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전부다

떠날 시간

by 김창훈

홈스테이를 마친 뒤부터 모든 일상이 자연스러워졌고 위축됨 없이 편했다.

이제 태국을 떠날 시간이 된 것이다.

움직이는 여행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매우 선명하게 다가왔다.


필리핀에서부터 서쪽으로 지나온 동남아의 날들이 참 좋았다.

따뜻한 나라, 따뜻한 사람들, 선명한 이국적인 느낌 그리고 알지 못할 편함까지.

세계여행의 모든 일정을 이곳에서 다 보내라고 해도 보낼 수 있을 만큼 동남아는 내게 매력적이다.

그럼에도 더 많은 상황을 마주하기 위해 이동하려 한다.

이곳에서 먼 곳으로 훌쩍. 먼 북쪽의 나라 핀란드로.

치앙라이 봉사 캠프의 마지막이 다가온다.


다시 치앙라이에서 봉사지의 일상이 시작되고 스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특히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엔 방에서 자지 않고 오두막에 모여서 노래를 틀고 대화를 나누고 게임을 했다.

우리가 가장 많이 했던 보드게임 UNO는 늘 나의 패배였고, 게임 중에 깔깔대며 웃다 보니 정든다.

스태프들마다 지나가다 나를 발견하면 UNO라며 깔깔대며 웃었다. UNO!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것은 늘 순간을 애틋하게 해서 하루 봉사가 모두 끝난 저녁식사 이후에도 오두막이나 스텝 숙소, 식당 등에 모여서 떠들썩하게 친목을 다졌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을 알게 되고 친해지다 보면 비로소 그 장소가 온전히 편해지는 것 같다.

이전에도 봉사 캠프의 모든 곳을 돌아다니고 잠을 자고 회의를 했지만 사람들을 알게 될수록 이곳이 편하고 둘러보는 시야가 넓어졌고 누군가를 마주치는 일이 즐겁다.

나에게 사람이 주는 영향이란 너무나 거대해서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일상을 바꾸는 일만큼 대단하다.

나한테는 정말 사람이 전부다.

학창 시절에도, 직장 생활 때도 사람을 알게 될수록 그 생활이 심적으로 안정되고 즐거웠다.


많은 봉사자들이 읍내로 또는 다른 도시로 빠져나간 금요일, 친구들과 식당에 모였다.

영어를 배우고 싶다던 몇몇의 봉사자들에게 엘리엇이 도움의 손길을 뻗어서 만든 엘리엇의 영어교실 수강자들이다.

모이고 보니 엘리엇과 동양인들이라고 칭해도 될 듯했고, 배움을 빙자한 친목과도 같았다.

영어를 배우며 왁자지껄한 시간을 갖다가 어느 순간엔 정적이 흘렀다.

대다수 봉사자들이 밖으로 빠져나가고 한적한 이곳의 밤은 깊어가는데 다들 이제는 뭐 하나라는 눈빛으로 몸을 늘어뜨려 흐느적댄다.


“나가자”

나는 나가자고 말했다.

같이 걸어 나가서 야식을 먹으면서 놀자고 했다.

오늘을 즐겁게 놀아보자고 했다.

큰 대책은 없었지만 이렇게 보내기엔 이 밤이 아쉬웠다.

그렇게 여덟 명의 아이들이 나를 따라나섰다.

산중의 봉사지를 빠져나와 어두운 길을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모험의 기분이 들었고 작은 슈퍼에 있는 의자에 앉은 것만으로도 미지의 장소로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지만 저절로 흥이 나서 과자와 맥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몫만 갖고 앉으면 됐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일련의 책임감을 느끼며 재밌게 놀아야겠다는 생각에 게임을 제안했다.

그 무렵엔 봉사지에 나와 영현이 외에도 한국인이 두 명 더 늘어있었고, 술자리 게임은 우리나라가 최고다.

그 종류와 즐거움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게임으로도 모두가 깔깔대며 웃고, 마셨고, 볼일을 보기 위해 중간중간 숲으로 뛰어갔다.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자리에 돌아오려고 뛰어다녔고, 숲이 우거진 곳에서 함께 볼일을 보면서 무엇이 그리 웃기는지 모른 채로 하하하 웃었다.

그냥 웃음이 계속 나왔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봉사일이다.

그날 밤 신나게 논 아이들과 엘리엇 그리고 로버트는 봉사지에서도 유독 돈독해져서 직역하자면 '동서양에서 온 최고의 친구들'이란 이름의 모임을 페이스북 메신저에 만들었고 세계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그 메신저 방을 통해 서로 소식을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


방콕에서 러시아로 향하는 비행기는 아홉 시간 오십오 분을 날았다.

쪽잠을 자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기내식을 부지런히 음미했다.

그 긴 시간은 전혀 지루하지 않고 즐거웠다.

나는 내 삶이 이렇길 바랐다.

모스크바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자 기내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고 나도 덩달아 박수를 쳤다.

길게 휘파람을 부는 사람도 있었다.

이곳에서 환승하여 핀란드로 간다.


모스크바 공항은 횡으로 길게 펼쳐져 있었고, 내린 곳에서 환승 장소인 D구역까지는 무려 이십오 분을 걸어야 했다.

창밖 저 멀리 보이는 러시아의 숲에 마음이 요동쳤다.

그 설렘의 기분은 ‘숲’이라고 발음하면 입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는 김훈 선생님의 책 때문인지 내가 가게 될 핀란드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추운 지방의 나무는 열대의 나무와 달라서 그 숲이 주는 풍경이 늘씬하고 서늘했다.


하늘에서 본 핀란드는 온통 숲이었고 우리는 그 숲으로 착륙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밟은 유럽.

그리고 핀란드 입국 심사장에서 잡혀 비밀의 방에 연금됐다.


사방이 하얗고 3~4개의 의자가 있는 방.

연행해 온 보안관이 잠시 나간 사이 두리번거리던 나는 구석지의 콘센트를 이용해서 핸드폰을 충전했다.

연행된 이유를 확인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단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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