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치앙라이의 일상

by 김창훈

난 유치원을 차려도 먹고살겠다.


첫 봉사를 수행하고서 나는 영어 유치원을 차려도 먹고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아이들의 지지와 호응을 얻으며 즐거울 수 있다니.

이전에 마이크를 들고 배추 팔고,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하고, 행사 뛰던 그 경험들이 이렇게 쓰인다.

모여라 얘들아 영어 레크리에이션 시간이란다.




문에 옷을 아슬하게 걸어두고서 바가지로 뜬 물을 처음에는 손과 발에 뿌려보고, 그 차가움에 놀라서 차마 몸에 물을 끼얹지 못하고 머리를 먼저 감다가, 결국 몸에 한 바가지 크게 붓고 나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시장에서 산 펑퍼짐한 바지와 이곳에서 준 옷 중 반팔티를 입었다.

지급된 상의는 봉사자의 표시이자 봉사 교복 같은 것이어서 봉사하러 갈 때 꼭 입어야 한다.

봉사 팀별로 맞춰 입을 옷을 미리 정하기 때문에 개인이 챙겨 입을 것은 바지뿐이다.

첫 주에 봉사자들과 함께 치앙라이 시장에서 바지를 샀다.

얇고 펑퍼짐한 바지는 냉장고 바지와 개량한복의 중간쯤에 위치해서 통풍이 잘되고 활동성이 좋다.

아무튼 아침에 일어나서 옷 입는 것 때문에 시간을 소요할 것은 없었다.

씻는 것도 포기한 사람들은 그저 밥 먹고 시간 되면 봉사지로 떠난다.

나는 아침에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은 뒤 교육 봉사에 필요한 교보재를 챙겨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분주했다.


준비가 된 팀들은 예정된 시간까지 차에 올라타는데 봉고차나 버스가 아니라 트럭 뒤에 타는 것이기 때문에 영락없이 훈련 가는 군인들의 행색과 흡사하다.

군대와 비슷하다는 말을 했더니 엘리엇이 내게 군인이었냐며 놀라 되묻고 본인이 우쭐하다.

베트남에서는 야푸가 그러더니 왜 한국 군인들을 보고 본인들이 우쭐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헬멧을 쓰고 있으면 머리가 얼마나 간지러운지, 흔들리는 육공 트럭 뒤에서 졸려도 졸 수 없는 이등병의 하루가 얼마나 고단한지, 오래된 총열은 아무리 닦아도 강선이 선명하지 않아서 혼나야 하는 게 군생활이란 걸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천막으로 지붕을 둘러싼 트럭 안에 2열로 마주 앉아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에 튕기는 엉덩이를 버티며 간다.

처음에는 왁자지껄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말이 없어지는데 이럴 때를 대비해서 나는 늘 주머니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갖고 다닌다.

트럭을 타고 봉사지로 가던 첫날, 왁자지껄하던 대화가 사그라들고 덜컹거리는 움직임과 차 소리만 들릴리는 적막 속에서 “친구들 음악 좋아해?” 라며 스피커를 꺼내 들자 모두가 놀라 환호성을 질렀다.

팝에 대해 잘 모르고 큰 관심이 없을 때라 내가 보유한 곡이라곤 조금은 오래되고 진부한 것들 뿐이었지만 음악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낭만을 던져주기 때문에 어쨌든 모두가 좋아했다.

이후로 내가 음악을 틀려고 하면 페드로가 “DJ K”라고 크게 외쳤다.

적막한 순간을 파고드는 음악이란 대단하다.

음악이 나오면 따라 부르는 아이, 좌우로 몸을 흔드는 아이, 차 밖으로 발을 내놓고 멀어지는 풍경과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아이. 제각각이지만 모두 미소 짓고 있다.

태국 치앙라이에서 트럭 뒤에 올라타고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를 지나 봉사지를 오가는 경험은 인생에 특별한 경험이란 것을 모두가 아는 탓에 이런 순간을 하나라도 더 기억할 만한 것이 있다면 좋은 것이다.

얼굴과 덩치로는 내 또래 같은 애들이 알고 보면 모두 스물두어 살 나이라서 웃음이 싱그럽다.

저마다 청춘의 한때를 도전하는 친구들이다.




나를 도전과 두려움으로 움켜쥔 영어는 수업에선 해당되지 않았다.

“A, B, C, D .. H, I, J and then?” “K!!!!”

“오 그래! 내 이름은 K야!”

필리핀에서 이름을 K라고 소개한 이후로 K란 알파벳을 내 영어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고, 늘 처음 들어가는 학급에선 이렇게 소개를 한다.

여태껏 이만한 자기소개, 이만큼 외우기 쉬운 이름은 보지 못했다.

내 입장에선 아주 평범하고 무성의한 이름이지만 쉽고 독특하기 때문인지 봉사자들 뿐만 아니라 봉사지의 아이들도 내 이름을 즐겨 부른다.

나이 서른이 넘은 것도 나 혼자, 단일 알파벳도 나 혼자, 교육팀 중 동양인도 나 혼자, 세계여행 중에 봉사지에 들린 것도 나뿐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내가 신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전과 오후 각각 다른 봉사지(학교)에 방문하고, 2명이 짝을 이뤄서 번갈아 가며 수업을 진행한다.

봉사자 1명이 적어도 하루에 2번 교단에 서는 셈이다.

부족한 영어로 교단에 선다는 것을 생각하면 몹시 두렵고 부담되는 일이지만 저학년 (또는 고학년이지만 기초적인 영어만을 다루는 이들)을 대상으론 뛰어난 지식이 필요하진 않다.

그보다 아이들이 흥미를 갖고 수업에 참여하도록 하는 게 더 앞선 과제라는 것을 봉사 첫날 기존 봉사자들의 수업 진행을 보조하면서 알게 됐다.

이후로 수업에 대한 부담은 내려가고 즐거운 일이 됐다.

저학년을 대상으로 봉사자들이 수행하는 것이라곤 큰 의미에서 레크리에이션과 별다른 게 없었던 것이다.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뿐이었다.


저학년의 경우 ABCD 알파벳과 색상, 동물, 자연 같은 주제 별로 단어를 알려주는 것을 시작으로 수업은 진행되고 지루하면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게임을 병행하는 것은 필수다.

기초 영어와 레크리에이션 내가 잘하는 것이다.

나는 단숨에 스타가 됐다.

키가 고만고만한 동양인 청년은 일단 아이들과 눈높이가 맞고, 유치하고, 충동적으로 뛰어노는 것에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높은 목소리로 말하고, 뛰고, 움직이고 이렇게 수업을 하고 나면 체력소모가 굉장한데 교육을 한 보람보다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에 대한 보람이 더 크다.

준비한 교보재는 내 레크리에이션 도구로 전락했고 쉬는 시간에도 아이들이 주변을 맴돌았다.


고학년의 경우 기초 구조의 문장이나 시제를 포함하게 되는데 이때도 진행 방식은 마찬가지다.

수준이 있는 영어와 정확한 발음에 대해서는 부담스럽지만 페드로, 로버트 등 다른 친구들과 함께하니 괜찮다.

나는 내가 잘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희한하게도 어디에서나 내가 활약할 부분이 있다.

영어 실력이 떨어지고 R과 L, G와 Z 발음은 친구들의 놀림거리지만 교육과 놀이를 병행해야 하는 어린아이들 수업에선 모두 나 하나만 믿고 바라본다.

아이들과 뛰어놀고 놀이를 만드는 것은 내가 잘하는 것이니 ABC 노래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영어 실력을 늘려주는 것과 무관한 게 아닌가 싶은데도 놀이 중에 단어를 배우고, 영어와 친근해진다고 하니 고민할 필요 없이 아이들을 휘젓는다.


봉사가 모두 끝나고 네시 반쯤 봉사자 캠프로 복귀하면 곧장 회의가 진행된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작아지는 순간이다.

이 봉사자 회의에서 니키가 오늘 강의 진행 상황을 묻고 강의 방향과 소감, 개선점 등을 요구하는데, 왠지 그 회의실에서는 영어를 뱉는 게 몹시 힘들어서 이때가 심적으로 가장 어렵다.

밝게 웃으며 경청의 자세를 취하되 시선은 똑바로 마주치지 않고 얼굴도 제대로 비추지 않도록 노력한다.

누구보다 큰 호응을 이끌며 열정적인 봉사를 하고도 움츠러드니 스스로가 답답하다.

의료계여 과학과 문명이여 어서 언어능력을 주입하는 주사를 발명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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