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민의 자세
얼마 전 BTS 지민씨가 입은 티셔츠가 엄청난 논란이 됐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처음에는 기사를 보고 잉? 설마! 했습니다.
기사는 BTS 지민씨가 원폭투하되는 사진과 독립만세를 부르는 사진이 들어간 티셔츠를 입었다고 해서 일본 방송에서 출연 취소가 됐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저는 방송 출연 취소라는 대목보다 원폭투하되는 사진에서 설마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찾아보니 사실이었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일본 방송에서 출연 취소 요청을 한 것을 두고 유치하다거나, 지민은 잘했다, 속이 시원하다 이런 입장이 대부분인데요. 사실 저는 일본에서 방송 출연을 취소하는 건 당연한 처사이고,(우리라도 그랬을 것이고) 지민씨가 그런 티셔츠를 입은 건 부적절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사실 BTS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팬들과 함께 성장해 온 그룹이라는 것은 압니다. BTS 멤버들이 부적절한 행동이나 말을 할 때마다 팬들은 그것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했고, BTS 멤버들은 문제가 된 부분은 인정하고 행동을 수정하면서 지금과 같은 글로벌 아이돌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만 놓고 봤을 때는 팬들이 사실 BTS에게 글로벌 아이돌로 성장할 수 있는 매너를 알려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무심코한 인종차별적인 행동이나 언행 등에 대한 지적 등이 대표적입니다. 우리 사회 안에서 아무렇게나 사용되던 차별적 언어들이 밖으로 새나갔을 때 돌아온 리액션에 BTS도 당황하고, 아마 글로벌 팬들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을 겁니다. 어쨌든 팬들과 셀러브리티 사이에 공고한 연대같은 게 존재한다는 점이 BTS가 다른 아이돌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팬들과의 연대 속에 차곡차곡 인기를 쌓아왔지만 빵 터지면서 폭발력을 갖기 시작한 건 한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이 크면 음도 큰 법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전세계의 이목이 쏠리면서 BTS 멤버들의 고민도 깊어졌을 거 같은데요. BTS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유엔 연설입니다. RM의 연설에서 자신은 여전히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한 도시에 살고 있는 아무개 씨의 아들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자신과 손짓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월드스타라는 점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며 애써 균형을 잡으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요.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견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건 지 저건 지도 모르고 그냥 휩쓸려서 사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어쨌든 한 개인이 한 나라 안에서 소속돼서 소소하게 살다가 국제적으로 위상이 부각되면 자연스럽게 국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따라옵니다. 사실 태어나서 모국에서만 살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국가 정체성을 크게 고민하거나 느낄 이유는 없지만,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되면 국가 정체성, 국가의 위상에 대해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BTS 멤버들도 전세계 투어를 통해 이런 상황들을 맞닥드렸을 것이고, 늘 한국에서 온 아이돌로 소개가 될테니 한국에 대한 질문도 많이 받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이고, 나는 이를테면 나라를 대표하는 한 사람인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생기겠죠.
아마도 지민씨가 그런 티셔츠를 입은 건 그 고민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봅니다. 한국 사람으로서 늘 일본에 할말도 못하는 상황에 분노하는 우리 국민들의 정서를 갖고 있었던 거겠죠. 그런데 문제는!
원폭투하 사진입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리면서 일본이 항복을 하고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나라도 독립을 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티셔츠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외부에서 우리나라를 바라본 시각이라고 봅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미국인이라면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는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저는 남미라든지, 동남아 사람들을 만났을 때 신기했던 점이 그들도 오랜 식민지 체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갖는 정서처럼 식민화한 나라에 대한 원한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런 게 별로 없었던 거 같아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뭐 깊은 얘기를 나눠본 건 아니지만 제 생각에 좀 무덤덤한 느낌이었습니다. 흑인들도 백인들에게 갖는 정서가 그렇게 날카로운 것 같지도 않고요. 물론 짧은 제 소견일 뿐입니다.
그에 반해 한국 사람들은 일본과 교역도 하고 유학도 가지만 여전히 우리 조상들이 당한 일들을 생각하면 내가 당한 것처럼 서슬 퍼런 기운을 띄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건 우리나라가 갖는 민족성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예전에 중국에서 고구려 사람들을 보고 "말을 잘타고 싸우기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이런 호전적인 기질은 우리 DNA에 새겨져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우리는 외세에 의해 독립했다는 사실보다는 우리가 공고한 일제 치하에서도 얼마나 지지않고 싸웠는지, 그런 여러가지 일련의 사건들이 모여서 일제에 계속 균열을 가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부의 시각으로만 보자면 3.1운동이나 유관순, 윤봉길, 안중근 의사 등 우리가 교과서에서 독립을 위해 싸운 수많은 사람들의 행위를 '노력은 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싸우지 않고 순응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골리앗을 상대로도 기죽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삶을 구걸하지도 않고 싸웠다는 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날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지만 우리 손으로 독립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가슴 아파한 많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 손으로 일제를 물리치고 독립을 했더라면 현대사의 질곡의 시간을 겪지 않거나 최소화하면서 한국 전쟁도 없었을 수도 있고 지금과 같은 기형적인 휴전 상황도 지속되지 않았겠죠.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역사가 전개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있죠.
물론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지옥같은 일제 치하의 시간을 견디는 것보다는 미국에서 일본을 이겨서 일본 제국주의 하에 있던 식민지들을 해방시켜준 건 잘된 거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손으로 일제를 물리칠 수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는 상황이니까 말이죠.
그래서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사진을 보면서 묘하게 카타르시스 같은 걸 느끼는 것 같습니다. 평소 나를 괴롭히던 사람을 누군가 나타나서 흠씬 두둘겨 패는 걸 보는 것과 같은 거겠죠. 그런데 만약 두들겨 패는 정도가 아니라 칼로 난도질을 했다든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서 그걸 본 나에게까지 큰 트라우마가 생기고 나의 일상이 무너지는 상황이 발생했다면, 꼭 그렇게까지 해야했을까, 라며 방법에 의문을 제기하겠죠.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일본이 즉시 무조건적인 항복을 한 걸 꼴 좋다며 강건너 불구경 하기에는 한국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남의 집에 불을 지른다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그 집에 내 아이도 있었던 격이라고나 할까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히로시마에서는 14만명, 나가사키에서는 7만명이 사망했습니다. 살아남았지만 원폭피해를 당한 사람은 35만7000여명을 넘습니다.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건 일본이지만 다음은 조선입니다. 조선인은 7만명이 원폭피해를 받았고 그 중 4만명이 사망했고 3만명이 원폭피해의 고통에서 얼마 전까지 치료비도 지원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신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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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 투하는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에 따른 제2의 피해국이기도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가담해 전쟁을 일으킨 일본과 공범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의적으로 동참한 게 아니기 때문에 국제법 상 제재는 면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전쟁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자폭탄으로 사람을 죽이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원자폭탄 투하에 따른 인명 살상의 문제는 지금은 미국과 일본의 외교적 관계 때문에 크게 부각되고 있지는 않지만, 후세에 냉혹한 평가가 이어질 거라고 봅니다. 환경에 미치는 영향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지구에 사는 생명체 중에 원자폭탄 투하에 따른 방사능 누출에서 자유로운 개체가 있을까요? 어느 국가에 살든 어떤 경제적 지위를 가졌든 환경 문제는 결코 개인의 문제가 될 수 없고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일례로 일본의 방사능 유출로 전세계 바다는 오염되고 있고 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명태와 같은 어종은 대표적인 방사능 노출 생선이고, 참치와 같이 먹이사슬의 가장 상위에 포진한 개체들도 중금속, 방사능 오염지수가 높은 편입니다. 방사능이 공기 중에 노출되는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일부 환경단체에서는 표고버섯의 표면은 방사능 성분이 잘 달라붙는 물질로 돼 있어서 전세계 모든 표고버섯은 방사능에 오염됐다고 보고 있고 북한의 잦은 핵실험으로 북한에서 나는 고사리에서도 방사능 오염물질이 검출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전세계에서 히틀러만 나쁜 사람이고 맨날 독일총리만 사과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독일과 비교하며 더욱 원한을 품지만, 패권이 바뀌는 순간이 오면 미국에 대한 냉혹한 평가가 이어지며 일본 원폭투하에 따른 평가도 공론화될 거라고 봅니다.
미국의 일본 원폭투하는 우리가 엮여 있지 않다고 해도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니와 우리가 매우 밀접하게 엮여 있어서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데 글로벌 아이돌로서 애국주의와 원폭 투하 사진이 실린 티셔츠를 입었던 건 경솔했다고 봅니다. 월드스타의 문턱에 들어선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더욱 신중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티셔츠는 예쁘지가 않고 철학이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 티셔츠를 보면서 품질관리마크인 KC인증 뿐만 아니라 디자인과 품질이 좋지 않은 건 판매 허가를 내주지 않는 제도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요즘 아이돌들이 사회적 기업 제품들 하나씩 써주는 게 유행인데, 저런 국뽕 장사하는 사람들을 거르는 눈도 키워야 할 것 같습니다.
BTS의 성공을 뒤에서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 입장에서 보자면, BTS가 지금과 같은 혹은 더 큰 월드스타가 되려면 글로벌 감각을 기르는 게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감각이란 외국어라든지 다른 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는 것과 동시에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자각과 인류애라든지 환경 문제라든지 모든 인류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게 글로벌 감각이라고 봅니다.
애국주의 티셔츠를 입기 보다는 오히려 외국 방송에 나갔을 때 사회자가 예민한 한일 관계 등에 대해서 질문하면 똑부러지게 대답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거죠. 거기서 애매하게 대답한다든지 난 아무것도 모르오 라는 입장을 취하면 자국민들에게 거센 저항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선 어떤 질문이 들어오든 명확한 소신을 밝혀야 하고, 그것에 따른 어떤 패널티도 감내하는 용기를 지닌다면, 오히려 BTS의 뿌리가 더 단단해 질 것이고 지지도 더 많아질 겁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한국 사람이지만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 인권탄압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도 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도 참견 말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참견말자는 입장이 많은데 이건 국제 사회를 살아가는 글로벌 시민의 자세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제는 니 일 내 일 이렇게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문제보다는 네 문제가 내 문제가 되는 세상입니다.
국경과 민족이라는 틀에 가둬서 생각하기 보다는 더 많은 곳을 다니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입장에 있는 만큼 한층 더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아미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전세계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럴 거라는 기대가 있어서 이런 글로 부랴부랴 써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