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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타임 Jun 17. 2019

비추천 도서, 개인주의자 선언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333

지난 해 한해동안 가장 인기 있었던 책이 발표됐다. 그 중에 항상 교보문고 도서진열대의 중심에 있던 <개인주의자 선언>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제목으로나 저자의 캐릭터로나 이 책에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선물을 받아서 결국엔 읽게 됐고, 예상처럼 뻔하고 재미없는 소리가 계속 계속 나와서 지루했지만 그래도 선물받은 거니까 끝까지 읽기 위해 의미를 찾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왜 이 책을 좋아하는지 생각해 봤다. 

 

내가 볼때 이 단편적인 칼럼의 내용들은 여느 신문 오피니언 면에 나올 법한 칼럼, 딱 그 정도였다. 그러니까 베스트셀러가 될만큼 트렌디하거나 새롭거나 그런 얘기가 아닌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사람이 자신의 지위와 지식을 동원해서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런 글들 말이다. 


그래서 별다른 것 없는 글인데 왜 인기가 있는지 생각해 보니 이 책이 인기 반열에 오른 가장 이유는 아무래도 손석희 앵커의 추천사가 큰 몫을 한 것 같다. 아래는 추천사이다. 

"나는 문유석 판사 생각의 대부분과 그의 성향이 상당 부분이 나와 겹친다는 데에 경이로움까지 느끼면서 이 책을 읽었다. 이러면 훗날 내게 기회가 오더라도 이런 책을 쓸 필요가 없게 된다. "

평소 말을 아끼는 손석희 앵커가 쓴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엄청난 찬사가 담겨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제목이 큰 역할을 했다. 나에게는 너무 진부한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말이, 지금 이 시대에는 가장 절실한 말인 것 같다. 올해 가장 인기 있었던 책들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미움 받을 용기, 자존감 수업, 신경 끄기의 기술, 어떻게 살 것인가,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그리고 개인주의자 선언. 


어딘가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는가. 

책 제목만 봐도 공동체 중심주의인 기성세대의 질서에 혼란스러워하고 상처받으면서 좌충우돌 살아가는 20~30대들의 심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다. 개인주의자 선언은 이 시대 젊은이들이 기성세대를 향해 가장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나를 내 개인으로 존중해달라',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고 싶다' 

맞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걸 풀어내는 '개인주의자 선언'의 방식에는 의문이 든다.


목차를 보니 1부는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2부는 <타인의 발견>, 3부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 등으로 나뉜다. 

1부 소제목부터 보자.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너무나 듣고 싶고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싫은 걸 싫다고 말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이 있고 그걸 쉽게 벗어던질 수 없기 때문에 이런 혼선이 생기는 건데 그것에 대한 사회적 통찰같은 건 없고 모두 합리적 개인주의자가 되자고 이야기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 동물이니 타협하고 연대하자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좋은 말이다. '행복도 과학이다'라는 칼럼에 보면 마지막 문구에 

'만국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은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똥개들이 짖어대도 기차는 간다.

같은 속편한 소리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저자는 살아온 내력을 보면 싫은 걸 싫다고 말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싫은 걸 싫다고 말함으로써  '완전 꼴통이네'라는 멸시와 비아냥도 한번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싫은건 싫다고 해'라면서 전혀 공감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는 싫은 걸 싫다고 하고 싶지 않겠는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떠나서 결혼하고 명절을 맞으면 시댁부터 먼저 가서 일복으로 갈아입고, 좋아하지도 않는 전을 몇시간 동안 부치고, 그 다음날에는 꾀재재한 차림으로 잘 모르는 시댁 친척들을 맞이하며, 차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절을 하러 온 남자 손님들이 아침을 먹는 사이 과일을 예쁘게 깎아서 상에 올리고 그들이 밥을 다 먹고 나면 그제서야 두번째 상을 차려서 퉁퉁 불어서 떡과 만두와 국물이 하나가 된 떡국을 먹으면서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들고 서러운 생각이 밀려오지만, 

거기다 대고 '명절은 누굴 위한 거예요? 이렇게 하는 건 구시대적인 방식이고,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꼭 하셔야겠다면, 다음부터는 간소하게 하던지, 남자들이 전부치면 안되나요? 아니면 여자들이 일하느라 고생했으니까 여자들이 먼저 먹을게요. 상부터 치우고 계세요'라고 말하는 건 얼마나 합리적인가.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건 철이 없거나 멍청한 것 둘 중 하나다. 왜냐하면 바뀔 거는 하나도 없고 나만 '돌아이'가 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돌아이가 된다는 건 꼴통이라는 멸시와 차별적 발언, 시선을 '평생' 받아야 한다는 걸 말한다.  


나는 가부장제 틀 안에서 살면서 가부장제를 깨부수겠다는 일념으로 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치기 어린 생각이었다는 걸 깨닫고 있는 중이다. 가부장제라는 건 생각보다 견고하고 촘촘하다. 젠더 문제로만 풀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더 복잡하다. 적이 누군지 아군이 누구인지도 분간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편하게 싫은건 싫다고 말하라니. 그것으로 잃을 것은 오로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라니. 그래도 여기까지는 꾹꾹 참고 읽고 있었다. 뒤에 가면 뭐 한줄이라도 새겨들을 말이 나오겠지 하면서. 그런데 '아무리 사실이라 믿어도 함부로 말해서 안 된다' 칼럼을 읽고 뚜껑이 열려버렸다. 사실 지금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젊은 세대의 차별적 시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마지막 문단에서 

'생각해보면 후배 세대의 위악은 선배 세대인 나 같은 사람들의 위선이 낳은 것이다. 열린 교육과 인간화를 주장하며 뒤로는 내 자식만 잘 되라고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의 조직적 커닝을 시키느라 고전을 읽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권위주의와 싸운다는 명분으로 막말과 냉소가 주는 쾌락에 도취했고 그 결과 진보와 보수라는 탈을 쓴 반지성주의가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는 인터넷 생태계를 만들었다. 후배들에게 사과하다. 기득권은 다 누린 주제에 극심한 경쟁과 불투명한 미래에 좌절하는 후배들을 싸잡아 욕하는 선배의 일원이기에 말이다. '


사과한다?

사과한다?

이게 이렇게 간단한 문제인가?

젊은 세대가 양보나 타협, 화합 대신 경쟁과 서열을 중시하며 차별을 만들어내고 있는 가장 이유는 문유석 판사같은 기성세대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 자신들은 기득권을 독점하며 부동산으로 편하게 집값을 올리면서 재산을 증식했으면서 요새 애들은 생각이 없네 어쩌네 하면서 우리때는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척 하는) 걸 유일한 훈장으로 내세우면서도 회식자리에서는 못먹는 사람들한테 술 먹이고, 재미없는 헛소리 해대면서 젊은 애들이 웃어주길 바라고, 안쓰던 얼굴 근육과 뇌 속에 잠들어있던 재미있던 추억을 총동원해 억지로라도 웃어주려는 건 모르고 젊은 애들이랑 말이 통한다고 떠들어대는, 도무지 사회적 공감 능력이라고는 꼬딱지 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는 종족들이다.  


나는 대학 다닐 땐 386세대를 존경했지만, 사회에 나와서 본 그들의 민낯에는 경악했다. 술먹으면 옛날 민주화 운동했던 타령을 하면서 자신이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제 밥그릇 챙기기 바쁘고 과오는는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사람에게 떠맡기고, 권력과 돈 앞에 설설 기던 사람들. 

아직까지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386세대에 대한 철저한 비판 내지는 '심판'이 없지만 그런 것들이 이루어져야 우리 사회가 한발짝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386세대는 민주화를 위해 일조한 공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의 도덕성이 모두 완전무결하다고 할 수 없다. 지금 한국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양산한 책임이 그들에게도 있다. 그런데 '개인주의자 선언'은 그걸 인정하는 척하며, 사과한다는 말 한마디 하고 넘어갔다. 자신과 자기가 속한 세대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사유가 없었었음을 드러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봐도 '개인주의자 선언'이 성공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좋게 말하면 전체 구성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제목을 갖다 붙인 출판사의 마케팅 승리이며, 나쁘게 말하면 출판사기이다. 책을 중간까지 꾹 참고 보다가 성질이 나서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 어떤 사람들이 도대체 이런 말도 안되는 말에 번지르르하게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엄청난 말을 붙여놓았나 이름 하나 하나를 확인했다. 

그들은 아마도 기획회의에서 '요새 애들은 개인주의라면 환장을 해'라면서 수십개 칼럼 중 딱 한두개에 있는 개인주의라는 말을 끌어와서 갖다붙인 것 같다. 어찌보면 요새 트렌드와 잘 맞기도 하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써붙이고 보면 사실처럼 보이는. 유기농이라고 써놓으면 유기농이 되고, 천연이라고 써놓으면 천연이 되고, 원조라고 써놓으면 원조가 되는.  


한편으로는 저런 책이 팔리는 현실에 대한 측은한 생각도 든다. 시대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있는데 그걸 제대로 해소할 수 있는 창구는 없고 책이고 영화고 상품이고 모두 하나같이 그 감정을 이용해서 하나라도 팔아먹으려만 하는거다. 답답한 마음에 저런 책 사서 보면 도움이 될까 해서 사보지만 별 도움은 안 될거다. 

에세이가 재미있으려면 하나의 필수 조건이 있다. 저자가 다양한 인생의 경험과 일종의 인생의 굴곡을 경험한 사람들의 글이 내용도 풍부하고 관점도 확실하며 사유도 깊다. 반면에 인생에 큰 굴곡없이 모범생의 길을 걸어온 사람은 깊이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마음에 울림을 주는 글이 필요하다면, 온몸으로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사람의 글을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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