.
돌격대가 없는 동안에는 내가 방을 청소했다. 지난 일 년 동안 방을 청결하게 하는 것은 내 습관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돌격대가 없을 때는 내가 그 청결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매일 방바닥을 쓸고, 사흘에 한 번은 창문을 닦았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이불을 내다 널었다. 그리고 돌격대가 돌아와서 "와, 와타나베! 어찌 된 일이지? 이거 굉장히 깨끗하잖아." 하고 말하며 칭찬해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대학교 신입생 1년을 기숙사에 지냈지만 룸메이트에 대한 많은 기억은 없다.
1학기, 2학기 두 번에 걸쳐 다른 방 다른 룸메이트 선배가 있었는데 한 명은 통통했고 한 명은 홀쭉했다.
그들의 이름도 학과도 기억나지 않지만 두 번 다 좌측 책상, 2층 침대를 내가 사용했던 것은 기억한다.
1학기는 매일 놀았기 때문에 건이 집, 진우 집에 잔 날이 기숙사에 잔 날 보다 많았고 2학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늘 룸메이트가 나를 그리워했다.
수차례 '오늘은 들어오니'라고 문자가 왔지만 들어간 적은 많지 않다.
외박계를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숙사였다.
이모집, 고모집, 본가 방문을 돌려가며 사유를 제출했다.
기숙사에 통금이 있어서 0시에 문을 닫고 5시에 문을 열어주니까 밖에서 놀다가 5시에 문이 열리면 들어간 적도 있다.
그런 날에는 아침에 잠들어서 점심을 먹기 위해 일어났고, 일어나면 당연히 룸메이트가 없었다.
부딪힐 일 자체가 없으니 몹시 평화로운 기숙사 생활이었다.
룸메이트들은 정돈을 잘하는 사람들이었고 난 생활 패턴이 단순하고 짐 자체가 워낙 적어서 어지럽힐 것이 없었다.
방은 늘 단정한 상태를 유지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주 깔끔하진 않았다.
새벽에 들어와서 느지막한 시간에 일어나면 이따금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휴지통을 비우는 정도였다.
기숙사 문이 닫힌 뒤에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사다리를 이용해서 담을 넘었다.
외박하지 않으려고 결심했다가 야식에 소주 한잔 하자는 유혹을 못 버틴 날이 그랬다.
이럴 때는 보통 아영이네 불닭집을 갔다.
2학기 개강을 앞두고 고민 사거리에 불닭집이 오픈한 날부터 아영이네는 아지트 중 한 곳이 됐다.
넘어갈 수는 있지만 돌아오지는 못할 길을 건너고 나면 꼼짝없이 5시까지 술을 마시거나 친구들 집에 자야 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며 졸았다.
이런 나의 행실을 떠올리면 대체 기숙사는 왜 통금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통금이 없었다면 적어도 기숙사에 들어와 자는 날이 더 많았을 것이다.
가끔 애들과 술 약속이 없을 때는 저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였는데 그런 날에 기숙사에 가만히 있으면 내가 대체 무슨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무엇을 해야 이 시간을 잘 보내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대학생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만 같았는데 일상에 특별한 일은 어느 것도 없었다.
간간히 봉사활동을 하는 동아리 선배들과 미팅을 하고 봉사 활동을 갈 때는 그나마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룸메이트와 한 방에 있던 날도 딱히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그들이 많은 것을 감수했을지도 모르겠다. 보통 한쪽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면 그렇다.
학기 내 얼굴을 마주치기 힘들었던 룸메이트는 둘 다 얼굴을 보지 못한 채 헤어졌다.
나보다 학년이 높은 룸메이트 들은 시험기간에 밤새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듯했다.
늘 1학년인 내 시험이 먼저 끝났고 그때는 콩알만큼 공부한 것을 가지고 종강의 기쁨을 크게 누리며 밤새 놀았다.
학교에 있는 모두가 종강할 때까지 그랬다.
마지막 시험이 종강과 같은 기숙사 대학생들은 대부분 서울을 떠났고 방에 들어가면 비워진 룸메이트 자리만 남아있었다.
작별 인사는 문자로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